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단종원 >
“그래. 직접 눈으로 보니까 어떻던가?”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남은은 실소를 머금으면서 정도전을 바라봤다.
“세력을 확대. 그것은 군현의 유력가가 협조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폭발적인 민심을 업고 가더라도 분명한 한계가 나옵니다.”
“그래서?”
“전주 목사의 팽창은 반드시 제동이 걸릴 겁니다.”
“그럴 수도 있지. 주공께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거고.”
“예. 이보다 미련한 행동이 천하에 어디 있습니까?”
“미련하다면 미련하지. 민심도 잡고, 유력가도 품을 방법은 있었으니까.”
“예.”
남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도전의 눈빛이 차분해졌다.
“그래서 말입니다.”
“그래서?”
“그래서 전주 목사는 대업의 주인이었습니다.”
정도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대업은 세력의 이합집산이 아니라 백성을 위한 것.”
“그렇지.”
“그것은 지금까지 이 땅에 없었던 완벽하게 새로운 길.”
“정답일세.”
“가진 권력을 더 확대하고,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세력의 선택이 아니라 백성의 바람이 집결된 것.”
“바로 그거지.”
“그래서 전주 목사의 길이 옳습니다.”
“해서?”
정도전의 물음.
남은은 한탄하듯 말했다.
“앞으로 고생 꽤 하겠더군요. 쉬운 길을 버렸으니까.”
“그래도 웃으면서 고생할 수 있을 것이네.”
“천하에 이런 미련한 선택을 한 주인과 그를 따르는 책사들이라니. 사관이 비웃을 겁니다.”
“하하하. 성공하면 누구도 비웃지 않을 거야. 영원히 기록될 것이네.”
“됐습니다. 그런 걸 바라고 마음먹은 일이 아니라서요.”
“허. 그런가?”
“아닙니까?”
“나는 빠짐없는 기록의 나라를 꿈꾸고 있네.”
“그래서요?”
“기록의 한 구절에 대업의 기둥으로 남고 싶어서.”
“이제 보니 흑심이 있었군요.”
“살아서 악업을 저지르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는 품어도 되지.”
남은은 싱긋 웃으면서 짓궂게 말했다.
“그게 제일 가치 있는 악업입니다”
“이 사람아. 기록을 날조하는 것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 적게 할 거라고.”
“남아로서 가장 꿈꾸는 일이지요. 만대에 기억되는 것.”
“그렇지. 바로 그거지.”
남은은 다시 진중하게 말했다.
“그래서 주공께서는 대업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반드시.”
“서두르지 말게. 주공께서 새 나라의 주인이 될 결심을 세우지 않으셨다고 하더라도 민본의 길을 활짝 열고 계시니까. 무엇보다 주공께서는 아직 젊으시니까.”
“예. 이 나라에 민본이 열리면 민심이 알아서 주공을 용상으로 모실 겁니다. 그 거대한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지요.”
“하하하. 잡담은 그만하고 가보지.”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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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과 남은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동안 왕선은 임주 백성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전주 목사가 된 직후 무자비한 칼을 휘둘러서 유력가문을 청산하여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전주, 대동법이 시행된 김제, 부안의 백성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
참으로 헐벗고 굶주린 상태였다.
...망국적인 토지 겸병의 폐해였다.
김성우가 그렇게 무능한 인물이었을까?
아니다. 그는 유능한 측에 속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토지 겸병을 어찌하지는 못했다.
왜? 그 역시 세력의 확대를 위해서 지주와 손을 잡고 이합집산을 거듭한 일반적인 군웅에 불과하니까.
어쩌면 토지 겸병을 어찌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은 기득권의 범주에 속한 인물이었을 수도 있고.
왕선은 백성들을 다시 살폈다.
그런데 이들이라고 모르겠는가?
-김성우가 임주를 점령할 때 기대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그때도 많은 백성이 열광했고, 지주들이 고개를 숙였지.
이들은 이 땅에서 가장 오랫동안 살아왔다.
이들의 눈은 가장 정확하다.
맞다. 분명히 어제와는 다르다.
이들에게는 희망과 기대가 있다.
-그래도 지주를 때려잡은 대동 미륵이라면 다르겠지?
...이들이 기대한다. 하면, 알아서 이들의 바람을 들어주면 될까?
