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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61화 (61/187)

< 61화 번뇌(작가이벤트 4일차) >

지주들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정도전을 찾아댔다.

“또 왔소?”

“하하. 무탈하셨습니까?”

“우리 어제 봤소만?”

“하하. 그렇지요. 자주 봐야지요.”

“적당히 찾아오시오.”

“험험. 군사. 이제 우리도 목사 나리의 수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요?”

“그 대동법 세율을 어떻게 좀 해주면 안 됩니까? 1결당 500두는 너무 과합니다.”

정도전은 단호하게 답해줬다.

“안 되오.”

그러자 함께 온 지주가 혼을 내듯 말했다.

“이 사람아. 정신 차리게. 군사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삼봉 군사 맞지 않나?”

“이제 한 식구가 됐는데 제대로 격식을 차려야지.”

“쉽게 말하게.”

“군사가 아니라 응당 교주님이라고 불러야지.”

“아.”

“밀교 교주님이 아니신가.”

정도전의 미간이 씰룩였다.

수염은 부들부들 떨렸고.

“송구합니다. 교주님.”

“...당장.”

“교주님. 이 사람들의 청을 잘 한번 생각해봐 주십시오.”

“...당장.”

“예?”

“꺼지게.”

정도전은 찬바람을 풀풀 날리며 등을 돌렸다.

“교, 교주님!”

“한 번만 더 나를 교주라고 칭하면 경을 칠 것이야.”

“그, 그러면 뭐라고 부릅니까?”

“하. 꺼지게.”

정도전은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험악한 눈빛으로 지주들을 쏘아봤다.

“험험.”

눈치를 살피던 지주들은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며 물러났다.

“어처구니가 없군.”

가뜩이나 고민 많은 나날이거늘.

그때 바쁘게 오가는 이옥이 보인다.

“장군.”

이옥은 흠칫하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군사께서 계셨군요.”

“내가 관청에 있는 건 당연하오만.”

“...그렇지요.”

“전민변정도감은 어떻소? 잘 돌아가오?”

“아. 네. 뭐.”

이옥이 겸연쩍게 답하자 정도전은 딱 잘라서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장군을 전민변정도감의 책임자로 임명한 건 공사의 구분을 못 한 거요.”

“···군사.”

“당신에게 작은 호의를 베푼 거라는 걸 명심하란 말이외다.”

“···알고 있습니다.”

생부가 신돈의 당여였던 이옥과 스승이 신돈에게 숙청당한 정도전.

선대의 악연으로 인해서 앙금 아닌 앙금이 있던 두 사람이었다.

이에 정도전은 신돈의 숙원사업이었던 전민변정도감의 책임자로 이옥을 지명했다.

그러니까 제 손으로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를 풀 기회를 준 것이다. 또, 그의 마음속을 보듬어 준 것이기도 했다.

“나는 말이외다. 이걸로 선대의 일이 주공께 결례가 되지 않기를 바라오만?”

“그간의 결례를 용서해주십시오.”

“말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하더이다. 그런데 나는 그것보다 쉬운 게 없다고 생각하오. 세상에 말로 하는 것보다 쉬운 게 어디 있소?”

이옥은 주춤하더니 고개를 숙였다.

“그간의 결례를 용서해주십시오.”

그제야 정도전의 표정이 풀렸다.

“군부의 위계는 천금보다 귀하오.”

“···명심하겠습니다.”

“좋소. 그대를 믿어보지.”

“감사합니다.”

“그게 끝이오?”

평소 덤벙거리고 허술해 보이지만 공무에서는 허투루 하는 일이 없는 정도전이다. 그러니까 전민변정도감의 진척상황을 보고하라는 말이었다. 이옥은 목을 가다듬으면서 말했다.

“김제, 부안에서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의 사연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건 당연한 일이오.”

“사연을 속여서 노비의 신분을 벗고자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어찌했소?”

“노비가 양인이 되면 좋은 일이 아닙니까?”

“···틀렸소.”

“예?”

