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김제 지주 조익신의 정체 >
“···지금 뭐라고 하셨소?”
범세동은 눈을 질끈 감았다.
“혈...서가 있었습니다.”
“혈...서?”
“예. 김제 지주들의 혈서. 피로 써갈긴 태봉국 개국 공신 명단. 그것이 있었습니다.”
“······.”
“소생이 보는 앞에서 남은이 꺼내 들었습니다.”
“지용기도 봤겠구려.”
“···동맹은 결렬되었습니다.”
망연한 표정을 한 김성우의 고개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조익신의 이름도 있었...소?”
범세동은 참혹한 어조로 답했다.
“가장 위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본 명단은 혈서 수결을 그대로 본뜬 것이었습니다.”
“결국, 조익신도 왕선의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속았습니다.”
“허.”
“···소생의 움직임을 왕선이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조익신의 정보를 흘렸을 겁니다.”
“···저번에 부관들이 행동에 그가 개입했을 가능성도 있군. 남은. 그 찢어 죽일 놈과 함께.”
“아마도 그럴 겁니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농락당했어.”
“소생이 주공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습니다. 죽여주십시오.”
“군사가 무슨 죄가 있겠소? 이 사람이 부덕한 탓인 것을.”
숨을 크게 들이마신 김성우의 목소리는 격하게 떨렸다.
“당...장 조익신을 죽이시오.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요.”
“주공. 고정하십시오.”
“군사.”
“조익신을 이용하는 게 옳습니다.”
“우리가 혈서의 정체를 알았소. 조익신의 움직임이 있을 거요. 바로 죽여야 하오.”
“왕선도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어차피 우리는 혈서의 실체를 인정할 수 없지 않습니까.”
“알아듣게 말하시오.”
“우리로서는 혈서를 강하게 부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조익신을 죽일 이유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들은 반드시 거기까지 내다보고 있을 겁니다. 보십시오. 아직 조익신은 보령에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이를 이용해서 아군을 격멸하려고 했다면 조익신은 역할을 다했으니 보령을 벗어났어야 합니다. 소생이 지용기를 찾아갈 때 말입니다.”
“···해서?”
“만일, 조익신이 도주하면 그때 죽여도 됩니다. 철저하게 감시 중이지 않습니까.”
다소 흐리멍덩했던 김성우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범세동은 이를 꽉 악물면서 말했다.
“불행 중 다행입니다. 아니, 차라리 잘 됐습니다. 지용기는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하면, 아군과 왕선만 남습니다.”
“적절한 방법이 있소?”
“예. 소생을 한 번만 더 믿어 주십시오. 이번에야말로 그동안 당한 걸 모두 갚아 줄 수 있습니다. 반드시.”
“좋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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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거대한 민심의 파도를 불러일으킨 왕선은 임주의 점령을 사실상 마무리했다.
“범세동이 기겁 한 채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지용기의 반응은?”
정도전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혈서가 있습니다. 이걸 믿지 않는 건 억지죠. 이때 김성우와 동맹을 체결한다? 나 역적이라고 하늘에 대고 선언하는 겁니다.”
“하긴.”
“궁금해서 묻습니다. 혹시 여기까지 예측하신 겁니까?”
“아. 그건 아니외다.”
“그런데 혈서는 왜 사용하지 않았습니까?”
“김성우도 명장인데 궁예로 덮어 씌워진 걸 타파할 수도 있으니까? 잘하면? 뭐. 그때를 대비한 거라오.”
“그렇군요. 어쨌거나 그게 지금은 아주 중요한 수가 되었습니다.”
“음. 한데, 지용기가 그렇게 뛰어난 사람이오?”
사실 왕선은 지용기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다.
머릿속에 기억된 이 시절 명장은 이성계, 최영, 정지, 나세, 박위 정도?
“문관 출신이기에 칼 솜씨가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겁이 없습니다. 상식적인 궤를 벗어날 정도로.”
“용맹이 뛰어나다?”
“관우, 장비와 비교될 정도니까요.”
“탐나는군.”
“괜한 욕심입니다.”
“아오. 그리고 그게 다요?”
“눈썰미도 좋고, 머리도 잘 굴리고.”
“지략이 아주 뛰어 나가보군.”
“곽자의, 이광필에 비교될 정도지요.”
“더 탐이 나구려.”
“무리라고요.”
“거. 말도 못 하오?”
“지금 이렇게 안 하면 판을 짜실 거 아닙니까.”
왕선은 뜨끔했다.
“험험.”
“딱 깨 놓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지용기는 나세 장군이 나서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지장입니다. 그런 사람을 생포하려면 어떤 일을 겪어야 할지 모릅니다. 심지어 일개 장수도 아니고 충청도의 절반을 가지고 있는 군웅입니다.”
“거. 알겠소이다.”
“그러니까 소생의 말은···.”
“아. 군사.”
“왜 그럽니까?”
“범세동은 이제 어쩔 것 같소?”
정도전은 입맛을 다셨다.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정말이오?”
“예. 그러니 그냥 두십시오. 섣불리 김성우를 도모하려고 하면 지용기가 어떤 행보를 보일지 모릅니다.”
