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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67화 (67/187)

< 67화 대동미륵 >

범세동은 실성한 듯 걸음을 옮겼다.

정도전의 일갈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

“허. 사숙을 만났는데 인사도 안 하나?”

“······.”

“허. 포은 정몽주가 제자 교육은 똑바로 했군.”

“···사숙님을 뵙습니다.”

“목이 뻣뻣한데? 허리가 뻣뻣한 건가?”

범세동은 눈을 질끈 감은 채로 허리를 숙였다.

“더.”

더 숙였다.

“조금 더.”

...더 숙였다.

“그렇지. 딱 거기까지.”

“······.”

“그 자세. 절대 잊지 말라고. 사문의 어른을 만나면 항상 그렇게 인사하게.”

“···새기겠습니다.”

정도전은 싱글벙글.

“그런데 포은은 알고 있나?”

“무슨 말씀입니까?”

“고려 최고의 석학으로 추앙받는 포은 정몽주. 이 땅의 역사에서 일찍이 없던 왕좌 지재 포은 정몽주.”

“······.”

“이런 엄청난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포은 정몽주의 제자가 궁예 새끼의 제일 군사라는 걸?”

“!!!”

“포은이 알면 피를 토하겠군.”

범세동은 핏발선 눈으로 격하게 내뱉었다.

“그건 사숙님의 계책이 아닙니까?”

“아닌데?”

“비록 이렇게 처참하게 패배했으나 소질 그렇게 아둔하지 않습니다.”

“정말 아닌데?”

정말 아니다.

왕선의 계책이었으니까.

범세동은 온몸을 파르르 떨면서 노려봤다.

“궁예는 왕선입니다.”

“이 사숙의 주공은 궁예가 아닐세.”

“이 지경이 됐는데도 거짓말을 하십니까!”

“음. 좋아. 진실을 말해주지.”

정도전은 이죽거렸다.

“우리 주공은 의자왕의 한을 푸는 게 목적일세.”

“!!!”

“그런데 어떻게 궁예라고 할 수 있겠나?”

“!!!”

“우리 주공 사실 왕족이 아니라 견씨야.”

“!!!”

범세동의 눈에는 엄청난 충격이 내렸다.

정도전은 범세동의 어깨를 토박이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오랜만에 사질을 만났으니 가르침을 내리지. 군략에서 가장 중요한 건 주제 파악일세. 하긴 궁예 새끼의 책사가 뭘 알겠나?”

“!!!”

“포은이 제자 교육을 참 개똥같이 했군. 안 그런가?”

*****

...너무나도 수치스러웠다.

“반드시 이 수모를 갚을 것이다.”

그러나 정도전의 조롱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포은 정몽주가 대성통곡하겠군. 궁예 새끼라니. 허.]

눈을 질끈 감았다.

태산보다 더 거대한 존재.

포은 정몽주.

그의 제자라는 것이 필생의 자부심이었다.

그의 길을 따라서 가고자 다짐했다.

김성우의 제일 군사가 된 것도 고려의 내일에 이바지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게 대체 뭐라는 말인가? 궁예의 제일 군사라니.

“······.”

범세동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다. 이건 다 계책이야. 그런데 나부터 이를 인정하면 어쩌자는 것이냐.”

이를 악물었다.

어느새 보령에 도착했다.

아직 김성우는 당도하지 않았다. 그의 생사를 걱정하지는 않았다.

분명 정도전이 김성우를 살려준다고 했으니까.

다음날이었다.

“구, 군사님!”

다급한 목소리.

범세동은 속이 울렁였다. 최근 이런 식이면 항상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무슨 일인가?”

“밤새 정체를 알 수 없는 관이 나타났습니다.”

“뭐? 관이라니?”

“예. 흉흉한 소문도 돌고 있습니다.”

“흉흉한 소문?”

“직접 가보셔야 할 거 같습니다.”

범세동은 불안함이 엄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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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선은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정도전이 슬쩍 쳐다보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 아무래도 후회가 되오.”

“갑자기 후회라니요?”

“김성우 말이오.”

“예.”

