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개장수 등판 >
-부아아아아아앙!
-차아아아아아앙!
김성우의 칼은 맹렬한 기세를 보이면서 지용기를 압박했다.
그의 칼은 더 속도를 냈다.
사실 김성우의 속내는 시커멓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원래 지용기를 단칼에 죽이고 우와좌왕할 적군을 와해시킬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게 실패한 거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상대는 지용기다. 자칫 그의 칼의 범위에서 벗어나서 전군을 지휘하는 일이라도 발생하면?
...필패다.
전력도 열세인 상황이 아닌가?
김성우는 이를 악물고 칼을 휘둘렀다.
이미 자상이 가득한 지용기는 힘겹게 공세를 막았다.
“김성우! 당장 멈추게!”
다급한 지용기의 외침.
그러나 김성우의 칼은 거침없이 휘둘러졌다.
절체절명의 순간이 끝없이 이어졌다. 갈수록 지용기는 위태로웠다.
그랬다.
문관 출신인 지용기로서는 김성우의 칼을 정면으로 막아낼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의 본질을 곧장 파악했다.
“당장 멈추게! 이건 왕선에게만 이로울 뿐일세!”
김성우가 이렇게 나오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어떤 변수가 작용했을 것이고, 그 변수는 당연히 왕선이었을 거다.
하지만 김성우의 귀에는 지용기의 외침이 들리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들었을 수도 있다.
...지용기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되돌릴 수 있는 건 없다.
이대로 공세를 멈추고 오해를 풀더라도 김성우의 앞날은 어둡다.
다시 의기투합하여 왕선을 격멸하더라도 그 후는 어찌 되겠는가?
...오늘의 일은 두고두고 남을 것이다.
그러면 답은 하나다.
이대로 밀고 나가야 한다.
다시 결심을 단단하게 먹었다.
칼을 크게 들었고 지용기를 향해서 휘둘렀다.
그런데
-부아아아아아앙!
혼란한 전장.
복잡하게 오가는 병사들.
사방에서 튀어나오는 병장기.
-차아아아아아아앙!
김성우의 칼은 원래의 궤도를 벗어났고
“으아아아악!”
이름 모를 병사가 그의 칼에 죽었다.
그 순간 지용기는 다급하게 자세를 바로잡고 뒤로 물러났다.
실로 엄중한 상황이었는데 이제 벗어난 것이다.
천운이었다. 이는 천운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그의 눈에는 거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이를 악물면서 온 힘을 다해서 외쳤다.
“김성우! 내 너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김성우의 머릿속으로 스치는 말이 있었다.
[곽자의와 이광필에 비교할 수 있는 명장.]
그리고 지용기의 손짓과 함께 두 사람 사이를 순식간에 병사들이 돌입하더니, 김성우를 사방에서 포위했다. 실로 찰나의 순간 김성우는 고립된 섬이 된 것이다.
또 하나 더
[용맹은 관우, 장비에 비교할 수 있는 명장.]
지용기는 김성우를 우회하더니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의 칼솜씨는 경천동지할 수준이 절대 아니었다. 어쩌면 평범한 수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용기는 두려움이 없다. 실로 엄청난 기백을 보이면서 저돌적으로 돌격하는 그의 용맹스러운 모습은 일반 병사들이 감당할 수 있는 위력이 아니었다.
김성우는 적의 창칼에 고립됐고, 지용기는 거침없이 적진을 종횡무진 내달렸다. 지용기가 김성우의 칼에서 벗어난 직후, 전장의 흐름은 순식간에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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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왕선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절대 과장이 아니었다. 그 정도로 지용기가 자유로워진 이후 진행된 전장의 변화 흐름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저게 인간의 지휘력이 맞소?”
“보다시피 맞습니다.”
“지용기가 정말 책상물림이오?”
“솔직히 소생이 더 잘 싸울 겁니다.”
“기가 막히는군.”
“전형적인 지장이지요.”
“용감한 지장.”
“그렇지요.”
“탐나는군.”
정도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 저 모습을 보면서 그런 말씀이 나옵니까? 저 사람을 생포할 수 있다고요?”
“음.”
“무리입니다.”
“거. 말도 못 하오?”
“처음이 아니지 않습니까.”
“끙.”
“주공.”
정도전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느닷없이?
왕선은 입맛을 다시면서 어물쩍 말했다.
“알았소. 괜한 소리 안 하리다.”
“···그게 아닙니다.”
“응?”
“이 정도에 놀라시면 최영 장군과 이성계 장군은 어찌 감당하실 겁니까?”
“······.”
“그 두 장군은 지용기 이상의 용맹과 지략을 가졌습니다. 심지어 일신의 무위 또한 고려 최고 수준입니다.”
왕선은 정도전을 힐끗 쳐다봤다.
