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흑묘백묘 >
혼비백산한 김성우의 온몸에는 자상이 가득했다.
지금도 나세의 위압적인 칼부림이 생생했다.
매 순간 절체절명이었다. 혼전의 발생으로 겨우 몸을 빼낼 수 있었다.
“장군. 괜찮으십니까?”
군사 범세동이었다.
김성우는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고 뒤를 돌아봤다.
...따르는 병력이 500명도 되지 않았다.
너무나도 참담했다.
...평생 올곧게 살아왔다고 자부했다. 아무런 사심도 없었다고 자신했다.
군웅할거가 개막된 이후 보령을 중심으로 충청도의 패권을 잡고자 노력한 것도 훗날 고려 왕실을 잘 보좌하려는 충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항상 입에 달고 다녔다.
...그런데 이게 무슨 꼴인가?
궁예의 후예로 몰렸고, 전투는 말할 수 없을 수준으로 대패했다.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범세동은 참한한 기색으로 말했다.
“장군. 아직 끝이 아닙니다.”
“······.”
“일단, 일단 보령으로만 돌아가면 됩니다. 그러면 방도가 생깁니다.”
맞다. 보령에는 아직 정예군이 남아 있다.
잘 규합하여 태세를 갖춘다면 반드시 기회가 올 것이다.
김성우는 이를 악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 겨우 임피와 충청도의 경계에 이르렀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 충청도의 경계입니다. 아무리 나세라도 넘어서는 건 부담스러울 겁니다. 무엇보다 왕선의 주력은 움직이지도 않았습니다. 이게 그 증거입니다.”
범세동은 나름의 분석을 한 것이지만 김성우는 그 말이 더 뼈아팠다.
...주력이 움직이지 않은 왕선에게 대패한 것이 아닌가?
범세동도 그걸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다.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만일 적군이 충청도의 경계를 넘어서면 지용기가 그냥 지켜만 보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서 주력군을 쉽사리 움직이지 못한 겁니다. 조금만 더 힘을 내십시오.”
“···움직입시다.”
김성우는 고통스럽게 읊조리듯 말하면서 몸을 움직였다.
범세동은 한숨을 쉬며 뒤를 따랐다.
그리고 지친 기색이 역력한 병사들도 힘겹게 발을 옮겼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탈주하는 병사는 늘어만 갔다.
그랬다. 김성우는 그 무엇보다 무서운 시간과 싸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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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김성우가 다시 퇴각을 시도했습니다.”
“나세는?”
“새로 전달한 작전대로 추격하고 있습니다.”
“잘됐군.”
“가끔 보면 참 지독하십니다?”
정도전이었다.
왕선은 어깨를 으쓱했다.
“김성우의 내부를 풍비박산 낸 군사가 할 말은 아닌 거 같구려.”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낸 겁니다.”
“하긴. 전쟁에 반칙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아. 도솔천의 표현법이라고 하오.”
“아. 소생 오늘도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깊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알면 됐소. 그나저나 범세동은 아군이 충청도를 범하지 못할 거로 생각하겠지?”
“물론입니다.”
정도전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지금 김성우가 의지할 곳은 충주의 지용기 뿐이지요. 이번에 살아남으면 그와 동맹을 체결하려고 하겠지요.”
“지용기라. 그의 개입을 막으려면 김성우가 살아 있어야겠지?”
“물론입니다. 아군으로서는 쓸데없는 확전을 막아야지요. 상대가 지용기라면 더 그렇고요. 아차 하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그렇지. 나세가 김성우를 죽일 뻔했으니까.”
“예. 참으로 절묘한 시점에 지용기가 군세를 정비한다는 소식이 전달됐으니까요. 그러고 보면 그 인사도 참 고약합니다. 슬쩍 숟가락을 걸치려고 하다니.”
“때마침 알았으니 됐소.”
“그건 그렇습니다. 그나저나 정말로 주공을 하늘이 많이도 돕는 거 같습니다?”
“하늘은 거들 뿐이오. 다 이 사람이 안배를 잘해둔 덕이라오.”
정도전은 입맛을 다셨다.
그 말대로 입을 댈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수가 있었으니까.
왕선은 빙그레 웃었다.
“자고로 승자는 눈을 밟아 길을 만들지만, 패자는 눈이 녹기를 기다리는 법이지.”
“······.”
정도전은 시선을 슬쩍 돌렸다.
“그나저나 어디까지 치고 가실 생각입니까?”
“너무 무리할 필요 없지요. 딱 우리 공세 종말점까지 가볼까 하오.”
“···공세 종말점?”
