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개판 >
부보상의 행렬은 평소처럼 꾸준했다.
그들의 발걸음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어깨에서 느껴지는 짐보따리의 묵직한 무게는 또 다른 내일을 기대하게 했다.
그래서 그럴까? 그들의 표정은 무척이나 밝았다.
또 그래서 그랬을까? 묘한 현상이 하나 보였다.
“서둘러 가자고.”
“어? 어. 그래. 어서 가자고. 어?”
오랫동안 이 지역에서 장사한 부보상 김씨는 자신을 재촉하는 사람을 멀뚱히 쳐다봤다.
“왜 그러나?”
“아. 혹시 우리가 어디서 봤지?”
“어허. 이 사람. 참으로 섭섭하군.”
“응?”
“됐네. 마음 상했어.”
“이 사람아. 내가 요즘 자주 깜박 깜빡한다고.”
“깜빡하다 보면 떠오르겠구먼.”
“이 사람. 야박하군.”
“됐네.”
“아. 이 사람아. 일단 가면서 얘기해보자고.”
김씨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면서 황급히 뒤를 쫓았다.
그런데 그건 김씨 혼자만의 일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어깨를 부여잡고 친근하게 접근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랬다. 언제부터 부보상의 수가 완만하게 늘었다. 그리고 그건 참으로 자연스러운 현상으로만 보였다.
“부보상이 몰려오고 있다고?”
“예. 왕선의 보이지 않는 탄압과 비교되는 아군의 호의적인 태도. 그리고 일대의 전운을 감지한 상인들의 상업이 활성화된 결과라고 보입니다.”
“음. 혹시 괜찮은 내용이라도 있던가?”
부관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임주의 병력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고 합니다.”
“자세히 말해보게.”
“부보상들의 말에 의하면 나세가 지휘관이라고 합니다.”
“정말인가?”
“예.”
얼마 전에 밀교원을 통해서 파악한 정보가 사실이었다.
조의생의 입가에는 진한 미소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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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세동은 헛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아군에게 선봉을 맡긴다고 합니다.”
“임주 진군의 선봉을?”
“그렇습니다.”
김성우는 코웃음을 쳤다.
“왕선을 몰아낸 다음 임주 지배권을 다시 아군에게 귀속시키겠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그 정도의 정치, 군사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전라도로 넘어가고.”
“냉정하게 판단하면 현 상황에서 아군은 원래 영역을 되찾고 왕선의 군사적 위협에서 벗어나는 거지요. 수세에 몰린 아군을 도운 지용기로서는 충분히 내걸만한 조건이지요.”
“만일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충분히 수용했을 거요.”
“지금은 아주 비정상적인 상황이지요.”
“그러니 더 냉정하게 상황을 바라봐야 하오.”
“맞습니다. 지금은 지용기가 우리 손을 잡고 왕선을 치는 게 아니라 왕선과 손을 잡고 아군을 꾀어내려는 계책을 부리는 거니까요.”
“남은 건 한가지요.”
“예. 두 세력이 아군의 주력을 포위 압살하려고 할지, 주력을 꾀어내고 거점인 보령을 타격할지. 이걸 알아야 합니다.”
“옳소. 바로 그걸 알아야 하오.”
범세동은 진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돌아가는 정황을 미루어 짐작하건대 왕선이 먼저 움직일 겁니다.”
“나세, 이옥, 마천목. 누가 움직일지에 따라서 달라질 거요.”
“바로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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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지금까지는 뜻한 대로 상황이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전장터다. 더군다나 상대는 지용기.
모든 안배가 완벽하게 이뤄지더라도 쉽사리 승산을 장담할 수 없는 안갯속 정국이 아닌가.
이러할 때 작은 흐트러짐이라도 발생하면 걷잡을 수 없는 피해와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지용기와 김성우의 결합 시기.”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진군 행로.”
역시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매복 장소.”
가장 중요한 지점.
“단 한 번으로 적의 주력을 궤멸시켜야 해.”
그 어느 때보다 심력을 집중했다.
자신의 판단과 손끝에 세력의 명운이 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일 실패한다면 임주를 상실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전주까지 단번에 밀리게 된다.
“···정말 의자왕처럼 한이 맺힐지도 모르지.”
정도전은 쓰게 웃었다.
그때
“군사님.”
부관의 외침.
정도전의 고개를 틀었다.
“남은 선생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어서 말하게.”
“준비는 끝났다고 합니다.”
“고생했네. 나세 장군은 어디 있나?”
“연무장입니다.”
