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한글, 그 위대한 이름이 가진 힘 >
“이건 말도 안 됩니다!”
나세의 격앙된 목소리가 관청을 울렸다.
“맞습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옥도 동조했다.
“형님. 제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천목까지.
“음. 군사의 생각은 어떻소?”
“희한합니다.”
“희한하다?”
“군웅 간에 만나는 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긴 합니다. 그런데 장소가 문제지요.”
지금 관청에서 이런 논쟁이 발생한 이유는 지용기가 보낸 서찰 때문이었다.
“장소는 당연히 세력 간의 경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공더러 제 거점인 충주까지 오라고 한다? 이건 좀 이상하긴 합니다. 지용기가 이렇게 생각이 없지는 않을 건데.”
정도전의 말을 이옥이 이었다.
“만일 이를 수용하신다면 주공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게 됩니다. 패전해서 항복하는 게 아닌 이상 어찌 상대의 본거지로 간다는 말입니까?”
“게다가 지용기를 어찌 믿고 충주까지 가겠습니까?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만일 기어이 가신다면 이 나세를 반드시 대동하십시오. 모조리 제압할 것입니다.”
...가라는 걸까? 말라는 걸까?
가끔 보면 나세는 정말 과격하다.
역시 존...나세.
“그런데 형님. 지용기가 명분으로 꺼낸 사안이 김성우 토벌입니다. 영 개운치가 않습니다.”
“오.”
정도전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허.”
왕선도 뒤를 이었다.
“두 분 왜 그러십니까?”
“마 대장의 식견이 갈수록 발전하는군.”
“군사의 말대로다. 네 생각이 참으로 깊어.”
“그, 그렇습니까?”
얼떨떨한 마천목의 반응을 뒤로한 채 정도전이 입을 열었다.
“김성우 토벌을 논하자며 충주로 오라고 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핵심이 있습니다. 즉, 김성우 토벌에 대한 진의를 분명하게 확인해야 합니다.”
“나도 군사의 생각과 같소. 만일 김성우 토벌이 진심이라면 나를 충주로 부르는 건 이옥 장군의 말대로 세력 간의 상하를 규정하려는 행동일 것이고, 아니라면 나세 장군의 말대로 나를 어찌하려는 거겠지.”
“주공의 말씀대로입니다. 그걸 정확하게 하기 전에 만남에 응할 필요는 없습니다.”
“거. 무슨 말이오? 진심이라고 하더라도 갈 생각은 없소. 내가 뭐가 아쉬워서 충주까지 가오?”
정도전이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하면서 말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어차피 기 싸움입니다. 지용기가 진심이라면 여기로 오라고 해야지요.”
“거. 왜 말을 오해하게 하시오?”
“송구합니다?”
“말을 맙시다.”
정도전은 어물쩍 말을 돌렸다.
“어쨌거나 사실 여부는 밀교원의 연락을 기다려보면 알 겁니다. 우리는 그때 정하면 됩니다.”
“물론이외다. 아. 충주에는 누가 있지?”
“백리가 대장으로 있습니다.”
“밑으로는?”
“일전에 주공께 혼쭐이 난 만리도 있지요.”
“잘하겠군.”
“아무렴요.”
“아.”
“왜 그럽니까?”
“지용기의 제일 군사는 누구요?”
정도전의 입가에는 쓴 미소가 살짝 감돌았다.
“조의생입니다.”
“조의생?”
“포은이 가장 두려워하는 벗이지요.”
“포은 선생이?”
“예.”
“이거 큰일이구려. 시작도 하기 전에 군사진에서 밀리니까 말이외다.”
그런데 정도전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당연히 노발대발하면 따져댈 거로 생각한 왕선은 멈칫하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때
“큭.”
괴상한 웃음.
정도전이었다.
“···군사. 너무 충격받아서 실성했소?”
“큭. 이거 왜 이러십니까?”
“응?”
“포은이 두려워한다고 해서 소생보다 우위라는 건 대체 무슨 해괴한 논리입니까?”
“아. 음. 그거야···.”
정도전은 진하게 웃으면서 더 말하지 않았다.
그의 눈을 쳐다본 왕선은 크게 감탄했다.
-포은보다 부족한 인사에게나 해당하는 거지요. 그러니 소생은 제외입니다.
이거 정도전이 제대로 미쳤구나.
오늘 다시 깨달았다.
얼마 뒤 밀교원의 서찰이 전해졌다.