“아. 소화 가능한 북상? 뭐 그런 뜻이오.”
“한 번씩 보면 정말 희한한 단어를 쓰십니다.”
“도솔천의 단어라고 하지요.”
“아. 예. 그래서 그 공세 종말점을 어디로 보십니까?”
왕선은 시선을 하늘로 돌리며 아련하게 말했다.
“의자왕의 한을 내가 풀어볼까 하오.”
정도전의 표정이 진중해졌다.
“궁예를 버리고 견훤으로 갈아타시려고요?”
“거. 군사 앞에서는 농도 못하겠구려.”
“견훤이라. 나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음. 태봉국보다는 백제가 좀 더 낫지요? 소생, 주공의 넓은 뜻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이거 아무래도 아주 큰 말실수를 한 모양이다.
왕선은 멋쩍게 웃었다.
“···사과하리다.”
“일단, 임주(부여)를 도모하지요.”
“일단? 왜 일단이오? 그게 무슨 말이오? 거기가 끝이라니까.”
“의자왕이든 견훤이든 한을 풀어야 할 거 아닙니까?”
“···진심으로 사과하리다.”
“음.”
“이보시오.”
“하긴. 궁예 잡는데 견훤이 가장 적절하긴 하지요. 이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이때다.
잽싸게 말을 돌렸다.
“아. 남은은 여기로 오고 있소? 이번에 큰 공을 세웠는데 한번 봐야지.”
“불렀습니다.”
“아주 잘하셨소이다.”
“지금쯤이면 근처에 당도했을 겁니다. 데려오겠습니다.”
왜? 둘이서 작당 모의하려고?
죽음을 함께한 혁명 동지끼리?
“그러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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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 선생.”
“오. 남은. 왔는가?”
정도전은 방긋 웃으면서 남은을 반겼다.
“예.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말도 말게. 마음고생이 아주 많아.”
“허. 그렇습니까?”
“그렇다네.”
“하긴. 이토록 강성한 세력의 제일 군사를 맡았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내 꿈이 그런 게 아니라서.”
남은은 눈을 번뜩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대업의 주인. 왕 목사가 된 겁니까?”
정도전은 쓰게 웃었다.
“그게 좀 애매하네.”
“애매하다니요?”
“죽어도 고려 사람이 되고 싶다는군.”
“어째서요?”
정도전은 왕선에게 들은 말을 빠짐없이 남은에게 전했다.
“허.”
“어찌 생각하나?”
“삼봉 선생은요?”
“일단 지켜보는 거지.”
“새 나라의 주인이 될 재목은 맞습니까?”
“차고 넘치지.”
“대업을 이끌어갈 재목으로서 역량도 확실하고요?”
정도전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대업의 완성은 역성이 아니지 않은가?”
“물론입니다. 그 뒤가 더 중요하지요. 재상 총재제가 아닙니까? 그래야 민본이 가능하니까.”
“그렇지. 그런데 왕 목사가 용상에 앉으면 재상 총재제는 확실하지.”
“음. 그런데 왕 목사는 확고하다면서요?”
“세상을 뒤엎는 건데 하루아침에 결심할 수가 있나?”
다소 심드렁한 정도전의 어조.
남은은 날카롭게 물었다.
“음. 다시 묻지요. 결심하지 않으면요?”
정도전의 눈에 갈등이 생겼다.
남은은 지그시 쳐다봤다.
“솔직하게 말하겠네. 잘 모르겠네.”
“허. 삼봉 선생.”
“진심일세.”
“설마 현실과 타협하여 안주하신 겁니까? 따신 자리에 앉으니까 마음이 변했습니까?”
“이 사람. 나를 그렇게 보나?”
정도전은 슬쩍 웃으면서 말했으나 남은은 진중했다.
“···자네 진심인가?”
“예. 소생은 태어날 때 고려인이었으나 죽을 때는 아니고 싶습니다. 모르십니까?”
“하면, 자네가 직접 겪어보게.”
“겪어본 다음에는요?”
“어차피 왕 목사는 약관을 이제 막 넘었어. 설득할 시간은 아주 많아.”
“음.”
“재목만 확인해보게. 자네 눈으로 직접 보라는 말이네.”
“삼봉 선생이 갈등할 정도인지 말입니까?”
“그렇지. 그런 다음에 다시 논의하자고.”
“논의라.”
“주인을 제 자리에 앉히는 것도 책사의 역할이지. 안 그런가?”
“좋습니다.”
잠시 후
“어서 오게. 전주 목사 왕선일세.”
“남은이라고 합니다.”
왕선은 싱긋 웃으면서 남은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대로 지르기로 했다.