“앞장서게.”
“알겠습니다.”
시작은 나세다.
보란 듯이 휘황찬란하게 움직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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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의생은 상기된 안색으로 말했다.
“주공. 드디어 나세가 출병했습니다.”
지용기는 손을 꽉 쥐었다.
“지금 당장 비풍군에 전방 배치한 병력을 공주목으로 진군시킬 것이외다.”
“예. 김성우 측에도 바로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좋소. 미륵을 참칭하여 민심을 호도하는 무뢰배를 단번에 쓸어버리겠소.”
“대감의 뜻대로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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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 나세! 나세였습니다!”
“나세?! 확실하오?”
“예. 기병을 이끌고 출병했다고 합니다.”
“진군로는?”
“곧장 보령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 속도가 대단합니다!”
김성우의 눈이 서늘해졌다.
“지용기는 이제야 공주목으로 움직이는데 나세가 기병을 이끌고 전속력으로 달려온다?”
“예. 나세가 허수였습니다.”
범세동은 눈을 번뜩였다.
“지용기가 보낸 서찰과 정확하게 내용이 일치합니다. 일찍이 나세의 공세를 일렀던 지용기가 아닙니까.”
“맞소.”
“이는 아군이 지용기를 신뢰하게 하여 주력을 공주목으로 끌어내려는 계책입니다.”
“바로 그렇소. 음. 공주목이 결전의 장소가 되겠군.”
“그렇습니다.”
“준비하시오. 김성우. 이 석 자가 가지는 무게를 이번에야말로 적들에게 보일 것이오.”
“예.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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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우의 병력도 이동을 시작했습니다.”
“진군로는?”
“공주목입니다.”
왕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놓고 나세가 보령으로 향하는데 공주목으로 병력을 이동시킨다? 이거 너무 동맹을 너무 티 내는 걸?”
정도전이 진하게 웃었다.
“그래도 제법 용을 쓴 모습이 보입니다. 적당한 군세를 동원하여 나세 장군의 진군로를 막아뒀으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너무 발연기라서.”
“예? 발연기요?”
“아. 도솔촌의 용어요.”
“발로 연기를 냅니까? 그 동네는 참으로 희한하군요.”
“당신이 더 희한하오.”
“아. 네.”
“······.”
왕선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는데 정도전은 제 할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세력이 존폐 기로에 선 김성우입니다. 지용기의 판단에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하긴. 지용기는 우리가 완벽하게 속았다고 생각할 거니까.”
“그렇지요. 완벽한 속임수였습니다.”
“이게 다 미륵의 글자 때문이오.”
“서둘러 준비하시지요.”
“···요즘 사춘기요?”
“예?”
“거. 사람이 말을 하면 적당하게라도 대꾸해줘야지.”
정도전이 눈을 껌뻑이면서 말했다.
“안 바쁘십니까? 항복한 밀교원의 생사를 모르는 이런 긴박한 상황에 말장난이시라니요.”
“······.”
“그리고 사춘기? 그것도 도솔천의 용어입니까?”
“······.”
“음. 그러면 오춘기도 있습니까?”
“그건 없소.”
“희한하군요.”
“갱년기는 있소.”
“그건 더 희한하군요.”
“아주 무서운 병이라오.”
“주공께서?”
“미쳤소? 나는 한참 멀었소. 군사가 뒤늦게 사춘기가 온 거고.”
“소생이 사춘기라고요?”
“지금까지 뭐 들었소?”
“음. 그건 참으로 놀라운 경지가 분명하니까 재차 여쭤본 거였습니다.”
말을 말자.
언제부터 좀 밀린다. 아니, 많이 말린다.
...이게 다 대업을 대놓고 말한 다음부터다.
그러니까 속내를 숨길 필요 없는 정도전은 뇌를 거치지 않고 그냥 막 던진다.
...미칠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갑시다.”
“예. 소생이 앞장서지요.”
“됐소. 뒤따르시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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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용기는 여유롭게 공주목으로 진군했다.
“나세는 어떤가?”
“김성우가 적절하게 움직였습니다.”
“왕선이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병력을 배치했나 보군.”
“예. 맞습니다. 나세의 기병은 왕선의 최정예군이 아닙니까? 김성우도 제법 뛰어난 군사적 안목이 있으니 적당하게 행동한 거 같습니다.”
“바로 그거일세. 나세가 보령을 공격하고, 아군이 공주목에서 보령을 공격하면 김성우는 몰락할 수밖에 없지. 그러니 더는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겠지. 하여, 왕선은 나와 김성우가 합심하여 남하할 줄은 생각조차 못 할 거네.”