그리고 서찰을 펼친 왕선의 안색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찰나,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
밀교원들은 눈만 껌뻑였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말 그대로일세.”
“적지에서 정보를 파악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들키면 응당 자결해야 합니다.”
“예. 맞습니다. 어물쩍거리면 걷잡을 수 없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소인들도 죽음이 두렵지만 그게 맞습니다.”
왕선은 고개를 저었다.
“뭐하러?”
“예?”
“그러니까 뭐하러 죽나?”
“주···공.”
“내가 자네들 죽이려고 밀교에 집어넣었나?”
“그, 그것이···.”
“작전을 수행하다 보면 죽을 수도 있네. 그건 어쩔 수가 없어. 그런데 일부러 죽을 필요는 없어. 왜 그러나? 다 좋은 세상 보자고 뛰어다니는 거 아닌가?”
밀교원들은 눈을 껌뻑였다.
상대의 정보를 염탐하다가 들통나면 큰 곤욕을 치르게 된다.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중요한 기밀을 누설할 수도 있다.
해서, 거점과 모든 자료를 없애고 자결해야 했다.
...그런데 왕선의 말은 기존의 상식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들통나면 그냥 항복하게.”
“주, 주공.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살아서 글자를 남기게.”
“예?”
“우리의 글자. 그걸로 자네들이 항복했음을 알리게. 이 글자를 아는 사람은 천하에 우리밖에 없으니까. 그걸로 적의 뒤통수를 거하게 치라고.”
왕선은 불타오르듯 뜨거운 시선으로 밀교원들을 쳐다봤다.
“하면, 내가 반드시 자네들을 구할 것이야.”
“···주공.”
“자네들이 만든 내일의 세상을 살아봐야 하지 않겠나? 나의 불국정토는 자네들의 땀과 눈물로 만들어지는 건 맞지만 자네들의 피는 필요 없어. 그러니 죽지 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덧붙였다.
“자네들의 피 말고. 웃음과 구성진 가락 소리로 만들어보자고. 좋은 세상.”
밀교원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러니 죽을 위기가 닥치면 무조건 항복하게. 글자만 남기고.”
*****
왕선은 핏발선 눈으로 서찰을 쳐다봤다.
거칠 필체.
다급함이 느껴졌다.
그 급박한 상황이 생생하게 머릿속으로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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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지용기의 거점 충주를 염탐하던 밀교원 대장 백리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가득했다.
“모두 들켰네! 서둘러야 해!”
밖에서는 병사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함성과 병장기가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소리는 참으로 기괴했다.
황급하게 밖을 다시 살핀 백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틀렸어. 도망칠 방법이 없어.”
“대, 대장!”
“이렇게 잡히면 생사를 알 수 없다. 아군에게 큰 피해가 될 수도 있어.”
“알겠습니다. 우리 일을 하겠습니다.”
“어서!”
백리가 다급하게 지필묵을 꺼내자 만리와 천리는 붓을 들었다.
그들의 손은 거침없이 움직였다.
그러기를 잠깐 바로 지척에서 병사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버, 벌써?”
“아, 안돼. 조금만 더.”
그러나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백리는 이를 악물면서 말했다.
“내가 시간을 끌어보겠네.”
“대, 대장!”
만리와 천리가 만류했다.
“아니면 방법이 없어!”
백리는 격한 어조로 두 사람을 다그쳤다.
“어서 일하게!”
다그치는 그의 표정은 참으로 기괴했다.
웃는 듯 우는 듯.
그리고 눈에는 눈물이 미친 듯이 흘렀다.
“대장! 사셔야 합니다!”
“예. 조금만 버티십시오!”
“응당 그리할 것이네!”
백리는 눈을 질끈 감으면서 문 박으로 뛰쳐나갔다.
혼자서 병사들의 진입을 최대한 지체하려는 것이다.
“흐..흐흑”
천리는 피가 새어 나올 정도로 입술을 깨물면서 글을 써 내려갔다.
“허흐흐흑.”
만리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글을 써 내려갔다.
그리고
“머, 멈춰라! 이놈들!”
백리의 외침이 들렸고
“으아아아아악!”
그의 비명이 들렸다.
천리와 만리는 오열했다.
...그 순간에도 두 사람의 손은 움직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작성하던 서찰의 일부를 황급히 태웠다.
-콰앙!
거점의 문이 박살 났다.
병사들의 서슬 퍼런 눈빛과 마주한 두 사람은 악을 쓰며 달려들었다.
“이놈들!”
그러나 두 사람이 병사들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그때 두 사람의 눈에는 참혹한 모습으로 죽은 백리가 보였다.