“주공께서 가는 길은 세력의 이합집산이 아니라 민심을 움직이는 정도 중의 정도라고 할 수 있소. 거기에는 작은 부정이나 트집잡힐 만한 사안이 절대 있어서는 아니 되오. 때로는 그것이 세력의 확장에 도움이 되더라도 말이외다.”

이옥의 얼굴은 시뻘게졌다.

“송...구합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됐소. 그리고 억울하게 노비가 되었음에도 생계가 막막하여 신분을 유지하려는 자들이 있을 건데?”

“···그렇습니다. 해서, 그들은 그대로 두기로 했습니다.”

“허.”

“···왜 그러십니까?”

“모두 신분을 복권하시오.”

이옥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정도전은 단호하게 말했다.

“대동미를 낸 지주들이 노비를 잘도 건사하겠소?”

“······.”

“그들의 생계는 이미 지주들의 손을 떠났소.”

“방법이 있습니까?”

“만들어야지. 그리고 만들어질 거요.”

“그런데 조금 전에 이르신 대로 하면 원래 노비 출신들은 어찌 됩니까? 그들 역시 지주가 책임지기는 어려운 실정이 아닙니까.”

“내 말이 그 말이오. 지주는 알아서 노비를 처리할 거요. 그때 나서면 되오. 그게 가장 정도요.”

“···생각이 짧았습니다.”

“됐소. 본래 장군은 군부의 인물. 처음 접하는 일인데 실수할 수도 있소.”

정도전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언제라도 의문이 있으면 찾아오시오.”

“그리하겠습니다.”

이옥은 공손히 고개를 숙인 뒤 물러났다.

정도전은 숨을 내쉬면서 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고 했다.

“역시 대단하오.”

어디선가 들리는 목소리.

그 주인은 지금 정도전에게 번뇌를 내린 사람. 왕선이었다.

정도전은 쓴웃음을 지었다.

“주공.”

왕선은 뒷짐을 진 채 빙그레 웃었다.

“이옥을 이렇게 제압하다니. 그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면서 실력으로 완벽하게 옥죄운 게 아니오? 과연 대단하오. 내가 진실로 감탄했소이다.”

진심이었다.

그런데

“그렇습니까?”

어?

왕선은 눈을 껌뻑였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어? 당신 미쳤어?

왕선은 입을 벌린 채 쳐다봤다.

“하면, 소생은 물러가 보겠습니다.”

어? 다, 당신 정도전 맞아?

미쳤어? 내일 죽을 예정이야? 아닌데? 아직 수명 많이 남았는데?

왕선의 손은 정도전의 등을 향해서 허우적거렸다. 허공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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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은 밤하늘을 쳐다보면서 술잔을 기울였다.

“술맛 좋군.”

“거. 그 좋은 걸 왜 혼자만 먹소?”

느닷없이 나타난 방해꾼.

정도전은 한숨을 쉬었다.

“오셨습니까?”

“합석해도 되겠소?”

“···물론입니다.”

“오늘은 내가 얻어먹고, 다음에는 내가 대접하리다.”

“그러시지요.”

왕선은 정도전의 눈치를 슬쩍 살피면서 자리에 앉았다.

“요즘 많이 바쁘오?”

“일이 많습니다.”

“조익신의 일에 대해서 상의할 게 있는데.”

“그 간사한 인사가 하면 뭘 하겠습니까?”

“짐작하고 있었소?”

“세세한 내용은 모릅니다. 다만, 주공께서 그를 덫으로 밀어 넣었다고 짐작할 뿐이지요.”

“해서, 그 세세한 내용을 논의하려고 하오.”

“예.”

짤막한 대답.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왕선은 속으로 쓰게 웃으면서 술 한잔을 걸쳤다.

...지금 정도전과 조익신의 일을 논의할 상황은 아니라는 게 확실해졌다.

그동안 미루고 미뤘으나 씨앗을 뿌리기는 했다. 어쩌면 오늘 확실하게 매듭지어야 할지도 모른다.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재상 총재제는 생각해봤소?”

