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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59화 (59/187)

< 59화 기침소리(작가이벤트 2일차) >

김제는 충격에 휩싸였다.

김제 최고의 실력가로 군림했던 조익신이 백주에 두들겨 맞은 거다. 사실 두들겨 맞았다는 표현도 우습다. 나세의 언월도가 휘둘러진 횟수는 한번 이었으니까.

이로써 김제, 부안의 지주들은 드디어 사태 파악을 정확하게 할 수 있었다. 왕선은 일체 타협의 의지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는 사전 1결당 500두에 이르는 상상을 초월하는 대동미를 납부해야 한다는 충격적인 사실로 귀결됐다.

바야흐로 김제와 부안에 지주들의 불지옥이 펼쳐진 것이다.

한편, 백성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조익신이 실신한 채로 실려 가던 모습을 풍자했다. 이는 그동안 김제의 유력가가 얼마나 민심을 잃었는지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민심은 미친 듯이 미륵의 선정을 연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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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이렇게 일 띄엄띄엄할 거요?”

정도전은 왕선의 말 한마디에 기분 상해버렸다.

“무슨 말씀입니까? 바빠서 숨 쉴 시간도 부족한데.”

“더 바빠야지.”

“하고 싶은 말씀이 뭡니까?”

“얼마 전에 지주들이 농민의 처우로 단합하려고 했소. 모르시오?”

“소생이 그걸 어찌 모릅니까? 나세 장군이 서슬 퍼런 언월도를 휘두르면서 지주들을 단속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겁니다.”

“음. 대동법 집행은 나세 장군에게 맡길 생각이시오?”

“일을 분담하는 거지요. 소생의 일이 어디 그뿐인 줄 아십니까?”

정도전은 상당히 까칠했다.

왕선은 적당히 갈구기로 했다.

“사전 1결당 쌀 500두. 토지의 생산량을 상회하는 막대한 대동미를 부과한 건 그들이 전호에게 부담을 넘기려는 모략질을 차단하려는 것이기도 했소만.”

“그런데도 그들은 농민의 생존으로 우리를 겁박하려고 했지요. 딱 수준과 바닥을 확인한 겁니다.”

“내 말이 그 말이오. 언제라도 그들은 백성을 괴롭히지 않겠소?”

“···조금 기다려 보십시오. 일이 하루아침에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오. 과연. 백성을 위한 대책을 수립하자는 내 의도를 정확하게 알고 있구려?”

“예.”

“그런데 과정과 결과가 영 아름답지는...”

“조금 전에 기다려 보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오?”

정도전은 한탄하듯 하늘을 쳐다봤다.

“그건 뭐요?”

“주인 복이 없는 팔자를 한탄한 겁니다.”

“이보시오.”

“박자청이라고 했지요?”

“그 사람은 왜 찾소?”

“소생이 좀 데려다가 써도 됩니까?”

“뭐 하려고?”

“구리와 쇠를 좀 제대로 구해볼까 합니다.”

“몰래? 재산 증식하려고?”

정도전은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구리와 쇠는 백성들도 사사롭게 제련, 주조합니다.”

“그렇긴 한데, 군사가 금은을 채굴할지 누가 아오?”

“눈치채셨으면 좀 눈감아 주십시오. 안 그래도 박봉인데 뒷주머니를 좀 챙겨야지요.”

“음. 나도 그러고 싶긴 한데 박자청은 좀 바쁘오. 얼마 전에 도착해서 곧장 똥통을 만들고 있소. 들어보니 일손이 부족할 지경이라던데.”

정도전은 볼을 긁적였다.

“그건 압니다만 농기구도 만들고 병장기도 만들려면 박자청이 필요합니다.”

“정확하게 말해보시오. 박자청이 무슨 역할을 하는 거요?”

“소생에게 전권을 주신다고 한 거 아닙니까?”

“물어보지도 못하오?”

“별건 아닙니다. 광산채굴에 필요한 도구를 만들게 하려고요.”

“빡빡하오?”

“지금은 무난합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농지 개간이 시작되면 사방에서 백성이 몰려올 겁니다. 대비해야지요.”

“백성이 몰려오면 병장기도 더 만들어야 하고?”

“그렇습니다. 어쨌든 그래서 좀 효과적으로 광산채굴 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들 수 있을지 물어보려고 합니다.”

“어렵다고 하면?”

“음. 소생이 박자청에게 그런 대답을 들을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구려.”

“예.”

왕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지주들의 겁박에 놓여 있는 전호들을 계구수전의 시범지역에서 경작하게 할 생각이구려?”

“예.”

“지주들의 땅은?”

“송구합니다. 소생은 그들의 땅을 그냥 둘 생각이 없습니다. 적당한 때에 명의를 바꿔줄 겁니다.”

“거. 과격하구려.”

“대동법이 제일 과격했습니다.”

“500두 거두자고 한 건 군사 생각이었소.”

“소생은 숟가락만 올린 거고요.”

왕선은 엄지와 검지를 살살 비벼댔다.