“대, 대장!”
“으흐흑. 이놈들!”
발악했으나 무자비하게 구타당했다.
“죽이지는 말게. 알아낼 것이 있으니까.”
나지막한 목소리.
지용기의 제일 군사 조의생이었다.
그는 방안을 돌아보면서 헛웃음을 지었다.
“정말 부지런히도 염탐했군.”
“이, 이놈.”
“이보게. 우호세력끼리 염탐하는 건 대체 무슨 법도인가?”
“지용기는 전주에 사람을 보내지 않았는가?!”
“우리는 잡히지 않았고.”
만리의 항변을 가볍게 내쳤다.
“죽여라!”
“살려줄 테니 아는 걸 모두 말하게. 실수로 대장은 죽었으나 자네들도 제법 아는 게 많을 거니까.”
“우리 입에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하겠네.”
“우리를 죽이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다!”
“그것도 내가 알아서 하겠네.”
“미륵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구하실 것이야!”
조의생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미륵?”
“그래. 우리의 주공은 미륵이시다.”
광기. 이들의 눈에서 보이는 광기.
조의생은 그것이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음. 그래. 그래서 내가 왕선을 믿지 않는 것이네. 버젓이 왕실이 있는데 미륵이라니. 심지어 왕족을 자처하는 자가? 음. 왕족이 확실한지도 모르지. 천하에 군호도 없는 이를 왕족이라고 하는 법도는 언제 생긴 건지.”
조의생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김성우가 궁예라고? 그 사람은 고려가 망하면 자결할 정도의 충의지사. 그런 인물이 역모를 꾀했다고? 태봉국을 재건한다고? 차라리 미륵을 칭하는 왕선이 궁예의 후예라는 게 더 그림이 나오지.”
만리와 천리의 말문이 막혔다.
“그래. 그렇지?”
조의생은 빙그레 웃었다.
“앞으로 나눠야 할 대화가 많을 것이네.”
조의생이 손짓하자 병사들이 두 사람을 끌고 갔다.
그리고 빼곡하게 싸인 서찰을 살폈다.
“음. 이건 처음 보는 표식인데? 당연히 낙서는 아닐 테고.”
곳곳에 불에 타던 흔적이 보인다.
딱 봐도 다급하게 아마도 없애려고 한 것 같았다.
조의생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렇군. 이 서찰이 왕선 정보조직의 표식이구나. 여기에 글자를 적어서 보내야 진위가 확실한 거야. 바로 그거야.”
아주 흡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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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서찰의 중간에는 글자가 있다.
[지용기의 군세가 보령으로 향할 준비에 나섰습니다.]
한자였다.
그 글자를 둘러싼 또 다른 글자.
[들켰습니다.]
미륵의 글자였다.
...그리고
[어쩌면 맹세를 지키지 못할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함께해서 참으로 영광이었습니다.]
서찰의 내용을 확인한 정도전과 장수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왕선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살았을까?”
“···주공.”
“살았겠지? 그래. 살았을 것이야.”
“주공. 응당 그러할 것입니다.”
“그래. 본관이 무조건 항복하라고 했거든. 이 서찰이 왔다는 건 제대로 명령을 수행했다는 뜻이야.”
“···맞습니다. 모두 무사할 겁니다.”
서찰을 구겼다.
이를 악문 채로 내뱉었다.
“그런데 왜 이따위 내용을 적어 보냈냔 말이야!”
왕선의 어조는 거칠었다.
“군사.”
“예. 주공.”
“당신이 이 나라 최고의 지재를 가졌음을 증명하시오.”
“그리할 것입니다.”
“나세.”
“예. 주공.”
“지용기를 감당할 수 있다는 말. 변치 않았겠지?”
“소장에게 이 언월도와 한 필의 말만 내려주십시오. 모조리 도륙할 것입니다.”
“이옥.”
“예. 주공.”
“그 화살 끝이 향하지 못할 곳이 있나?”
“이 화살 끝이 향하지 못하는 곳은 주공께서 서 계신 곳이 유일합니다.”
“천목.”
“예. 형님.”
“이 왕선의 아우로서 천하에 포효할 준비는?”
“이때만을 기다렸습니다.”
“전면전. 준비하시오.”
“알겠습니다.”
그리고
“미륵의 글자. 그 위대한 힘을 보여주리다.”
한글, 그 위대한 글자의 힘을.
< 70화 한글, 그 위대한 이름이 가진 힘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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