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나세가 너무 많아(작가이벤트 마지막 날) >
분위기는 흉흉했다.
“왜, 왜 이러는 거요?”
“······.”
“이걸 다 가져가면 우리는 뭘 먹고 삽니까?”
“······.”
백성들은 하소연하듯 따졌다.
그들의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얼마 전 매몰차게 병사들을 내칠 때와는 달랐다.
그랬다. 지금은 전과 달리 김성우의 병사들이 창칼을 앞세워 겁박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약탈부대였다. 이때 섣불리 나서면 곧장 황천길로 갈 수 있다.
“어서 서둘러라.”
“알겠습니다.”
김 부관의 명령을 들은 병사들은 쌀을 옮겼다.
백성들의 눈에는 절망만 실렸다.
그때였다.
-쏴아아아아앙!
날카로운 파공음이 울렸고
-퍼어어어어억!
명령을 내리던 김 부관의 목이 단번에 관통됐다.
연신 바쁘게 움직이던 병사들과 통곡하던 백성들 모두 눈만 껌뻑였다.
묵직한 충격.
너무나도 놀라서 말문이 막혔을 정도였다.
“······.”
“······.”
김 부관의 최후는 너무나도 참혹했다.
목이 관통된 수준이 아니라 아예 박살 났다.
...한 자루의 창으로 인해서.
모든 사람의 목이 천천히 창이 날라온 방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실로 거대한 위용을 보이는 장수가 보였다.
...누굴까?
그리고 그의 오른손에 날이 시퍼렇게 선 언월도가 있었다.
...언월도?
병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 나세?!”
비명과도 같은 외침.
절망만이 담긴 외침.
그 순간
“전군!”
장내를 단번에 장악하는 외침.
“적을 도륙하라!”
그러자 사방에서
-와아아아아아아!
곧장 함성이 일었다.
나세는 언월도를 고쳐잡고 곧장 내달렸다.
약탈을 하던 병사들은 기겁하여 물러났다.
그러나 나세의 언월도는 피할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사방은 평정됐다.
백성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나세를 쳐다봤다.
“나세 장군이시다!”
백성들이 환호했다.
“우리의 위타천이시여!”
고려의 숙장 나세가 아닌, 백성의 위타천 나세가 분명하게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이로써 구도는 더욱 명확해졌다.
백성을 약탈하는 궁예와 백성을 구하는 왕족.
백성을 괴롭히는 지주와 손을 잡은 궁예.
그리고 지주를 때려잡는 대동법을 시행한 왕족.
김성우를 규탄하는 민심은 들불처럼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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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들의 사기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하락했다.
최악의 수. 약탈을 시도했는데도 군량은 제대로 구하지도 못했다. 신출귀몰하게 나타나는 나세에게 패배만 거듭했다.
더욱이 가뜩이나 싸늘했던 민심이 완벽하게 등을 돌리면서 김성우의 군세는 수렁에 빠졌다.
범세동은 정신을 똑바로 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양 손바닥에는 쉬지 않고 땀이 차올랐다.
“대, 대체 이게 무슨 경우란 말인가.”
그래. 전장이다. 적과 조우할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떻게 7할 이상이 그렇다는 말인가?
이게 대체 무슨 조화란 말인가?
“군사님.”
굳은 표정의 남 부관.
“무슨 일인가?”
“탈주병이 늘고 있습니다.”
“경계를 강화하게.”
“···경계병들이 앞장서서 도주하고 있습니다. 병사들이 경계를 서는 걸 기다릴 정도입니다.”
“뭐?”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
범세동은 한숨을 쉬었다.
그동안 사기가 떨어졌을지언정 탈주병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이건 김성우에 대한 부관들의 전폭적인 지지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진정한 강군은 부관들의 힘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김성우가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여러 가지 요소 중 하나가 바로 부관들의 신망을 얻은 것이었다. 그런데 최근 약탈을 진행한 이후 분위기가 급반전했다.
