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정보전 >
“지금쯤이면 혼란스럽겠군.”
“예. 그럴 겁니다.”
조의생은 옅게 웃었다.
“몇 차례에 걸쳐서 교란했습니다. 혼란의 연속일 겁니다.”
“음. 왕선이 충주로 오지는 않겠지?”
“그럴 겁니다. 자존심이 보통이 아닌 사람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상관없지요.”
“큭. 하긴. 애초 그건 바라지도 않았으니까.”
“예. 적의 혼란을 유도하기 위한 가벼운 계책에 불과했으니까요.”
지용기는 서글서글하게 웃으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볼수록 보통 배짱이 아닐세. 왕선 말이네.”
“그렇습니까?”
“생각해보게. 김성우에게 궁예를 덮어씌웠어.”
“음. 그건 그렇습니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고 황망한 일이라서 믿을 뻔했어.”
“정확하게 의외성을 가격한 수작이었지요.”
“만일 명단에 수결한 지주들이 아직 살아 있었다면? 그랬으면 믿었을 수도 있지.”
“맞습니다. 하지만 모두 죽였습니다. 역도의 수괴를 잡지도 못했는데 동조한 자들을 먼저 죽인다? 이건 뭔가 시커먼 속내가 있는 거지요. 살려두면 안 되니까 죽였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거지. 또, 궁예라고 그렇게 덮어씌우고 버젓이 살려둔 걸 보라고.”
“그건 딱 하나지요. 궁예를 충청도에 남겨둬야 아군이 자신들의 임주 점령을 지켜볼 거라는 아주 전략적인 판단이지요.”
“적절하네. 어쨌거나 대단하긴 했어. 궁예. 딱 그 단어 하나로 명장으로 이름난 김성우를 가지고 놀았으니까.”
“예. 김성우는 강직한 인사. 순식간에 궁예가 되었을 때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정도전의 계책일까?”
조의생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삼봉이라면 능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는 정도를 지키는 인사가 아닌지라.”
“자네나 포은 선생과는 결이 다른 인사라고 들었네.”
“···그렇습니다.”
“그래. 왕선과 정도전이라. 참으로 잘 만난 조합이야.”
조의성은 어물쩍 말을 돌렸다.
“···어쨌거나 왕선은 미륵을 참칭하는 인물입니다. 위험한 싹은 조기에 제압하는 게 옳습니다.”
“당연한 말이네. 그래. 김성우에게는 사람을 보냈나?”
“물론입니다.”
“일전의 일로 마음이 상하지 않았으면 좋을 건데.”
“범세동이 그렇게 아둔한 인사는 아닙니다. 왕선의 눈을 속이고자 내친 걸 충분히 파악할 겁니다. 무엇보다 왕선이라면 이를 갈고 있을 것이니 무조건 우리 손을 잡을 겁니다.”
지용기는 흡족하게 웃었다.
“아. 포로들은 어찌 됐나?”
조의생은 빙그레 웃었다.
“모진 고문 끝에 협조하기로 했습니다.”
“적절하군.”
“예. 여론전으로 김성우를 무너뜨린 왕선을 정보전으로 무너뜨리는 겁니다.”
“이거 김성우에게 크게 한몫 챙겨 받아야겠군.”
“소생이 잘 챙겨오겠습니다.”
“하하하. 자네만 믿겠네.”
“예. 주공.”
“아. 왕선이 우리 계획을 파악할 가능성은 있나?”
“하하. 미륵의 권능을 발휘하면 가능할지도 모르지요.”
“이런. 과연 그렇군. 하하.”
“하하하. 그렇습니다. 이거 대비를 해야겠군요.”
두 사람은 호탕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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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공. 지용기가 사람을 보냈습니다.”
“지용기가?”
“그렇습니다.”
김성우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유는?”
“···동맹을 청했습니다.”
“허. 뭐라고요? 동맹?”
“그렇습니다.”
“어처구니가 없군.”
“심지어 임주를 공격하자고 합니다.”
“허.”
김성우의 미간이 와락 일그러졌다.
“혈서를 명분으로 우리가 내민 손을 뿌리친 사람이 지용기요. 한데, 이제와서 동맹을 체결하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지용기입니다. 설마 눈에 훤히 보이는 수작질을 부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군사의 생각은 다르다는 거요?”
“어쩌면 진심일 수도 있습니다.”
“진심?”
“예. 애초 왕선을 속이는 과정을 거치고 이제 아군과 손을 잡는 거지요.”
“음.”
“만일 그게 아니라면 동맹을 빙자하여 아군을 격멸하려는 노림수가 분명합니다.”
“하면, 군사의 생각은?”
“진위를 파악하여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게 옳습니다.”
“하면, 일단 동맹은 수락해야겠구려.”
“맞습니다.”
“한데, 진위를 어찌 파악하오?”
“잊으셨습니까? 우리 곁에는 왕선의 최측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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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익신의 눈이 커졌다.
“지용기와 동맹을 체결한다고 하셨습니까?”
범세동은 답하지 않고 어물쩍 말을 넘겼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만일 가능하다면 그보다 좋은 수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가?”
“예. 한데, 방도가 있습니까?”