“예.”

“음. 말을 조금 정정하리다.”

“예. 왕족이 실권을 잡는 재상 총재제.”

정도전은 술잔을 들이키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참 별로인 거 같습니다.”

“군사.”

“소생은 그런 세상을 보고자 출사한 것이 아닙니다.”

“···군사.”

“소생의 뜻은 다 전한 거 같습니다만.”

“군사. 나는 왕족이외다. 뿌리를 타고 올라가면 태조께서 계시오.”

“한 황실의 후예인 유비가 세운 촉한이 유방의 한나라와 같습니까?”

“군사.”

오늘따라 정도전의 얼굴색은 온후한 빛이 서려서 엄중해 보였다.

“소생이 평생 유학을 정진하며 마음을 갈고 닦아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오랜 세월 전해진 성현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백성의 현실과 비교하고 또 비교하며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소생의 세월이 오늘에 이르는 동안 어찌 마음에 갈등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대동에 취하니 모두 허사가 되었습니다.”

정도전의 표정은 무서우리만큼 담담했다.

그러나 눈빛에는 열망이 넘쳤다. 아니, 정확하게는 무언가를 갈망하는 기대였다.

...그 무언가를 파악하는 건 참으로 쉬웠다.

-나는 당신이 대업의 주인이 되어주길 바랍니다.

그랬다.

-나는 당신이 이 땅 전체에 대동의 민본을 뿌리길 바랍니다.

지금 정도전은 자신이 내린 결론. 이 나라 고려는 희망이 없다는 확신을 담아서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해서, 나는 당신이 대풍가로 화답해주길 바랍니다. 한 고조 유방이 창업을 결심하고 지었다는 그 대풍가 말입니다.

처음 정도전을 품었을 때 궁금했다.

지금 이 사람이 역성을 고민하고 있을까?

해서, 수차례 들여다봤다.

[대업을 이룰 것이다.]

대업은 무엇일까?

[민본이야말로 대업이다.]

모호했으나 역성이라는 단어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단언할 수 없다.

속에서조차 역성의 흔적을 완벽하게 지운 채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해서, 재상 총재제를 꺼내면서 그의 속을 알고자 했다.

그리고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됐다.

...정도전은 이 나라 고려에 아무런 미련도 없었다.

역성을 해답으로 찾은 것이다. 그리고 우습게도 역성의 주인이 또 다른 왕씨 왕선이었다.

이 무슨 기괴한 일이란 말인가?

왕선은 정도전의 뜨거운 눈을 피할 수가 없었다.

만일 피한다면 어떤 말을 하기도 전에 이 자리는 마지막이 될 것이니까.

일렁이는 마음을 힘겹게 다잡았다.

속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물끄러미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죽는 그 순간 하늘을 바라봤을 때 단 하나의 부끄럼도 없기를 바라오. 하지만 그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아오. 한시도 빠지지 않고 바람이 불어대니까. 그럴 때마다 나는 무척이나 괴롭소. 보름달의 곁을 지키는 별이 되고자 했으나 보름달이 아니라 반달, 초승달만이 있다는 걸 보게 해주니 말이오. 그러나 그 과정을 괴로워하기만 하지 않기로 했소. 하여, 나의 길을 가고자 하오. 마음을 고쳐 잡으니 마침내 그 바람은 나를 흔들어대는 게 아니라 위용 찬 보름달 곁을 지키는 별의 자리로 가게 해주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소. 지금 내게 부는 이 바람처럼 말이외다.”

불타듯 뜨거웠던 정도전의 열기는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차가운 적막감만이 두 사람을 감싸며 묵직하게 내렸다.

왕선은 고저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떠날 것이오?”

그러나 답이 없다.

“민본을 외치는 미륵. 아직 그건 유효하오. 앞으로도 자신 있고.”

“···죽는 날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까?”

“그렇소.”

정도전은 밤하늘을 바라봤다.

“소생은 죽는 그 순간 술잔이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느닷없는 말. 그러나 담긴 뜻이 어찌 없겠는가?