“머리도 깎아서 보냈어야 했는데. 모름지기 궁예 새끼라면 그 정도는 해야 했었지 않나. 뭐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왕선은 진심으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정도전이 실실 웃는다.

“왜 웃소?”

“주공을 올곧게 보필하는 것이야말로 제일 군사의 미덕이 아니겠습니까?”

“오랜만에 바른말 했소. 그런데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오?”

“소생 정도전입니다. 잊었습니까?”

머릿속으로 정도전의 속내가 빠르게 입력됐다.

왕선은 헛웃음을 지으면서 무릎을 '탁' 쳤다.

“과연 삼봉 정도전.”

“과찬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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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세동의 눈은 충격으로 얼룩졌다.

“이, 이럴 수가.”

흉흉한 분위기를 만들던 관을 열었다.

...그 안에는 기절한 김성우가 있었다.

그런데 그 몰골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범세동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삼삼오오 모여서 구경하던 백성들이 숙덕였다.

“대체 무슨 일이래?”

“몰라. 근처로 접근하지 못하게 하니까.”

“도통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나.”

“그나저나 김성우 장군은 어떻게 된 거래?”

“소문에 의하면 궁예라던데?”

“설마.”

그때

“으...”

김성우의 입에서 소리가 들렸다.

범세동은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여, 여긴···.”

김성우의 입에서 제대로 된 말이 만들어지고 있다.

범세동은 황급히 손짓했다.

“과, 관을 관청으로 들고 가야 한다!”

이대로 김성우가 일어나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그러나

“군사?”

범세동의 귀를 때리는 목소리.

김성우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건 뭐였을까?

눈앞에 있는 사람이 왕선이 아니라 측근 범세동이었기에 참담한 시간이 드디어 끝났음을 인지하고 안심했기 때문이었을까?

김성우의 입가에는 아주 작은 안도의 미소가 걸렸다.

그걸 본 범세동의 머릿속으로 남은의 조롱이 스쳤다.

[삼봉 선생. 이 새끼 웃는데요?]

그때 김성우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사로운 햇빛과 함께 찬란한 황금색 법복과 위엄있는 황금색 안대가 무척이나 아름답다. 그의 손에 들려진 철퇴는 참으로 거대한 위용을 보였다.

무엇보다도 햇빛을 받아서 눈부실 정도로 반짝이는 그의 머리까지.

누가 봐도 완벽한...

“구, 궁예다!”

“궁예 새끼다!”

장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범세동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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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천목의 1천 병사는 단번에 임주의 경계에 이르렀다.

김성우의 상태가 상태인지라 별다른 군사적 저항은 없었다.

그러니까 군사적 저항만 없었다.

왕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지주들이 버틴다고?”

“예. 아군의 진입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하던가?”

“···대동법을 철회하지 않으면 아군의 진군과 점령을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대동법?”

“예.”

“허용하지 않는다고? 누가? 지주들이?”

“그렇습니다.”

“어처구니가 없군.”

“···형님. 고정하십시오.”

“이 땅의 모든 세력이 그랬어. 전부. 그들은 시작할 때는 백성의 이름을 팔아. 백성만을 위한다고. 그러면서 땅을 가진 지주와 권력을 휘두르던 기득권을 거세게 압박했지. 그러다가 적당한 힘이 생기면? 어김없이 그들과 타협을 했지.”

왕선의 목소리는 스산할 정도로 낮아졌다.

마천목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군사 정도전을 힐끔거렸다.

중재를 청하는 거다.

그러나 정도전은 남은을 슬쩍 쳐다보고 있다. 반면, 남은은 날카로운 눈으로 현 상황을 관망했다. 결국, 마천목의 시선은 왕선에게로 돌아왔다.

왕선은 숨을 내쉬면서 비웃었다.

“하. 그래. 김제의 지주들도 그랬지. 지금까지 다 그랬어. 왜? 그게 그들에게는 당연한 거니까. 그래서 임주의 지주들이 저렇게 나오는 거야. 다만 다른 건 대동법의 무자비한 집행을 봤으니까 처음부터 단결해서 내게 저항하는 거지. 왜? 내가 협상의 손을 내밀 거라고 생각하니까.”