...철옹성 같던 부관들의 신뢰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걸 의미했다. 궁예로 낙인찍힌 상황에서 부관들이 제대로 병사들을 통제하지 않으면 더 볼 것도 없다.
범세동은 이를 악물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제 하루면 김제에 도착한다.
...그런데 이런 상태로 싸울 수는 있을까?
머리를 세차게 저었다.
다시 부관들을 단속해야 한다. 김성우 장군이라면 능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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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관들은 긴장감을 숨기지 못했다.
김성우가 모두 소집했기 때문이다.
최근 급증하는 탈주병의 책임소재를 따지면 절대 자유로울 수 없는 신세가 아닌가?
“장군. 찾으셨습니까?”
김성우는 차분한 눈으로 부관들을 쳐다봤다.
“요즘 나를 둘러싸고 말들이 무성하더군.”
“소, 송구합니다.”
“병사들은 몰라도 자네들은 나를 믿어야지. 나와 백전을 함께 한 자네들이라면. 나 김성우를 믿어야지. 안 그런가?”
“소, 송구합니다.”
김성우는 품에 있던 안대를 꺼냈다.
부관들의 눈에는 동요가 일었다.
“이거 때문에 나를 의심하나?”
“그, 그것이···.”
김성우는 거칠게 안대를 잡아서 찢었다.
“자, 장군.”
“내가 진정 궁예의 후예라면 신물이라고 불리는 이걸 찢을 수가 있겠나?”
“송구합니다.”
“적들의 계책에 넘어가면 어쩌자는 건가?”
부관들은 고개를 숙였다.
“소인들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이를 처음 입에 담은 사람이 누구인가?”
“실은 소인이 일전에 봤습니다.”
남 부관이었다.
“그래서?”
“...김 부관에게 말했는데 그가 흘리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김 부관?”
“예. 얼마전에 전사했습니다.”
...더 추궁하기도 어려운 상황.
김성우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지난 일은 묻지 않을 것이네. 그러나 앞으로 또 병사들의 동요를 내버려 둔다면 용서치 않을 것이야.”
옆에서 지켜보던 범세동은 흡족하게 웃었다.
과연 김성우다. 부관들의 동요를 완벽하게 막은 것이 아닌가?
이제 남은 건 곧장 진군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세를 공격할 것이다.”
“장군. 김제로 진군하시지 않고요?”
“군사. 나세가 배후에서 저렇게 날뛰고 있소. 자칫 잘못하면 적에게 포위당할 수도 있소. 전열을 가다듬은 지금 나세를 제압하는 게 옳소.”
맞는 말이었다. 수시로 배후를 타격하는 나세였다.
그를 제압하지 않고 김제를 공격하는 건 사실상 무리였다.
범세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하겠습니다.”
“아니외다. 내가 직접 갈 것이오. 군사는 이곳에 남으시오.”
“아니 장군께서 직접 가십니까?”
“그렇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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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 김성우가 진군을 멈췄습니다.”
“알겠네.”
나세는 언월도를 고쳐잡았다.
“미리 일러둔 대로 움직이도록.”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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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 나세의 군사가 익주 방면에서 나타났습니다.”
김성우는 칼을 고쳐잡으면서 출정했다.
그런데
“장군. 나세의 군사가 서해 방면에서 나타났습니다!”
“뭐라? 하면, 익주 방면에 있는 적은?”
“예?”
“익주에 나세가 나타났다. 해서, 공격에 나선 것이야.”
부관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소인이 행한 정찰에 의하면 나세는 분명히 서해 방면에 있었습니다.”
“확실한가?”
“예.”
그때
“장군!”
다급한 부관의 외침.
“익주 방면에 있던 적군이 사라졌습니다!”
“뭐?”
“흔적을 보면 서해 쪽으로 이동한 거 같습니다.”
“허. 어처구니가 없군.”
김성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진군로를 바꾼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장군!”
“무슨 일인가?”