“알아봐야지. 이를 왕선이 알기 전에 빠르게 체결하는 게 좋을 건데.”
“왕선의 밀교는 능력이 뛰어납니다. 곧장 알게 될 겁니다.”
“왕선이?”
“예.”
“비밀 동맹을 바로 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음. 알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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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심계가 보통이 아닙니다.”
“왜 그러오?”
“왕선이 동맹을 알게 될 가능성을 분명하게 했습니다.”
김성우는 헛웃음을 지었다.
“자신을 은폐하려는 수작질이군.”
“소생의 생각도 그렇습니다.”
“답은 나왔구려.”
“예. 최악의 결론입니다. 지용기와 왕선이 보령으로 진군할 계획을 꾸미고 있습니다.”
김성우는 이를 꽉 깨물었다.
“쉽게 당하지 않을 거요. 반드시 물리칠 것이오.”
“예. 계획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각개격파할 순간이 올 겁니다.”
“그 틈을 완벽하게 찾아내야 하오.”
“소생. 견마지로를 다할 것입니다.”
김성우는 굳은 결기를 보이면서 말했다.
“좋소. 당장 사람을 보내서 동맹 체결에 응한다고 하시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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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거마는 꼼꼼하게 장부를 확인했다.
“비풍군(대전)을 오가는 부보상들의 동향은 어떤가?”
“평소와 다름이 없습니다.”
“음.”
“왜 그러십니까?”
“아. 아닐세.”
그러면서 은근하게 말을 흘렸다.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관청의 물품은 상단에게 맡기게 되었네. 알고 있나?”
“물론입니다. 해서, 일대의 남상이 들썩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광산 민영화와 대동법은 상단에 새로운 활로를 열어줄 것이네.”
“맞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일세.”
“예?”
“부보상이 최대한 많은 물품을 옮기면 좋을 거 같은데.”
대체 상단의 활로와 부보상과 거래를 크게 틀어내는 게 무슨 상관일까?
집사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쳐다보면서 백거마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
“좋을 거 같은데?”
“아. 아. 물론입니다.”
“비풍군과 임주를 오가는 부보상을 최대한 지원하게.”
“상한선을 정해주십시오.”
“그들의 짐보따리가 가득 찰 수 있을 만큼 물건을 공급하게. 손해는 얼마를 보더라도 상관없으니까.”
“알겠습니다.”
집사가 물러간 뒤 백거마는 숨을 들이쉬었다. 수차례 고민했다. 그럴 때마다 결론은 한가지였다.
...전주 목사야말로 상단의 활로를 개척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 그에게 모든 걸 걸어본다.
해서, 지금도 그렇게 가기로 했다. 그러나 말은 어떤 식으로도 옮겨진다. 평생 함께 상단을 일궈온 집사라고 하더라도 정확한 내용을 알려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고 남몰래 은밀하게 이동했다.
그곳에는 체격이 좋은 서생이 있었다.
“남은 선생.”
남은은 빙그레 웃으면서 등을 돌렸다.
“이르신 대로 했습니다.”
“훌륭하네. 아. 대가가 필요하겠지?”
백거마가 손사래를 치면서 말했다.
“전주 목사께서 대승을 거둬주십시오. 그게 우리 상단으로서는 최고의 대가입니다.”
“자네 참으로 장사를 잘하는군?”
“과찬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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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공.”
왕선은 반사적으로 몸을 내밀었다.
“어찌 됐소?”
“살아 있습니다.”
“!!!”
왕선은 마른침을 목울대로 넘기면서 침착하게 물었다.
“정말이오?”
“백리, 천리, 만리가 모두 살아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명이라도 살아 있습니다.”
정도전은 그 말과 함께 서찰을 내밀었다.
왕선은 황급히 서찰을 펼쳤다.
[지용기의 군세가 보령으로 진군할 겁니다.]
한자로 적힌 글자가 가장 가운데.
그리고 주변을 장식하듯 적힌 글자.
[지용기가 김성우에게 동맹을 제안했습니다.]
한글.
만일 모두 죽었다면 현재의 정세와 관련한 내용이 한글로 전달되는 건 불가능하다.
정도전의 분석대로다. 최소 1명은 살아 있다.
...그리고 그 한 명의 생사도 쉽게 장담할 수 없다. 정확하게는 그의 내일을.
사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항복한다고 하더라도 곧장 항복할 수는 없다. 그건 의심만 사게 된다.
...어쩔 수 없이 통과의례로 모진 고문을 거쳐야 한다. 그 뒤 망가진 몰골로 항복해야만 상대의 의심을 조금이라도 걷어낼 수 있다.
...그리고 적이 한글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특정한 표식이라고 의심할 수도 있다. 이 간극을 잘 조절해야 했다.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이 모든 과정이 머릿속으로 스친 왕선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주공. 일은 본궤도로 올라갔습니다.”
“자신 있소?”
“남은의 일은 시작됐습니다.”
정도전은 자신감을 표출했다.
“조만간 부보상들에게 살짝 눈치를 줄 생각입니다.”
“눈치라.”
“예.”