왕선은 씹어먹을 듯이 말했다.

“그게 관례였고 전통이었고 역사였지. 내가 그 같잖은 전통과 관례를 박살내고 역사를 새로 쓰겠다.”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군사.”

“예. 주공.”

“문제 있소?”

“저들이 문제입니다.”

“좋소. 천목.”

“예. 형님.”

“저항하면 죽이게.”

마천목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아. 잠시만.”

“왜 그러십니까?”

“제대로 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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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천목은 곧장 병력을 이끌고 임주로 진입했다.

“멈추시오!”

역시 지주들이 막았다.

마천목은 창을 휘두르며 외쳤다.

“돌격!”

“!!!”

마천목의 저돌적인 돌격이 시작됐다.

“머, 멈추시오!”

그런다고 마천목이 멈출 리는 없다.

당연한 협상을 생각했던 지주들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반항하면 죽여라!”

“!!!”

일단 살고 봐야 한다.

애초 근엄하게 경계를 틀어막던 지주들은 몸을 납작 숙였다.

마천목은 날카롭게 외쳤다.

“모조리 포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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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선.

전주와 김제 등에서 미륵의 현신이라고까지 불리는 사람이라고 들었다. 그가 다스리는 지역은 태평가가 울려 퍼지는 불국정토라고 들었다.

그런데 그가 임주로 온다는 소식은 이곳 백성들에게도 적지 않은 희망을 던져줬다.

그러나 지주들의 반대로 진군을 멈췄다는 말이 전해지면서 크게 실망했다.

긴 세월 동안 이 땅을 지켜온 노인들은 담담하게 말했다.

“왕선도 결국 지주들과 야합하는 사람이야. 원래 미륵은 그래. 처음에만 미륵이고 시간이 지나면 다 똑같아. 그래도 젊은 사람들이 살기 편하게끔 잘 되었으면 하는데.”

이 땅의 오늘을 책임질 중장년들은 탄식했다.

“임주의 백성도 미륵을 기다리건만. 어째서 머뭇거린다는 말인가? 그래. 일단은 기다리자.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이 땅의 내일을 살아갈 젊은이들은 분개했다.

“진정 미륵이라면 중생을 괴롭히는 저들을 당장 찢어 죽여야 하는 거 아닌가?”

세대별로 반응이 엇갈렸다.

그러나 떠들어대는 말이 왕선의 귀로 옮겨질 것이라는 기대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이게 백주에 무슨 일이래?”

“보, 보면 모르겠나? 지주들이 모두 포승줄에 끌려 왔어!”

“그걸 누가 못 봐서 이러나? 그러니까 갑자기 왜?”

“이 사람아. 딱 보면 알아야지.”

“설마?”

“그래. 미륵께서 진정 미륵께서 이 땅에 오신 거야.”

임주의 지주들이 모두 포승줄에 묶인 채로 관내로 잡혀 왔다.

“똑바로 걸어!”

정확하게는 개처럼 끌려 왔다.

백성들은 눈을 껌뻑이면서 그들을 쳐다봤다.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백성을 개처럼 부리던 지주들이 개처럼 끌려 오고 있다.

백성들은 알 수 없는 희열감이 치솟았다.

그랬다. 저들이 포승줄을 묶은 것만으로 이렇게 기쁘다.

그렇다. 바로 이래서 유력가와 세력은 항상 유대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

단지, 이 정도만 해줘도 백성들은 기뻐하니까.

이 정도의 적당한 정치적 행위만으로도 백성의 마음을 잡을 수 있지 않은가?

백성들이 당장 내 삶이 바뀌지 않더라도 내일이면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내릴 수 있으니까.

또한, 내 삶이 어렵더라도 내 아들, 딸의 삶은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이 꿈틀거리게 해주었다.

오늘이 아니고 내일.

잡히지 않는 그 연기 같은 단어.

내일.

그것을 가질 수 있으니까.

하여, 유력가와 세력의 밀애는 영원했다.

...영원? 영...원? 그래 영원했다.

그때 추상같은 외침이 울렸다.

“역도 김성우의 동조자들이다. 모조리 벌할 것이니라!”