정도전답지 않게 쓸데없이 진지하지 않은가?
“백만 대군이 공격해도 다리를 틀어막을 마천목과 적장의 급소를 단번에 꿰뚫을 이옥. 이 두 사람의 용맹이 지용기보다 못하겠소? 위타천이라고 불리는 나세의 무력이 어찌 최영 장군과 이성계 장군의 그것보다 떨어진다고 하오?”
“······.”
“그리고 그들 이상의 군략을 펼치는 사람도 있고.”
검지로 가리켰다.
“바로 당신.”
왕선은 말을 이었다.
“내가 지용기보다 용맹, 지략이 떨어지더라도 그를 넘어서는 군사와 장수가 있소.”
관심법도 있고.
“최영 장군이나 이성계 장군과 겨뤄도 절대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하오. 자고로 주인의 역할은 적재적소에 수하를 배치하고, 그들을 내 사람으로 만드는 거지. 내 말이 틀렸소?”
정도전이 어리벙벙할 때,
“이게 전장에서의 재상 총재제? 뭐. 그런 거 아니겠소?”
“······.”
“그러니까 쓸데없이 진지한 표정 짓지 마시구려.”
“···주공.”
“감동하였소?”
“남은 왜 뺍니까?”
“······.”
“내정의 수완을 보이는 전 선생은요?”
“준비합시다.”
정도전은 싱긋 웃었다.
오랜만에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예. 이제 개판을 정리해야지요.”
“좋소. 개장수 등판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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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우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칼의 위력은 현저하게 떨어졌다.
범세동이 미친 듯이 악을 쓰며 큰 출혈을 감내하면서 고립을 풀어내지 않았다면 지금쯤 저세상으로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기울어진 전황은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김성우는 지용기를 단칼에 제압하지 못한 것이 참으로 한스러웠다. 그야말로 천추의 한이었다. 그것을 이뤄내지 못하여 이 지경이 된 것이니까.
“장군! 물러나야 합니다!”
다급하기 이를 데 없는 범세동의 외침.
그의 말이 옳다. 지금이라도 퇴각해야 한다. 보령으로 돌아가서 농성전을 해야 한다. 배수진을 치더라도 보령에서 치는 게 옳다.
이곳은 너무나도 참혹한 상황이었으니까.
김성우는 이를 악물었다.
범세동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소생. 큰 뜻을 품고 장군의 곁에 섰습니다. 이 나라 고려의 새로운 전기를 열어내고자 했습니다. 한데, 소생의 재주가 너무나도 부족했습니다. 장군을 제대로 보필할 능력도 자격도 없었습니다. 송구합니다. 소생이 제일 군사가 아니었다면 어찌 이런 날이 왔겠습니까?”
그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잔뜩 올라왔다.
“구, 군사.”
“그러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때가 올 겁니다. 저 악독한 왕선과 지용기가 언제까지 손을 잡지만은 않을 겁니다.”
범세동은 억지로 웃으면서 말했다.
“장군. 소생이 버티겠습니다. 어서 물러나셔서 후일을 도모하십시오.”
“군사!”
“서두르십시오!”
전황은 급박했다.
그나마 버티던 병사들이 지용기의 돌격으로 와해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장군! 어서 가십시오!”
“군사! 같이 가야 하오!”
“장군!”
범세동의 목소리에는 절절함이 가득했다.
김성우는 더는 어쩔 수 없음을 느꼈다.
“군사. 그대는 내 최고의 지기였소.”
“하하하. 마지막 가는 길 좋은 선물이 될 거 같습니다.”
“···살아서 오시오. 반드시.”
...그건 불가능할 것이다.
범세동은 옅게 웃으면서 말을 돌렸다.
“오늘을 절대 잊지 마십시오.”
범세동은 고개를 숙였다.
김성우는 핏발선 눈으로 그를 쳐다보더니 급히 몸을 돌렸다.
“반드시 살아서 오시오! 이건 명령이외다!”
범세동은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발악하듯 외쳤다.
“전군! 최후의 순간까지 항전하라!”
김성우는 처참한 심정으로 내달렸다.
그 모습을 본 지용기의 병사는 무서울 정도로 우직하게 돌격했다. 범세동이 최선을 다해서 방어했으나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맹렬한 추격이 발생했다.
일방적인 사냥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장군. 괜찮으십니까?”
조의생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다가왔다.
지용기는 허탈한 어조로 답했다.
“김성우가 이렇게 모자란 인사였다니.”
“소생의 탓입니다. 설마 그가 우리와 왕선이 한편이라고 판단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대체 어디서 어긋난 것 같나?”
“···파악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음. 그런데 왕선이 이를 의도한 거 같나?”
“그것 역시 확실하지 않습니다.”
