< 75화 흔들리는 군웅할거 (유료연재시작) >
왕선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궁예의 책사를 살려두자는 건 대체 무슨 경우요?”
정도전은 멋쩍게 웃으면서 아쉬운 말을 했다.
“사실 그게 좀 그렇습니다.”
“음. 사질이라서?”
“그게 아니라 포은 제자라서요.”
“그러니까 사질.”
“사질은 안 중요한데 포은제자라는 게 중요하지요.”
“사문은 안 중요하고 포은만 중요하다?”
“이 땅에서 먹물 먹은 인간들 다 모아도 포은보다 못합니다.”
“오. 군사까지 포함해서?”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음. 그렇긴 하오. 당연한 건데.”
“예. 당연하지요. 당연히 아니니까.”
사실 이번에 많이 놀라긴 했다.
조익신이 쏘아 올린 작은 공으로 개판 됐지만, 정도전이 구축한 군략은 정말 대단했으니까.
그래서 이번만은 좋게 인정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조익신은?”
“애매합니다.”
“하긴 일등공신이니까.”
“예. 자고로 공은 과를 덮는 법이니까요.”
왕선은 짓궂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참에 범세동의 시종이나 들게 하지요.”
“오. 과연 주공이십니다. 참으로 묘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찬이오.”
두 사람은 옅게 웃었다.
그리고
“당장 이걸 놓지 못하겠느냐?!”
생목으로 악을 쓰고 있다.
왕선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쳐다보면서 정도전에게 슬쩍 말을 건넸다.
“과연 포은 정몽주가 두려워할 만한 목청이외다.”
“심신이 많이 지쳤나 봅니다.”
“큰일이군. 이제 시작인데.”
“그러게 말입니다. 본격적으로 지옥을 맛보게 될 건데.”
언제부터 죽이 착착 맞는 두 사람이었다.
지용기와 김성우의 뒤통수를 거하게 치고 혼란이 이어질 때 이옥이 전광석화처럼 조의생을 낚아챘다. 지용기가 구하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실패했다.
결과 조의생은 이처럼 질질 끌려다니는 포로 신세가 된 거다.
그것도 아주 박한 대접을 받았다.
며칠 동안 부르지도 않고 가둬두기만 했을 정도로.
어쨌거나 질질 끌려온 조의생은 정도전을 험악하게 노려봤다.
“삼봉!”
“세상이 뒤숭숭해서 그런가? 패장들이 참 말이 많군. 이것도 유행인가? 참 같잖은 유행이야. 안 그런가?”
“아무리 전장이지만 최소한의 예의가 있는 법이거늘.”
“뒤에서 호박씨 까다가 걸려서 잡혀 온 인사가 할 말은 아니거늘.”
정도전은 입맛을 다시면서 말을 이었다.
“김성우도 그렇고. 자네도 그렇고. 적반하장도 유행인가?”
정도전식 조롱이 시작됐다.
지켜보는 이옥, 남은, 마천목은 안쓰러운 눈길로 쳐다볼 뿐이었다. 문득 저런 사람과 호각을 이루는 왕선이라는 사람이 존경스러워졌다.
시간이 갈수록 조의생의 얼굴색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혈압이 올라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정신 건강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과연 포은이 두려워할 만해. 진심일세. 정말 너무 속상하군.”
점입가경.
더 지켜보면 이대로 피 토하고 죽을 수도 있다.
왕선은 슬쩍 개입하기로 했다.
“군사. 그만하시오.”
“아. 죄송합니다. 하지만 주공의 몫은 남겼습니다.”
“거. 이미 눈빛이 썩어가고 있는데 뭘 남겨놨다는 말이오?”
“아직 숨이 붙어 있지 않습니까?”
“생명줄을 끊는 건 우리 영역이 아니지. 우리는 정신이 숨을 쉬는지가 중요하지 않소?”
“음. 소생이 너무 흥분했습니다. 송구합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조의생을 더 미치게 했다.
마치 자신을 술자리의 조롱거리로 여기고 있지 않은가?
평생 어디 가서 이런 대접을 받아봤겠는가?
“그나저나 저 사람을 어찌한다?”
왕선은 느긋하게 말했다.
이미 필요한 내용은 모두 확보한 상태다. 남은 건 조의생의 처우였다.
적절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이렇게 하지.”
모든 사람의 시선이 왕선의 입으로 향했다.
“풀어주지.”
왕선의 수하들은 황당한 표정.
반면, 조의생은 눈빛은 다시 총기가 올라왔다.
“단, 조건이 하나 있다.”