그때, 멀찍이서 군마의 이동 소리가 들렸고, 자욱한 먼지가 올라왔다.
“김성우의 병력이 보이는군.”
“족히 1천은 되는 거 같습니다.”
엄청난 규모라고는 할 수 없지만, 큰 패배의 수렁에 빠졌던 김성우의 지난날을 생각하면 상당한 규모는 분명했다.
지용기는 흡족하게 웃었다.
“역시 김성우. 아직 안 죽었군.”
“임주를 넘긴다고 했습니다. 1천 명은 내와야 한다고 판단했겠지요. 범세동도 제법 머리를 굴린 거 같습니다.”
“하하하. 자네 말이 맞네.”
반면, 직접 선봉에 선 김성우는 지용기의 병력을 확인하고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3천 명은 되겠군.”
“···아무래도 단단히 준비한 거 같습니다.”
김성우는 숨을 내쉬었다.
“이곳에서 만나서 임주로 함께 진군하는 계획.”
“예. 아군이 선봉에 서고 지용기는 후미를 담당하지요.”
“그때 임주 방면에서 왕선의 주력군이 치고 올라오게 될 거고.”
“맞습니다. 그리되면 아군은 포위되어 전멸을 면치 못할 겁니다.”
“보아하니 왕선도 2천 명은 동원했겠군.”
“모두 5천 명. 수적 열세가 분명합니다.”
“제대로 겨뤘다면 이기기가 어려우나.”
“잠시 후 상황은 완벽하게 바뀔 겁니다.”
김성우는 마른침을 목울대로 넘겼다.
“내가 시작하겠소.”
“소생이 병력을 통제하겠습니다.”
그러는 동안 양군은 천천히 이동했고, 아주 가까운 거리를 두고 마주 봤다.
“하하하. 김 장군. 참으로 오랜만이외다.”
지용기가 호탕하게 웃으면서 양팔을 벌리며 다가갔다.
김성우도 진하게 웃으면서 화답했다.
“대감께서도 무탈하셨습니까?”
“보다시피.”
“아군에게 선봉의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닐세. 응당 그래야지. 누구보다 왕선을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자네 아니겠나?”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래서 상황이 더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었지요.”
“그래. 우리 할 이야기가 참으로 많지. 그건 차차 하도록 하고.”
어느새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그때 지용기가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잠시. 상황이 정리되었다고?”
“예. 대감. 그렇습니다.”
“응?”
“궁금하신 거 같은데 아쉽군요.”
“무슨 말인가?”
“차차 하도록 하지요. 조금 전에 이르신 대로요.”
“김 장군?”
“저승에서 말입니다.”
“뭐?”
지용기의 얼굴에 불쾌감이 치밀어 오를 때
-부아아아아앙!
김성우의 칼이 휘둘러졌다.
지용기가 대경하여 황급히 피했으나
-사아아아아앗!
온전하게 피하지는 못했다.
그의 왼팔에 큰 상처가 생겼다.
김성우는 매섭게 지용기를 노려봤다.
“김성우! 미쳤나?!”
“닥쳐라!”
김성우가 다시 칼을 휘둘렀다.
“김성우!”
그리고
범세동의 통제를 따르는 김성우의 병사가 저돌적으로 돌격했다.
지용기와 조의생의 눈은 충격으로 얼룩졌다.
한편,
“······.”
“······.”
왕선과 정도전 그리고 이옥, 마천목, 남은은 황당한 표정으로 어처구니없는 전방을 쳐다봤다.
“군...사?”
“예, 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오?”
“그, 그러게 말입니다.”
“고려 최고라면서?”
“그, 그러게 말입니다.”
그들은 눈만 껌뻑이면서 상황을 쳐다봤다.
빈틈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판을 준비했다.
작은 허점도 보이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 정말 피나는 노력을 했다.
...그런데 그 모든 고생이 무의미해지는 놀라운 상황이 눈 앞에 펼쳐진 것이다.
“...주공.”
“말 하시오.”
“확실한 게 하나 있습니다.”
“뭐요?”
“개판이라는 겁니다.”
“···개판이라. 그러면 개를 잡아서 팔아야겠구려.”
“맞습니다.”
정도전이 비릿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이거 잘하면 한 번에 다 해결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의 뒤로 2천여 명의 부보상이 결기를 보이면서 정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짐꾸러미를 풀더니 병장기와 갑옷을 꺼냈다.
< 72화 개판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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