“···술 너무 좋아하지 마시구려. 몸 상하오.”

“송구합니다. 소생은 이거 없으면 못 삽니다.”

“신념과 술 중에 고르라면?”

“술을 마시면서 신념을 품을 겁니다.”

“민본을 품으려면 백성도 만나야 하는데 술을 그렇게 좋아해서야.”

“백성은 위정자를 어려워합니다. 물어도 말하지 않지요. 그런데 이 술이라는 건 참으로 희한합니다. 한잔, 두잔 같이 걸치다 보면 속에 담긴 말을 다 꺼내게 해주지요. 맞습니다. 술이야말로 민본으로 가는 가장 거룩한 신물이자 지름길이지요.”

“무슨 말인지 아오. 다만, 술 먹다가 비명횡사할까 봐 그런다오. 세상이 흉흉하다 보니.”

“그게 소생의 꿈입니다. 술 먹다가 죽는 거.”

...당신 진짜 그렇게 죽었어. 물론 이번은 아니겠지만.

반드시 내가 막겠지만. 그러니 내 곁에 있어.

“왜 술 먹다가 죽는 게 꿈인지 아십니까?”

“모르겠소.”

“죽을 만큼 술을 많이 마실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이 땅이 풍족하다는 겁니다. 해서, 소생은 술을 좋아합니다. 소생이 가진 재물과 무관합니다. 비축된 술의 양이라는 건 백성이 추수한 곡식의 수량과 직결하는 것이니까요.”

“···대체 무슨 말이오?”

“개똥 같은 말이었습니다.”

이 순간에도 정도전은 참으로 진중했다.

“이 지역 술맛이 나쁘지만은 않은 거 같습니다. 아니군요. 솔직히 맛이 아주 좋습니다.”

“···그렇소?”

“요즘 주공께서 만드신 대동주에 제대로 취했거든요.”

대동주.

대동법을 빗댄 말이었다.

“물론 대동주 맛이 떨어지면 다른 솜씨 좋은 술집을 찾아볼 겁니다.”

“내가 변한다면 목을 취하라고 약조했소이다.”

“예. 그래서 소생에게 전권을 내리셨지요.”

“이렇게 재상 총재제를 해봅시다.”

정도전은 술을 권하자 왕선은 기분 좋게 받았다.

“조익신 말이외다.”

“예.”

“실은 그것이···.”

이어지는 왕선의 말.

한참 듣기만 하던 정도전이 헛웃음을 지었다.

“이거 소생의 생각보다 판이 아주 큽니다?”

“뭐.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소?”

“군부의 반응이 궁금하군요.”

“어려울 건 없을 거요.”

“글쎄요.”

정도전은 덤덤하게 웃으면서 은근하게 말했다.

“아. 혹시나 해서요.”

“무슨 말이오?”

“노파심입니다.”

“말 돌리지 말고.”

“제갈량은 촉한을 끝내 지켜내지 못했지만, 소생은 다를 겁니다.”

“군사.”

“장담하지요. 최소한 500년을 갈 겁니다.”

귀신이네. 그건 어떻게 알았을까?

“언제라도 대풍가를 부르고 싶거든 꼭 소생을 찾아주십시오. 반드시 소생이 첫 번째이길 바랍니다.”

“대풍가는 모르겠고 태평가가 더 울려 퍼지길 바라오만.”

“예.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백성의 입에서 나오는 태평가가 주공의 입에서 대풍가로 바뀌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니까요. 자고로 민심을 흐름은 개인이 거스를 수는 없는 겁니다.”

끈질긴 사람이다.

하긴. 이러니까 나라를 창업했겠지.

“그래서 태평가가 더 커지게 하려고요.”

“뭐 하려고?”

“날이 밝으면 상인을 좀 만나볼까 합니다. 멈출 수 없는 내일을 위해서요.”

“멈출 수 없는 내일이라. 멋진 말이오.”

“과찬입니다.”

< 61화 번뇌(작가이벤트 4일차)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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