정도전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은근하게 말했다.

“내게 좋은 방도가 있소.”

“어떤 겁니까?”

“광산채굴의 민간화. 금광과 은광까지 포함해서.”

“농이 과하십니다?”

“농 아니외다.”

“농을 이중 삼중으로 겹쳐서 치십니다?”

“과세를 잘 하면 되오.”

왕선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깨달은 정도전의 눈이 가늘어졌다.

“주공.”

“병장기와 농기구로 과세하면 제법 유용할 거 같소만.”

“아예 말본인 상업을 부흥시키고 상인을 우대하자고 하시지 그럽니까?”

“오. 그것도 해야지요.”

“주공.”

“일단 들어보시오.”

“소생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예. 좋습니다. 그리한다고 가정하지요. 그런데 만일, 그랬다가 막상 필요한 수량을 구하지 못하면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괜히 광산이 나라의 재산으로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그래요. 그러니까 그 재산을 민간이 채광하고 우리는 앉아서 물자를 구하면 되오.”

“······.”

“무엇보다 쓸데없는 역을 부과하지 않아도 되오. 왜? 광산채광에 관심 있는 집단이 알아서 인부를 구할 거니까.”

정도전이 멈칫했다.

왕선은 부지런히 입을 움직였다.

“보시오. 인부를 구하면 품삯을 얻게 되오. 그리되면 더 많은 백성이 쌀을 구할 수 있소. 어떻소? 그야말로 일거양득이 아니오? 아니지. 일거삼득이오.”

“왜 이러는 겁니까?”

“무슨 말이오?”

“소생에게 전권을 부여하셨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만 주공께서 마음을 먹었다면 그대로 시행하면 될 일입니다. 굳이 소생을 이처럼 설득하려는 이유가 궁금하군요.”

당연히 설득해야지.

당신이 금손이잖아.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마법의 손.

왕선은 피식 웃었다.

“농업이 가장 중요하오. 천하의 근본이니까. 그런데 근본이 근본답게 되려면 주변이 다채로워야 하지 않겠소?”

“······.”

“외줄 타는 재주꾼이 있소. 그 솜씨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감탄사를 내뱉게 할 정도로 뛰어났소. 하지만 외줄은 참으로 위험하지 않소? 언제라도 떨어질 수도 있지. 지나가던 현자가 그에게 말했다오. ‘외줄 밑에 그물이라도 쳐라. 그러면 볼품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떨어져서 죽거나 다칠 일은 없지 않겠느냐?’ 참으로 옳은 말이 아닐 수 없소.”

“······.”

“농업만 강조하는 건 외줄 타기요. 제 땅을 가진 농민이라 할지라도 언제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지 모르는 거요. 영세불변의 법도? 난세에 그런 건 아무짝에도 필요 없소. 그러면 어찌하는 게 좋겠소? 농사에 실패한 백성이 머슴이 되거나 지주의 땅을 빌려 경작하는 것만이 아닌 다른 살길을 열어둬야 하는 거요. 그때, 그들은 느낄 거요. ‘아. 꼭 농사가 아니더라도 내 식구를 먹여 살릴 방법이 있구나.’ 이렇게 말이외다. 그들은 인부가 될 거고, 상인이 될 거요.”

“···그건 그대로 땅을 경작할 사람이 부족한 현상을 불러올 겁니다.”

“옳소. 그런데 보시오. 땅은 놀고 사람은 부족하고. 그러면 어찌 되겠소? 내 땅을 경작해줄 백성에게 더 많은 대가를 제시하게 되지 않겠소? 품삯을 올리거나. 그러면 백성은 다시 경작으로 눈을 돌릴 거요. 그리고 비교할 거요. 어떤 일을 하면 내 식구를 더 잘 먹일 수 있을까. 이렇게 말이외다.”

“······.”

“이리되어야 억울한 백성이 줄어들게 될 거요. 다양한 살길을 만들어둬야만 지주의 횡포에 일가족의 평화로운 일상이 무너지는 일이 줄어들 거란 말이외다. 바로 지금처럼 지주가 갑자기 내쫓더라도 대안을 찾을 수 있지 않겠소?”

“······.”

“그 길만 닦으면 되오. 비록 땅을 잃어서 고통스럽겠지만 다시 힘을 낼 거요. 그들은 위대한 존재니까. 그들. 백성 말입니다.”

“······.

“이게 상생이라오. 해서, 나는 농업만큼 다른 부분도 신경 쓰는 거라오.”

왕선은 나지막하지만, 힘이 가득 실린 어조로 말했다.

“만백성을 위해서.”

정도전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묻습니다. 대체 왜 소생에게 이를 이르는 겁니까?”

“나는 군사가 조금 더 유연해지길 바랄 뿐이외다.”

그러면 당신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이 땅에 없을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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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부안의 유력가는 풍비박산 나고 있었다.

나세의 언월도 앞에서 대동미를 안 내고 버틸 재간이 없다.