“나세의 군세가 자취를 감췄습니다.”
“뭐라?”
그때
“장군!”
“무슨 일인가?!”
“나세의 군세가 익주쪽에서 나타났습니다!”
“뭐, 뭐라?”
김성우는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기병이라고 할지라도 두 지역을 이렇게 빨리 이동할 수는 없다.
그건 단기필마라도 불가능하다.
“확실히 나세가 맞나?”
“예!”
“근거는?”
“언월도를 가진 장수. 나세가 확실합니다.”
김성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거 아무래도 적의 계책에 농락당하는 거 같군.”
“예?”
“둘 중 한 명은 위장이야.”
“하, 하면···.”
“바꿔말하면 고작 300명의 기병이 반으로 나뉘었다는 거지.”
김성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즉시 본진에 알려서 지원군을 보내라고 하게. 양쪽으로 동시 진군하여 격멸할 것이야.”
“예. 장군.”
서해와 익주방면으로 각각 500명의 군사가 진군했다.
“장군! 동쪽에서 나세가 나타났습니다!”
김성우가 있는 서해 쪽에 나세가 있었다.
이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처럼 뛰어난 숙장을 상대하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제 끝을 볼 때가 됐다.
그런데
“장군! 서쪽에서 나세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장군! 북쪽에서 나세가 나타났습니다!”
또 그리고
“장군! 남쪽에서 나세가 나타났습니다!”
사방에서 나세의 출몰을 알렸다.
김성우의 눈이 혼란에 휩싸였다.
그리고
“장군!”
다급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
“이, 익주 방면에서 나세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나세는 여기도 많아! 확실한 보고를 가져오게!”
“그, 그것이···.”
김성우는 불안함이 치밀어 올랐다.
“어서 말하게!”
“이, 익주의 군사가 대패했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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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는 말 그대로 개판이었다.
완전하게 농락당한 거다.
무려 2천의 군사가 300명에 불과한 나세에게.
기세 좋게 출병한 김성우는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고 돌아왔고, 익주로 진군한 500명은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그나마 군세를 유지한 마지막 끈.
명장 김성우.
그 이름까지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그동안 쌓였던 불신, 불안함 등 백 가지 감정이 폭발했다.
김성우는 굳은 표정으로 병사들을 쳐다봤다.
모두 시선을 피했다.
너무나도 참담했다. 피가 새어 나올 정도로 이를 꽉 물었다.
저들의 사기를 다시 끌어 올려야 한다.
-차앙!
김성우는 칼을 빼 들었다.
병사들은 흐리멍덩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아직 전투는...”
“저, 저기 누가 오고 있다!”
김성우가 결기를 다지고자 말을 꺼냈는데 웅성거림이 일었다.
이건 사기와 군율이 얼마나 엉망인지 보여주는 단편이었다.
그새 단기필마가 다가왔다.
이옥이었다.
-쏴아아아아아앙!
-퍼어어어어어억!
여지없이 화살을 날렸다.
“···장군.”
김성우의 눈이 흔들렸다. 일전의 일이 떠오른 탓이다. 당장이라도 이 서찰을 찢어 버리고 싶다. 그러나 병사들 앞이다. 지금은 절대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가져오게.”
김성우를 거칠게 서찰을 펼쳤다.
그런데
[귀신같은 책략은 하늘의 이치를 다했고
오묘한 꾀는 땅의 이치를 깨우쳤네.
싸움에서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
만족함을 알고 그만두기를 이르노라.]
“!!!”
이 시가 뜻하는 바는 하나뿐이다.
...속았다.
머릿속이 터질 듯 아팠다.
그런데 서찰의 끝에 작게 적힌 글자가 있다.
김성우의 시선이 홀린 듯 옮겨졌다.
[궁예의 후예. 왕선]
“!!!”
김성우의 눈이 거세게 떨렸다.
서찰을 잡은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속은 거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당한 거다.
억겁의 분노가 치밀어 올라왔다.