“하긴. 그도 역적 김성우를 제압한다면서 군을 일으킬 거니까. 그건 서로 골치 아프지.”
“예. 아군과 협정을 맺은 전제 조건이 그거였습니다. 창칼의 중단.”
“무엇보다 김성우도 혈서가 세상에 알려진 이상 섣불리 행동할 수 없겠지요?”
“물론입니다. 머리가 달려 있으면 얌전히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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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익신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혀, 혈서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다네. 혹시 아는 바가 있나?”
“소, 소인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
범세동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일전에 지용기를 만나러 갔는데 남은이 들고 있더군.”
“!!!”
“어찌 된 영문인가?”
조익신은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서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단지 미치도록 쿵쾅거리는 심장만을 어찌하고 싶을 정도였다.
“아는 대로 말해주게.”
“소, 소인은 정말 모릅니다.”
...조익신은 왕선의 사람이다.
그의 격한 반응을 본 범세동은 다시 한번 더 확신했다.
어물쩍 입을 열었다.
“나 역시 혈서가 진짜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으니까.”
조익신은 크게 반색했다.
“그, 그렇습니다. 예. 아무렴요. 구국의 충신이신 김성우 장군을 역도로 몰아댄 왕선입니다. 군사님의 말씀대로입니다.”
범세동의 눈빛은 더 깊어졌다.
“그러나 혈서로 인해서 동맹이 무위로 돌아갔으니 답답하네. 아. 물론 동맹을 차단하려는 왕선의 계책이라는 걸 알지만.”
“그, 그렇습니까? 하, 하면 이제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궁금한가?”
“물론입니다.”
“갑자기?”
“예?”
“아. 아닐세.”
범세동은 화제를 돌렸다.
“어쨌거나 이대로 있을 수는 없네.”
“오. 역시 방책이 있으시군요?”
“적의 내부를 흔들 것이네.”
“내부를요?”
“왕선은 지금 우리가 먼저 수를 쓸 거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못할 거야.”
“그렇습니다만.”
...이 상황에서 왕선의 내부를 흔들 수 있는 방책이 있을까? 세상 모두가 궁예라고 손가락질을 하는데?
조익신의 얼굴에는 걱정이 잔뜩 묻어났다.
역시. 내부교란은 생각도 하지 못했구나.
범세동은 옅게 웃었다.
슬쩍 한 수 더 던졌다.
“왕선이 임주의 지주를 대거 척결했네.”
“참으로 지독한 인사가 분명합니다. 제정신이 아니지요.”
“너무 흥분하지 말고.”
“송구합니다.”
“어쨌거나 살아남은 지주 중에서 아군에 연락을 취한 자들이 제법 있네.”
“정말입니까?”
“그들이 때에 맞춰서 내통만 해준다면 우리는 승산이 있어.”
“과연 군사이십니다.”
“그래. 하면 다시 찾아오겠네.”
“예. 편히 가십시오.”
홀로 남은 조익신은 멀뚱히 생각에 잠겼다.
“···갑자기 내게 왜 이렇게 많은 내용을 말해주는 걸까?”
한참을 고심하던 조익신은 무릎을 '탁' 쳤다.
“그렇군. 나를 이제 확실한 제 식구라고 여기는 것이야.”
그간의 홀대가 주마등처럼 스쳤다.
참으로 서러운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옥토 중의 옥토였던 김제와 부안 최고 실력자가 나였지.”
조익신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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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고 합니다.”
“음.”
범세동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우습게 볼 인물이 아닙니다. 볼수록 심계가 깊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를 속였으니 만만한 인사는 아니겠지.”
“예. 옥토 중의 옥토인 김제와 부안을 좌지우지했던 실력자가 아닙니까. 그걸 간과한 거 같습니다.”
“군사의 말은?”
“경계를 풀어야 할 거 같습니다. 그래야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자신을 확실하게 믿는다는 걸 보이자?”
“예. 우리가 인원을 배치한 걸 아는 게 분명합니다.”
“탈이 없겠소?”
“물론입니다.”
“좋소.”
그리고 다음 날
“어제 조익신의 움직임을 포착했습니다.”
“누구와 접선했소?”
“따로 접선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뭐?”
“다만 시비가 붙었습니다.”
“시비?”
“예. 그 탓에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지나치던 사람들이 말려서 겨우 진정됐습니다.”
김성우의 눈썹이 꿈틀였다.
“허. 사람이 많았겠구려.”
“예. 아마도 그 틈에 서찰을 전달했을 겁니다.”
“기가 막히는군.”
“볼수록 보통 인사가 아닙니다.”
“김제, 부안의 최고 실력자였던 사람이니까.”
“예. 일전에 소생과 혈서에 대해서 논의할 때 크게 당황한 기색을 보였는데 이제 보니 일부러 그런 게 분명합니다.”
범세동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제 왕선은 움직임이 있을 겁니다.”
“지주를 다시 때려잡을 거요.”
“없는 죄를 들먹이면서 괴롭히면 억지로 몸을 숙이고 있는 지주들은 반발심이 크게 생길 겁니다. 반드시 연락을 취해올 겁니다. 원래 우리와 손을 잡았던 자들이니까요.”