싸늘한 눈빛으로 지주들을 노려보며 나타난 사람.

왕선이었다.

“모, 목사 나리. 어째서...”

“역적 김성우가 김제로 진군할 때 내건 명분이 바로 대동법의 철회였다.”

왕선은 지주들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이놈들이 역도처럼 대동법의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역도의 땅에서 기생했고, 역도와 같은 뜻을 하였다.”

“모, 목사 나...”

“바로 너!”

그 순간 왕선의 오른손 검지가 항변하던 지주에게로 향했다.

“예, 예?”

“이름. 이 세조?”

“예, 예.”

“만악의 근원이로다. 모든 악업이 너로부터 생겼다!”

그러자

-퍼어어어어엉!

마천목의 창이 그의 목을 관통시켰다.

충격과 공포.

상상도 하지 못한 엄청난 일.

“역도 김성우가 대동법을 철회하여 무엇을 하고자 하였는가?”

왕선의 검지가 다시 움직였다.

간사하게 생긴 지주 한 명이 기겁했다.

“이름. 이수양?”

“예. 예.”

“참으로 끔찍한 이름이로다. 만악의 근원이 너로부터 시작했어. 그 이름을 가지고 사는 세상은 지옥일터.”

“그, 그것이···.”

왕선의 검지가 거둬졌고

-퍼어어어어엉!

마천목의 창이 지주의 목숨을 거뒀다.

“태봉국을 건설하고자 했다. 태봉국. 그래. 태봉국이다.”

또 검지가 움직였고, 지목된 지주가 기겁했다.

왕선이 눈을 부라렸다.

“이진양? 진정한 시작이 여기였도다!”

-퍼어어어어엉!

“역도 김성우는 궁예 새끼다. 그런데 임주의 지주들이 궁예 새끼와 같은 꿈을 꾸고 있으니 역도가 아닌가?”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공포.

벌써 3명이 죽었다. 뭐라고 제대로 항변조차 하지 못하고.

평생 근처에 접근도 하지 않았던 죽음이라는 이질적인 존재가 다가온 것이다.

지주들은 온몸을 떨었다.

“네놈들이 대동법을 반대한다? 마음대로 하라. 그리고 느끼도록. 너희가 가진 힘이 얼마나 무기력하고, 너희의 목소리가 얼마나 작은지를.”

왕선은 오른손 검지를 하늘로 뻗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선언했다.

“오늘부터 임주에도 대동법이 시행될 것이다!”

백성들은 이 현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사전 1결당 쌀 500두!”

이건 현실이었다.

“땅이 없으면 조세를 내지 않는다!”

누가 뭐라고 해도 현실이었다.

“누구도 조세를 타인에게 넘길 수 없다!”

광포한 지주를 죽이고 대동법을 천명하고 있다.

...대체 왜?

왕선은 오른손을 펼쳐서 백성들에게 내밀었다.

“나는 너희에게 내일이 아니라 오늘을 주고자 한다.”

...대체 누가 이 엄청난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대동 미륵이시여!”

“대동 미륵이시여!”

억겁의 세월.

이 땅을 짓누른 한이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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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세동은 떨리는 손으로 서찰을 펼쳤다.

[왕선이 의자왕의 한을 풀겠노라며 백제를 선언한다고 합니다.]

임주의 지주들이 보낸 서찰이었다.

범세동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정말일까? 이건 진실일까?

액면 그대로 믿기에는 그동안 당한 것이 너무 많다.

...그러나 만약 사실이라면?

이 모든 악재를 극복할 수 있는 기가 막힌 한 수가 될 수도 있다.

범세동은 차분하게 이성을 다독였다.

생각. 생각해야 한다.

판단. 판단해야 한다.

그때 그의 눈에 서찰의 말미에 적힌 아주 작은 글자가 보였다.

...뭐지?

범세동의 눈이 가늘어졌다.

[좋냐?]

“!!!”

그리고

[삼봉 정도전]

“!!!”

범세동의 안색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으...”

대체 어디까지 농락당해야 하는가?

“으아아아아아!”

서찰을 갈기갈기 찢어 집어 던졌다.

< 67화 대동미륵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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