“다른 부분보다 그건 아무런 걱정이 없소.”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눈치 주는 게 제 전문입니다.”
“잘 아오. 믿어 의심치 않소이다.”
두 사람은 잔잔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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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
“예. 정확하게는 부보상입니다.”
“최근 상행위가 큰 폭으로 증가했다고?”
“예. 비평군과 임주를 오가는 부보상입니다.”
“비평군? 임주?”
“예. 아무래도 일대에 전운이 감도는 걸 상인들이 감지한 거 같습니다.”
부관의 보고를 들은 조의생은 헛웃음을 지었다.
“정말 귀신처럼 눈치가 빠른 사람들이군.”
“소직이 파악해보니 최근 보령으로도 발을 뻗치고 있는 거 같습니다.”
“전투가 발생하면 물자를 판매할 생각이군.”
“아무래도 그런 거 같습니다. 일전에 왕선과 김성우가 전투를 치렀을 때 남상의 백거마가 큰 이윤을 남겼지 않습니까?”
“그래. 그랬지. 막대한 군량을 팔았으니까. 음. 백거마의 성향은 어떤가?”
“장사꾼입니다.”
“이윤을 최우선으로 한다?”
“예. 다만, 일전에 나세가 군량을 탈취한 직후 김성우 측에서 다시 군량을 요청하긴 했는데 이건 거절했다고 합니다.”
“역적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으니 부담스러웠겠지.”
“예. 아무래도 그랬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군량을 팔지 않은 거지, 애초 합의된 군량은 넘겼습니다. 이 시점은 이미 김성우가 역적으로 몰렸을 시기이긴 합니다.”
“음.”
“왜 그러십니까?”
조의생은 이마를 만지며 고민에 빠졌다.
백거마를 포섭할 수 있다면?
...아니다. 이건 너무 무리수다.
“아닐세.”
“예. 그리고 부보상들 말입니다.”
“그들이 왜?”
“왕선 측에서 눈치를 좀 주는 거 같습니다.”
“왜?”
“왕선은 남상의 규모 있는 상단을 지원하는 방침입니다. 부보상의 영역이 넓어지는 걸 기존 상단이 탐탁지 않아 하겠지요.”
이건 적절하다.
부보상은 발이 넓다.
그들만 잘 활용하면 방대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다.
“좋군. 그러면 부보상을 적당하게 배려하게.”
“알겠습니다.”
“자네가 그들과 접선을 좀 해보고.”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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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조의생이 나름대로 머리를 쓰는군요.”
“부보상은 발이 넓으니까 활용할 수만 있으면 그보다 폭넓게 정보를 파악하는 방법도 드물지. 물론, 미륵의 언어를 쓰는 우리 밀교원을 제외하면 말이오.”
“두말하면 잔소리지요.”
“역시.”
“예?”
“역시 밀교의 교주다운 자신감이라고.”
“아. 부보상이 임주로 모두 넘어 왔습니다.”
요즘 보면 그냥 말을 무시한다.
왕선은 입맛을 다시면서 말했다.
“특이사항은?”
“조의생은 생각이 많은 인사입니다. 제 꾀에 넘어간 거지요. 자충수입니다. 외통수고요.”
“아. 그렇소?”
“예.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물건을 잘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서?”
“모두 사들였습니다.”
“내용은?”
“역시 항복한 우리 밀교원이 모르는 내용이 많았습니다.”
백거마의 상단이 이동할 때 새로운 밀교원이 적당하게 뒤를 따랐다.
그리고 적지에서 파악한 정보를 한글로 적어서 물건에 적거나 슬쩍 집어넣었다. 조의생이 한글이라는 표식을 알고 있으므로 철저하게 비밀을 엄수한 작전이었다.
그리고 부보상들은 이 물건들을 원래대로 거래했다.
자고로 비밀이 중요한 작전에 쓸데없는 입을 늘릴 필요는 없다.
부보상은 활짝 열린 상업에 기분 좋게 장사를 할 뿐이다.
“구체적으로 말해보시오.”
“조만간 공주목으로 진군할 예정인 거 같습니다.”
“어처구니가 없군. 우리에게 보령군으로 진군하라더니.”
“아마도 아군의 주력이 보령으로 넘어갔을 때 뒤통수를 치려고 한 거 같습니다.”
왕선은 정도전을 슬쩍 쳐다봤다.
“군사의 계획을 듣고 싶소만?”
“지용기의 군세가 움직일 때 나세 장군이 병력을 이끌고 보령으로 향하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모든 상황을 종합해보면 지용기와 김성우는 공주목에 집결하여 남하할 겁니다. 그걸 깨야지요.”
“주력은 마천목과 이옥?”
“그렇습니다.”
“천목이 벌써 그렇게 되었구려.”
“···마 대장에게는 미안하지만 나세 장군 정도가 아니면 제대로 속이기 어려울 거 같아서 그런 겁니다.”
여러 가지 정황을 되짚어 보면 지용기 측은 완벽하게 왕선을 신뢰하는 게 아니었다. 그러면 더 확실하게 판을 준비하는 게 옳다.
“거. 천목이에게는 그렇게 말하지 말고.”
“물론이지요.”
< 71화 정보전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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