순식간에 조의생의 표정은 냉소적으로 변했다.
“나를 상대로 수작을 부릴 생각이라면 집어치우시오.”
“수작?”
“나는 아군의 어떤 정보도 팔지 않을 것이며...”
“천목아.”
“예. 형님.”
“비풍군에 가면 우리 밀교원이 억류되어 있을 거다.”
“출정 준비를 하겠습니다.”
“그래. 지용기의 본군은 여기서 잘 막아낼 테니, 밀교원들 구하면서 비풍군도 박살 내.”
조의생의 눈이 살짝 떨렸다.
물론 알고 있다. 지금 왕선의 말이 허수라는 걸.
대군과 마주하고 있는데 따로 병력을 빼내서 움직이는 건 미친 짓이니까.
...그러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왕선이 비풍군에 밀교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는 게 놀랍고 충격적인 거다. 그만큼 그건 극비사항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천목은 적당하게 움직일 채비를 했다.
물론 실제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던가?
그냥 적당하게 조의생을 압박할 정도의 행동만 취할 뿐이었다.
왕선은 다소 날카롭게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얻을 건 없는 거 같은데?”
“···하면, 정말 이대로 나를 풀어준다는 거요?”
“거. 속고만 살았나? 아. 속이고 살았구나.”
조의생은 정신이 없었다.
왕선은 슬쩍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런데 그냥 풀어 줄 수는 없고. 나와 내기를 하나 하지.”
“···내기라고 하셨소?”
“동서남북. 성문 중 한 곳만 지킬 테니 잘 피해서 나가는 거로. 당신 운에 맡기지.”
조의생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걸 내가 믿소?”
“왜? 네 곳 다 지키고 서 있을 거 같은가?”
“당연하오”
“사람이 참 간사해. 안 그런가? 어차피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을 건데. 이제 생로가 열리니까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바둥거리는 모습이 가련하기도 하고.”
“···이렇게 희롱할 생각이면 그냥 죽이시오.”
“그러지 말고 이렇게 하지.”
왕선은 선심 쓰듯 말했다.
“당신이 생각한 방향을 적는 거지. 그걸 내가 맞추면 못 나가는 걸로.”
“···틀리면 보내준다는 거요?”
“물론. 아. 하나 더. 기회는 무제한. 열 번이든, 백번이든, 천 번이든 도전해보라고.”
그래. 어차피 손해 볼 거 없다.
왕선의 말대로 이미 죽음을 각오한 몸이니까.
“좋소.”
지필묵이 곧장 준비됐다.
조의생은 붓을 들어서 글자를 써 내려갔다.
그런데
“동쪽.”
조의생은 멈칫했다.
우연의 일치일 것이다. 다시 붓을 들었다.
“북쪽.”
다시 붓을 들었다.
“다시 동쪽?”
...다시 붓을 들었다.
“오. 이번에는 서쪽이군.”
조의생의 눈썹이 떨렸으나 포기하지 않고 붓을 들었다.
그런데
“다시 서쪽? 참 고집 있군.”
조의생의 붓끝이 떨렸다.
왕선은 턱을 괸 채로 말했다.
“이거 어쩌나?”
“······.”
“정말로 내가 미륵의 권능을 발휘하여 너희 계획을 모두 파악해버렸는데.”
“!!!”
“뭐. 됐고. 어서 글자나 써봐. 그래야 네 주인에게 달려가지. 꼬리 흔들면서.”
조의생은 이를 악물면서 다시 붓을 들었다.
그러자
“오. 드디어 남쪽으로 가나?”
“!!!”
“계속해보라고.”
조의생은 왼손으로 떨리는 오른손을 부여잡았다.
“아. 군사더러 정도를 지키는 인사가 아니라고 했던데.”
“허. 뒤통수나 후려갈기는 인사가 정말 말도 고약하게 하는군요.”
“내 말이 그 말이외다.”
“봤는가? 이것이 권능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지용기와 단둘이서 나눈 대화를 왕선이 모두 알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게 가능하다는 건가?
조의생의 낯빛은 새파랗게 질렸다.
그러나 붓을 멈추지는 않았다.
“거. 포기라는 걸 모르는 인사군.”
“저 인사가 원래 좀 그렇습니다.”
왕선과 정도전의 대화는 너무나도 가볍다.
그렇게 해가 떨어질 때까지 조의생의 붓은 움직였다.
“······.”
조의생의 얼굴은 식은땀으로 가득했다.
왕선이 느긋하게 손짓하자 정도전과 장수들이 모두 물러났다.