이미 정도전과 패를 다 주고받은 상황에서 숨길 필요는 없으니까.
“겪어보고 판단하시게.”
“예?”
“쥐새끼 잡는데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를 가릴 필요는 없지. 쥐새끼만 잡으면 되니까.”
“······.”
“민본을 이루기만 하면 되지 않겠나?”
남은은 헛웃음을 지으면서 옆으로 시선을 슬쩍 돌렸다.
정도전은 어깨를 으쓱하고 있다.
“흑묘백묘라.”
“그렇지.”
왕선은 말을 덧붙였다.
“주인을 제 자리에 앉히는 게 책사의 역할이지. 안 그런가?”
“······.”
“이렇게 하지.”
“말씀하십시오.”
“쥐새끼 잡는데 고양이 색깔이 중요하면 그렇게 하지.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그냥 가는 거로 하지.”
“···자신 있으십니까?”
“물론.”
“좋습니다.”
“그게 끝인가?”
“주공으로 모시겠습니다.”
“허락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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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 나세의 추격이 멈췄습니다.”
범세동은 안도하듯 말했다.
그러나 김성우는 쉽사리 안심하지 못했다.
“음.”
“여기부터 충청도입니다. 왕선은 절대 넘어서지 못합...”
그때였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김성우와 범세동의 눈은 충격으로 휩싸였다. 1천 명은 넘어 보이는 군사가 사방을 가득 메운 것이다.
가장 선두에서 약관 정도로 보이는 무장이 위압적으로 창을 휘둘렀다. 마천목이었다.
그리고
“역적! 김성우를 처단하라!”
잠시의 틈도 주지 않고 총진군을 명했다.
김성우는 칼을 빼 들고 최후의 항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김성우의 군세는 내부에서 무너졌다.
뒤를 따르던 병사들이 병장기를 버리고 항복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 장군!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군사도 따르시오!”
김성우는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르며 돌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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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정신을 차린 김성우는 주변을 살폈다.
칠흑 같은 어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혼전의 와중 몸을 피하다가 여기까지 온 모양이다.
“군사!”
범세동을 찾았다.
그러나 아무런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김성우는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켰다.
그때
“잘 잤소?”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김성우는 기겁하여 사방을 살폈다.
하지만, 아직 안력이 어둠에 적응하지 못했다.
“누, 누구냐?”
“사방이 난리가 났는데 정말 잘 자더군. 코까지 골면서? 천하 태평하시오?”
목소리는 가까워졌다.
김성우는 경계를 놓이며 칼을 찾았다.
그러나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누구냐고 물었다!”
“내가 누구냐고?”
실로 기분 나쁜 목소리.
스산한 기운이 온몸을 잠식했다.
그 순간 묘한 소리가 귀로 울렸고
“옴마니 반메홈. 옴마니 반메홈.”
사방에서 횃불이 치솟았다.
“!!!”
김성우는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났다.
바로 코앞에서 비릿하게 웃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그리고
“궁예 새끼?”
김성우의 눈이 부릅떠졌다.
“대, 대체 내게 무슨 원한이 있어서 이러는 것이냐?!”
“나는 임주를 점령할 것이다.”
“!!!”
“해서, 의자왕의 한을 풀 것이다.”
“!!!”
“이만 하면 답이 되었는가? 궁예 새끼?”
김성우의 눈이 충격으로 휩싸였다.
그리고
-퍼억!
다시 기절했다.
“천목아.”
“예. 형님.”
“잘 포장해서 보령으로 보내. 흠집 안 나게.”
“포장이라고 하셨습니까?”
“황금색 법복 입히고, 안대도 하나 걸치게 하고.”
“철퇴도 하나 둘까요?”
“훌륭하군.”
“알겠습니다.”
“아. 범세동은?”
“진작에 잡혔습니다.”
“지금은?”
“···군사와 함께 있습니다.”
“맙소사.”
왕선은 범세동의 정신건강이 걱정됐다.
명복을 빌어줄 정도로.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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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정신을 차린 범세동의 눈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누, 누구요?”
“······.”
아무런 답변이 없다.
범세동은 목울대로 마른침을 넘기면서 뒤로 물러났는데 그제야 제대로 모습이 보였다.
“나, 남 부관이 아닌가?”
“······.”
“자네 무사했었나? 참으로 다행이군.”
범세동이 안도한 듯 웃었다.
그러자
“허. 삼봉 선생. 이 새끼 웃는데요?”
“미쳤네.”
꿈에서도 듣기 싫은 목소리.
범세동의 안색은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 66화 흑묘백묘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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