...이들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해주면 될까?
잠시. 아주 잠시 고민했다.
무엇이 가장 정도일까?
어찌하면 이들의 마음을 눈 녹듯 녹여줄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백성들은 눈치를 살피며 어려워하고 있다.
결론을 내렸다. 이들이 바람. 그걸 들어준다.
이 백성들이 진정 원하는 것. 그걸 한다.
“늦어서 미안하구나.”
왕선의 입에서 상상도 하지 못했던 말이 나왔다.
눈치를 살피던 백성들.
뒤를 따르던 수하들.
모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왕선은 의연하게 말을 이었다.
“더 일찍 오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대동법을 시행하고, 억압하던 지주들을 때려잡았다.
그러나 그간의 응어리가 어찌 눈 녹듯 사라질 수 있겠는가?
어제, 오늘 굶었으나 내일 밥을 준다고 하여 그간의 한이 어찌 사라지겠는가?
해서 사과했다.
어찌하여?
“더 늦지 않으셔서 다행입니다.”
“지주들을 때려잡지 않으셨습니까?”
이들은 말할 곳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아직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왕선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뭐가 아닌가?
왕선은 자조적으로 웃으면서 그들에게 다가갔다.
“태초 백성이 농사를 짓는 이유는 유력가의 배를 불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제 입을 즐겁게 하기 위함이다.”
“······.”
“태초 백성의 입이 있는 이유는 고통의 시름을 내뱉기 위한 것이 아니라 태평가를 부르고자 함이다.”
“······.”
“태초 백성의 눈이 있는 이유는 유력가의 수레를 가득 채운 쌀을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황금 물결의 논밭을 보기 위함이다.”
“······.”
“태초 백성의 귀가 있는 이유는 조세를 착취하는 마름의 욕설과 관리의 감언이설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위정자의 진솔한 사과를 듣기 위함이다.”
그리고
“!!!”
“!!!”
왕선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하여, 오늘 본관은 너희에게 고개를 숙인다.”
덧붙였다.
“미안하구나.”
묵직한 침묵이 내렸다.
침묵. 본래 백성이 침묵하는 이유는 그것이 이익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아둔하고 무지하다는 말을 듣더라고 혀를 단속하지 못한다면 큰 화가 마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좌중을 지배하는 침묵은 그것과 결이 달랐다.
그리고
“더 일찍 오시지 왜 이제야 오십니까?”
백성의 입이 열렸다.
“미안하네.”
“조금만 더 일찍 오셨다면 제 부모님도 이 세상을 봤을 건데. 왜 이제 오셨습니까?”
“참으로 미안하네.”
솟구치는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듯 앞다퉈서 입을 열었다.
오늘 백성들은 참으로 솔직했다.
“평생 미륵을 기다렸습니다. 전지전능한 미륵이 아니더라도 미륵을 참칭한 사람일지라고 하더라도 기다렸습니다.”
“우리가 왜 죽지 못하고 살아가는 줄 아십니까? 언젠가는 미륵이 올 거라는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왜 이제 오셨습니까?”
감정이 고조됐다.
백성은 오열하며 피를 토하듯 외쳐댔다.
왕선은 그들의 손을 부여잡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미안하네.”
“제 아들이 얼마 전 이세조의 마름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며칠만 더 일찍 오셨다면···.”
“미안하네.”
“제 부모님이 이수양의 마름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참으로 미안하네.”
“이진양의 횡포에 저는 다리를 절룩이게 되었습니다.”
“미안하네.”
그때 아들의 부축을 받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다가왔다.
한눈에 보더라도 병색이 완연하다.
왕선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그런데
“이 늙은이가 죽기 전에 미륵을 보게 되어 참으로 다행입니다.”
“···노인장.”
“많은 백성이 이 늙은이처럼 여한이 없도록 해주십시오.”
“물론일세.”
노인은 옅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일찍 오시지 그랬습니까? 그랬으면 하루라도 더 대동법이 시행된 땅에서 살아봤을 건데. 그건 아쉽습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내 자식들이 내일은 웃을 수 있을 거니까.”
희미하게 웃는 노인.
왕선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게 무슨···.”
그 순간 왕선은 가슴이 철렁거렸다.
노인은 희미하게 웃으면서 눈을 감았다.