“조의생?”
“······.”
“직접 눈으로 권능을 확인한 소감이 어떤가.”
궈, 권능?
진정 미륵의 권능이라는 건가?
왕선이 빙긋 웃었다.
“미륵은 무슨.”
조의생의 눈에는 의아함이 가득하다.
“궁예 정도는 되어야지.”
“!!!”
“궁예의 권능이니라.”
“!!!”
왕선의 입꼬리가 크게 올라갔다.
“김성우가 아니라 내가 궁예의 후예.”
생사를 넘어선 야수의 눈빛으로 노려봤다.
그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건조하게 갈려졌다.
“그러니 다시는 내 앞을 막지 말라.”
“!!!”
“아. 아니지. 내 앞의 장애물을 활짝 열어야 할 것이야.”
“그, 그게 무슨···.”
“닥치고 붓이나 들어.”
“!!!”
“그리고 다시 써.”
“!!!”
“내가 만족할 때까지.”
총기가 가득했던 조의생의 눈은 온데간데없었다.
붓을 들지도 못할 정도로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왕선의 눈이 가늘어졌다.
“적어.”
“······.”
“내가 불러 주는 대로.”
“······.”
“제발 살려주세요.”
“!!!”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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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용기는 헛웃음을 지으면서 서찰을 다시 확인했으나 몇 번을 봐도 조의생의 필체가 분명했다.
...그런데 내용이 절대 그의 손에서 나왔다는 걸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제발 살려주세요.]
기가 막혔다.
“군사가 살아 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대체 이게 무슨 경우란 말인가?”
너무 어처구니가 없다.
“당장 비풍군으로 가서 포로를 데려와라.”
왕선의 요구사항은 포로 교환이었다.
정보원 몇 명 때문에 군사 조의생을 죽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당연히 수락하는 게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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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리는 죽었다고?”
“소인들만 살았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왕선은 눈을 질끈 감았다.
“···목숨이 위태로우면 항복하라고 했거늘.”
백리가 글자를 쓸 시간을 벌고자 달려나간 사연은 이미 들었다.
그런데도 왕선은 허탈하게 읊조렸다.
“이 글자가 너희를 지키지 못했구나.”
“백리 대장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헛되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는가.”
한탄하듯 말했다.
천리와 만리는 고개를 숙였다.
왕선은 천천히 걸어서 그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너희가 살아와서 다행이다.”
마침내 만리와 천리의 눈물이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은 오열했다.
“두 번 다시는 누구도 죽지 않겠습니다.”
“그 말 꼭 지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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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괜찮소?”
“······.”
“군사.”
조의생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항상 여유롭던 그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얼마나 모진 고문을 당했으면 이렇게까지 엉망이 되었을까.
지용기는 한숨을 쉬면서 한참 동안 그를 바라만 봤다.
“머지않아 내가 군사의 한을 풀어주리다.”
“······.”
“그러니 편히 쉬고 있으시오. 왕선을 제압하는 건 나 혼자로도 충분하니까.”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선?”
조의생의 목소리.
지용기는 반색했다.
“군사. 이제 정신이 좀 돌아오는 것이오?”
“...안 됩니다.”
“안된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왕...선은 모두 듣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왕선은 모두 듣고 있습니다.”
조의생의 입에서 나온 뜻 모를 말.
지용기의 미간은 찌푸려졌다.
“···더 쉬시오.”
“주공. 왕선은 모두 듣고 있습니다.”
“허. 알아듣게 말씀하시오. 왕선이 뭘 듣고 있다는 거요?”
“모두. 모두 듣고 있습니다.”
“···이보시오. 군사.”
“그는 미륵입니다.”
“······.”
“아, 아닙니다. 궁예입니다.”
지용기의 표정은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쉬시오.”
“주, 주공. 소생의 말을 흘려들으시면 안 됩니다.”
더 대꾸하지 않았다.
밖으로 나온 지용기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왕선의 주둔지를 노려봤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단번에 쓸어버리겠다며 결기를 다졌다.
본격적으로 공주목을 두고 왕선과 지용기의 첨예한 대립이 발생했다.
승자는 전라도 북부와 충청도의 패권을 단번에 거머쥐게 될 것이다.
그건 고려 전역에서 펼쳐진 군웅할거에 일대 지각 변동을 가져오게 할 정도로 거대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대립을 일거에 멈추게 하는 일이 발생했다.
고려 땅의 모든 군웅에게 급보가 전해졌다.
[최영. 개경 진군.]
< 75화 흔들리는 군웅할거 (유료연재시작)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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