머릿속이 너무 뜨거웠다.
손발이 어지럽다. 그 순간 몸이 크게 휘청였다.
“자, 장군!”
“다, 당장 총진군하시오!”
“장군!”
“여기 보시오! 왕선이 스스로 궁예의 후예임을 밝혔소!”
“장군! 그건 왕선의 계략에 불과합니다. 격장지계입니다!”
김성우는 미친 듯 고함을 질렀다.
범세동이 만류했으나 소용없었다.
궁예로 몰리면서 흔들렸던 김성우의 이성이 완벽하게 무너진 것이다. 아니, 망가졌다.
그리고 두 사람을 쳐다보는 병사들의 눈빛은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제와서 왕선이 궁예의 후예라며 고함을 지르는 김성우의 모습은 참으로 우습기 짝이 없었다.
그때 김성우는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쳤다.
...평범한 병사에 불과한데 왠지 모르게 낯이 익다.
...어디서 봤더라?
그 순간 그가 다가왔다.
김성우는 가슴이 울렁였다. 자기도 모르게 한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그가 다시 다가왔다.
“멈춰라!”
“오랜만이군.”
실로 건조한 목소리.
그리고 갑자기 달려들면서
-차아아아아아아앙!
칼을 빼 들어서 휘둘렀다.
대경한 김성우가 힘겹게 막았다.
-차아아아아아아앙!
엄청난 힘.
김성우는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칼을 고쳐잡으면서 병사를 똑바로 노려봤다.
“!!!”
“이제 정신을 차렸나? 역도 김성우.”
“나, 나세?! 어, 어떻게 여길?”
“그건 저승에서 물어봐라.”
나세는 매섭게 압박했다.
범세동은 충격에 휩싸였다.
대체 나세가 어떻게 여기에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당장 장군을 도와서 나세를 제압하라!”
그러나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방관자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범세동이 노하여 칼을 빼 들었다.
“지엄한 군율로서 모두 벌할 것이다!”
그런데
-와아아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아!
군마의 말발굽과 함성이 들렸다.
범세동의 시선이 다급하게 옮겨졌다.
“!!!”
나세의 기병이 돌격을 감행하고 있지 않은가?
“이, 이런 미친놈들!”
아무리 기병이라도 몇 배나 많은 상대에게 돌격하다니!
그때였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아악!
주둔지 사방에서 창칼이 난무했다.
“역도 김성우를 죽이고, 왕족 전주 목사에게 항복할 자는 나를 따르라!”
중요 부관들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난 것이다.
범세동의 눈은 충격과 절망으로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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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구의 시체 위로 혈향이 가득했다.
나세는 고개를 뒤틀면서 몸을 움직였다.
그때 피칠갑을 한 그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남 부관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나세는 옅게 웃었다.
“자네 덕에 일이 수월했네.”
“과찬이십니다.”
“과찬은. 자네가 아니었다면 김성우의 병사 이동 경로도 몰랐고, 내가 이렇게 잠입하지도 못했을 건데.”
“그래도 아쉽습니다. 이참에 김성우를 죽였어야 했는데.”
“어쩔 수 없지.”
“하면, 곧장 추격하실 겁니까?”
“그래야겠지.”
“소인은 항복한 병사들과 부관들을 다독여도 되겠습니까?”
“그래야지. 응당 그래야지.”
나세는 남 부관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나저나 자네 솜씨가 참으로 대단해. 이 정도까지 완벽하게 김성우의 내부를 흔들어댈 줄은 몰랐거든.”
“외부에서 압박하는 장군의 언월도 덕분에 일이 더 수월했지요.”
“과찬일세. 남 부관. 아. 이제 부관이 아니군.”
“편히 부르십시오.”
나세는 그의 어깨에 힘을 주면서 시원하게 웃었다.
“그러지. 남은.”
남은은 진한 미소를 지었다.
< 65화 나세가 너무 많아(작가이벤트 마지막 날)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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