“큰일입니다. 벌써 3할의 지주들이 쌀을 뺏겼어요.”

“······.”

“이대로라면 그동안 쌓은 재물을 모두 뺏길 겁니다. 수단을 강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상식과 생각이 통하지 않는 왕선을 상대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만일 평시라면 집단움직임이 제법 힘을 발휘할 수 있으나 지금은 아니다. 가문의 명성이나 중앙 정계의 영향력 따위로 입을 댈 수 있는 평화로운 시대가 아니라 창칼이 우선되는 군웅할거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무슨 수로?”

창백한 낯빛으로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던 조익신이었다.

지주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랬다. 이미 조익신의 권위는 전처럼 공고하지 않았다.

매번 어긋나는 판단이 시작이었고, 나세의 언월도로 정점을 찍은 것이다.

조익신의 미간이 꿈틀였다.

“어차피 김제, 부안에서는 왕선을 막을 사람이 없네.”

“···그렇다고 이대로 있으면 우리는 끝입니다.”

“내가 언제 이대로 있겠다고 했나?”

지주들의 눈이 반짝였다.

“혹시 방법이 있습니까?”

그런데 목소리는 살짝 흔들렸다.

그만큼 연이은 실책으로 조익식에 대한 신뢰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조익신은 입술을 살짝 깨물면서 내뱉었다.

“외부의 세력이라면 왕선을 견제할 수 있지.”

지주들의 눈이 커졌다.

“군웅할거. 이런 난세에 지역의 유력가와 척을 지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 해줄 것이다.”

바로 그거다.

왜 이 생각을 하지 못했단 말인가?

제아무리 공고한 세력이라고 하더라도 내부의 유력가문이 등을 돌리면 외부의 적을 감당할 수 없다. 심지어 왕선은 이제 막 김제, 부안을 장악하지 않았는가. 또한, 대동법이라는 희대의 악법을 휘두르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였다.

“인제야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군.”

“아, 아닙니다. 소인들이 어찌 어르신의 말씀을 귀담아듣지 않겠습니까?”

만일 이번 일이 성공한다면 조익신은 다시 김제 최고의 위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허튼 행동을 찍히는 우를 범할 수는 없다.

“한데, 누가 적합하겠습니까?”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명망도 있는 덕장이 좋겠지. 게다가 실력도 겸비하면 금상첨화고.”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조익신은 진하게 웃었다.

“왕선이나 이희필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명장.”

적절하게 기대감을 고조시켰다.

“보령의 김성우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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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이 장고에 들어간 동안 왕선은 변소 건설 현장을 시찰했다.

순조롭게 일이 진행됐다.

그때 유독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지주들이다. 눈치를 살피면서 엉거주춤 이동한다. 오늘 조익신의 사가에서 작당 모의를 했다던데 이제 나오는 모양이다.

“어?”

왕선은 헛웃음을 지었다.

“이놈들 봐라?”

“형님. 왜 그러십니까?”

“천목아.”

“예. 형님.”

“저것들 싹 다잡아오게.”

“예?”

“토 달지 말고 당장. 그리고 이옥 장군.”

“예. 주공.”

“성문 봉쇄하게.”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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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과 마천목의 일 처리는 깔끔했다. 조익신과 지주들은 포박된 채로 끌려왔다.

“어, 어서 풀어라!”

포승줄을 풀어보려고 바둥거렸다. 그러나 그건 너무나도 무의미했다.

끌려 올 때 포승줄은 둘째 치더라도 눈까지 가려졌기 때문이다.

그러기를 한참.

드디어 눈을 가린 천을 풀어졌다.

어둠에서 해방된 눈이 처음으로 본 것은 여전히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지주들은 눈을 껌뻑거렸다.

일단 눈이 적응되기만을 기다린 거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 정도 적응된 눈으로 확인해보건대 이곳은 밀폐된 공간이 분명했다.

그때

“컥. 커흠.”

어디선가 사례 걸린 기침 소리가 났다.

답답함에 지주 중 한 명이 낸 소리. 대수롭지 않은 아주 일상적인 기침에 불과했다.

그런데

“누구인가?”

싸늘하기 이를 데 없는 어조.

갑작스레 울린 말. 지주들은 당황하며 목소리의 진원지를 찾았다.

그 순간 사방에서 횃불이 밝혀졌다.

갑작스러운 빛. 겨우 적응하던 눈이 화들짝 놀랐다. 너무 눈이 부셨다.

손으로 가리며 껌뻑거렸다.

정면에 한 남자가 보인다. 점차 자세히 그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기괴하게 고개를 틀면서 턱을 들어 올리고 있다.

그러더니 손을 괴상하게 움직이면서 지주들을 쏘아보고 있다.

그때 목울대를 긁어내는 목소리가 좌중을 울렸다.

“지금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어?”

괴이한 말만큼 특이한 복색.

황금색 법복을 입은 남자가 보였다.

바로 왕선이었다.

< 59화 기침소리(작가이벤트 2일차)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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