“참으로 적절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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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세 장군.”
“예. 주공.”
왕선은 신뢰 가득한 눈으로 나세를 쳐다봤다.
“지주들의 동향은?”
“보고도 보지 않고, 들어도 듣지 않고 있습니다.”
“얌전하군.”
“그들을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토지 겸병과 무관한 착한 지주도 있다고 하더군.”
“아. 그렇습니다. 물론 대동법은 경기를 일으키지만.”
“이 각박한 세상에 그 정도는 이해해줘야지.”
“하면 나머지 지주는 다 정리하겠습니다.”
이건 뭐 언월도가 춤추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는 착각이 들 정도다.
왕선은 다급히 나세를 잡았다.
“아, 아. 그게 아닐세.”
“왜 그러십니까? 설마 반발을 염두에 두십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장이 말도 못 하게 만들겠습니다.”
“아, 아. 그게 아닐세. 진정하게.”
진땀을 흘리면서 잡았다.
“왜 그러십니까?”
“따로 쓸데가 있네. 그들은.”
“쓸데가 있습니까?”
“아. 이건 내정의 일일세.”
“아. 전 선생의 일이군요.”
“그렇다네. 그리고 어차피 아주 악질인 지주는 진작 처리했으니까.”
“알겠습니다. 하면, 소장은 그리 알고 물러나겠습니다.”
“아. 나세 장군.”
“예.”
왕선은 슬쩍 물었다.
“지용기. 어찌 생각하나?”
나세는 멈칫하더니 금세 언월도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쉬운 상대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서 주공의 발걸음이 멈추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 말은?”
“이길 수 있습니다.”
“확실히?”
“예.”
“믿겠네.”
“언제라도 명령을 내리십시오.”
“알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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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우와 범세동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졌다.
오늘따라 김성우의 빡빡 깎인 머리가 더 주름져 보이기도 했다.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예. 오히려 지주들과 만남이 잦아지고 있습니다.”
“허.”
“송구합니다. 적들이 섣불리 칼을 휘두르기보다는 확실하게 회유를 도모할 수 있을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간 왕선의 행보라면 그걸 예측하는 건 어렵소. 누구라도 숙청할 거로 생각했을 거요.”
“···어쨌든 이거 괜한 짓으로 왕선의 경각심만 사게 됐습니다.”
“차라리 선제공격은 어떻소?”
“선제공격이라고 하시면?”
“임피를 친다고 하는 것이오. 적당하게 군을 움직이는 시늉을 하면 반응이 오지 않겠소?”
“왕선을 속이려면 천은 움직여야 합니다. 우리로서는 사실상의 주력입니다.”
“노병과 패잔병을 합치면 될 거요.”
“주력을 따로 숨기고 위장 군세를 보내자는 겁니까?”
“아니오. 주력을 임피로 보내는 거요. 어차피 무주공산일 테니까.”
범세동은 멈칫했다.
“그러나 노병을 집결시키면 왕선도 파악할 겁니다.”
“훈련하는 정도로 보이면 충분하오. 아주 은밀하게 훈련하는 시늉. 절대 들켜서는 안 되는 모습으로 말이외다. 임주에 있는 왕선의 주력이 이동하는 순간 최대한 빠르게 진군하는 거요.”
“그 소식을 들은 왕선이 회군할 때 아군의 주력이 덜미를 잡는다면?”
“바로 그거요.”
“과연 장군이십니다.”
“조익신에게 흘리시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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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우 쪽은 어떻소?”
“발악하고 있습니다.”
“발악?”
정도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노병과 패잔병까지 모아서 훈련하는 거 같습니다.”
“허. 그걸로 뭐 하려고?”
“나름의 자구책을 찾은 거 같습니다.”
“범세동이라고 했지요? 군사의 사질.”
“······.”
“대단하오. 진심이오.”
“포은이 이 사실을 알면 통탄할 겁니다.”
“거. 사질인데 살살 좀 하지 그랬소?”
“전쟁에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음. 그런데 그걸로 진짜 움직이면 어쩌오?”
“미친놈이 아닌 이상은 그런 생각 안 할 겁니다.”
“범세동. 군사가 반쯤 미치게 했다는 생각은 안 하오?”
“···김성우는 주공께서 미치게 만드셨지요.”
“이럴 때 보면 우리 참 잘 만난 거 같소?”
“그러게 말입니다.”
왕선과 정도전은 피식 웃었다.
“그러면 어쩌면 좋겠소?”
“그걸로 뭐하겠습니까? 그냥 두지요.”
“적절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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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우와 범세동은 임주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들려오는 소식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거 왕선과 정도전의 심계가 보통이 아니외다.”
“···조익신도 볼수록 만만치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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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아무런 움직임도 없구려.”
“다행이지요. 포은의 제자가 제정신이라는 걸 증명한 거니까요.”
“반만 미쳐서 그런 가보오.”
정도전이 따지려고 할 때 급보가 전해졌다.
“충주의 지용기가 만남을 청했습니다.”
< 69화 김제 지주 조익신의 정체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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