“나도 처음에는 왕선의 계략이라고 생각했는데 도통 알 수 없는 내용투성이야. 우리의 작전에는 틈이 없었으니까.”
“소생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아. 일단은 김성우를 정리해야겠지?”
“예. 왕선의 움직임은 소생이 곧장 파악하여 수를 내겠습니다.”
“아닐세. 김성우를 오늘 죽이고 바로 남하할 것이네.”
“예?”
“역적 궁예를 살려서 사리사욕을 챙긴 왕선을 벌하는 전쟁. 이 정도면 충분해.”
지용기의 목소리에는 패배의 가정 따위는 없었다.
조의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최소한의 피해로 적을 제압하려고 준비한 판이었다.
그 역시 정공법으로 싸운다고 하여 패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바로 그 순간 거대한 함성이 일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지용기와 조의생의 시선이 황급히 돌아갔다.
“!!!”
저 멀찍이서 수천의 군사가 돌격을 감행하고 있었다.
[대동미륵]
[전주 목사 왕선]
엄청난 수의 깃발이 나부꼈다.
“!!!”
두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또, 충격으로 얼룩졌다.
“이, 이럴 수가!”
“자, 장군. 왕선이 매복하고 있었습니다!”
“대, 대체 어떻게?! 수천의 병사가 어디서 나타났다는 말인가!”
“장군! 우선 대응해야 합니다!”
그런데 상황이 엉망이었다.
사냥하듯 김성우를 쫓던 병사들이 아닌가?
갑자기 나타난 왕선의 병력을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후미를 완벽하게 잡힌 것이다.
지용기는 이를 악물었다.
“내가 막겠네. 자네는 김성우 추격을 중단시키게!”
“알겠습니다!”
한편,
“장군! 병사들의 피해가 너무 큽니다!”
퇴각을 감행하던 김성우의 발목을 잡는 부관의 외침.
“군사는?”
“보이지 않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보령에서 함께 온 1천 명 중에서 뒤를 따르는 병력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장군. 이대로 물러나면...”
...회생불능의 상태가 될 것이다. 그러면 보령으로 물러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부관은 말을 차마 더 이어갈 수 없었다.
김성우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적의 기세를 최대한 꺾는다.”
“알겠습니다.”
그래. 어쩌면 이게 옳을 수도 있다.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할 생각을 버리고 배수진을 치고 싸우면 기회가 올 수도 있다.
잠시라도 지용기의 근처로 접근만 할 수 있다면 동귀어진을 각오하여 싸우면 된다.
...그는 선봉에서 칼을 휘두르는 겁 없는 책상물림이니까.
김성우는 칼을 크게 들었다.
“돌격하라!”
마침내 김성우가 최후의 반격에 나섰다.
이리되자 조의생의 안색에는 낭패감이 크게 올라왔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스치는 단어가 하나 있었다.
[포위]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 이미 왕선과 충돌이 시작됐다.
말 그대로 최악의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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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세동은 온몸에 상처투성이였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그를 챙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사방은 혼전이었고, 지휘를 따르는 병사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묘했다.
죽어도 벌써 죽어야 했는데, 아직 숨통이 붙어 있지 않은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누구도 그를 신경조차 쓰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가?
그래서 바닥을 기어댔다.
살 수 있다면 살 것이다.
살아서 골수에 치민 이 한을 갚아내고 말 것이다.
그러나 갈수록 정신이 희미해졌다.
눈은 감겨만 갔다.
그 순간에 묘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일방적이었던 전장에 균열이 발생한 듯한?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장군께서 배수진을 치셨구나.
분명했다. 그리고 큰 성과를 본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적군이 이렇게 허둥지둥하고 전장의 기울어짐이 무뎌지고 있다.
범세동은 옅게 웃었다.
...역시 김성우 장군이시다.
웃음은 진해졌다.
...그냥 물러가시면 될 것을. 이 못난 몸을 구하시고자...
가슴이 묘하게 울렁였다.
그리고 병사들의 움직임이 조금 더 멀어졌다.
전장의 중심이 바뀌고 있다.
범세동은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미소는 더 진해졌다.
그 순간 그의 눈에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지나치는 적군?
그런데 다가온다.
...이렇게 숨통을 끊으려는 건가?
...장군께서 승기를 잡으셨는데?
...살아야 한다.
그러나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최선을 다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움직였다.
그러나 다가오는 적은 기어대는 자신에 비교해서 너무나도 빠르다.
그때였다.
실로 불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삼봉 군사. 이 새끼 우는데요?”
죽어도 듣기 싫은 이름.
그리고
“포은이 통탄하겠군.”
꿈에도 듣기 싫은 목소리.
범세동은 그대로 기절했다.
< 73화 개장수 등판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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