“아, 아버지!”
부축하던 아들이 오열한다.
힘겹게 버티던 노인의 몸이 무너진 것이다.
그랬다. 원래 큰 병을 앓고 있었고, 오늘에서야 미륵을 보러 온 것이다.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누구도 나서지 못했다.
장내에는 오직 아버지를 잃고 오열하는 아들의 통곡만 들렸다.
“어째서...”
어째서 의원을 찾아가지 않았느냐고 물으려고 했으나 말문이 막혔다.
물어보나 마나.
이 각박한 세상에서 헐벗은 백성이 무슨 수로 의원을 찾을 수 있겠는가.
왕선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쥐어짜듯 힘겹게 말했다.
“...대동법이 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어제와 오늘 고생하고 내일을 기다릴 수 없는 백성이 있거늘.”
한탄했다.
“백성의 밥상에 쌀이 가득하더라도 무엇이 바뀌겠는가? 병마는 끝없이 백성을 괴롭히거늘.”
왕선의 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간의 고생이 떠올랐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내일의 고통이 벌써 걱정되었기 때문일까?
백성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왕선은 힘겹게 마음을 다잡고 크게 일렀다.
“각지의 솜씨 있는 의원을 모두 불러 모을 것이다.“
격정적으로 말을 이었다.
“이세조, 이수양, 이진양의 사가를 몰수할 것이다. 바로 그곳에!”
숨을 크게 내쉬었다.
“천하에서 가장 훌륭한 의원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리고
“부친의 함자가 어찌 되셨는가?”
“이 단자 종자였습니다.”
왕선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원의 이름은 단종원이라고 하겠다.”
“다, 단종원이라고 하셨습니까?”
“다시는 이 땅에서 의원의 손길을 받지 못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겠다는 본관의 다짐이네. 이것이 진정한 사람 사는 세상의 길이라고 생각하네.”
그리고 이미 숨이 끊어진 노인의 손을 부여잡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늦어서 미안하오. 너무 늦어서 미안하오. 이제 편히 쉬시오.”
마침내 왕선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고
“이제라도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들의 울부짖음이 좌중을 적셨으며
“오늘. 바로 이 순간 우리와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간의 서러움을 밀어내는 백성의 말이 사방에서 울렸다.
왕선은 아무 말 없이 눈물로서 화답할 뿐이었다.
멀찍이서 이를 지켜보던 정도전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단종원이라.”
남은이 답했다.
“왠지 모르게 이름이 참으로 적절한 거 같습니다.”
“자네도 그런가? 실은 나도 그렇다네.”
“그렇죠?”
“아. 그건 그렇고. 자네 할 일이 하나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밀교원이 소식을 전해왔네. 자네도 지금쯤 출발하면 딱 적절할 거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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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세동은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최근 김성우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보령으로 돌아온 직후 식음을 전폐하고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제일 군사가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 위기를 극복할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충주의 지용기와 동맹을 체결하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과거 건재했을 때 손을 내밀었다면 좋았을 건데.
만일 그랬다면 절체절명의 순간 도움을 받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쇠약해진 상황이라면 동맹을 체결하기도 어렵고, 하더라도 악조건이 붙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후회하는 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또 아무리 불리한 조건이라고 하더라도 광기에 휩싸인 왕선에게 잡아 먹히는 거보다는 좋다고 판단한 것이다. 반드시 성사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용맹은 관우, 장비와 비교하며 지략은 당을 위기에서 구한 곽자의와 안사의 난을 진압한 이광필과 비교하는 사람.”
바로 지용기.
그라면 왕선의 광기를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랬다. 지금 이 행보에 세력의 명운이 걸린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충주에 도착했다.
일은 순탄했다.
곧장 관청을 통과해서 지용기와 만날 수 있게 됐다.
범세동은 마음을 다잡고 활짝 웃으면서 발을 들이밀었다.
그때
“허.”
기분 나쁜 목소리.
“이 새끼 또 웃네?”
범세동의 가슴이 철렁했다.
몸을 떨며 힘겹게 목을 움직였다.
“!!!”
“좋소?”
남은이었다.
“끼니는 제때 챙기시오? 몰골을 보니 영 빡빡 한 거 같은데.”
< 68화 단종원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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