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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57화 (57/187)

< 57화 사상 최강의 대동법 >

왕선이 눈을 반짝이면서 정도전을 쳐다봤다.

“···또 왜 이러십니까?”

“참으로 감명 깊은 명언이었소.”

“······.”

“팔에 적어서 매일 아침 보고 싶을 정도의 명언이었소.”

“···주공.”

“왜 그러오?”

“여기서 나가서 우측으로 조금만 가시면 됩니다.”

“무슨 말이오?”

“거기에 김석이라는 아주 용한 의원이 있습니다.”

“······.”

“김 의원이 못 고치면 김제에서는 아무도 못 고칩니다.”

“···군사.”

“아직 젊으십니다. 반드시 완치될 겁니다. 기운 내십시오. 소생도 간절히 바랍니다.”

“이 사람이 진짜.”

“음. 벌써 쾌차하셨나 봅니다?”

“실은 정신이 좀 어지럽소.”

“어서 가보십시오.”

“믿었던 사람이 나를 궁예라고 선동질해서 그렇소만?”

정도전은 겸연쩍은 웃음을 보인다.

“그걸 또 들으셨습니까?”

“아주 잘 들리더군.”

“참으로 귀가 밝으십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오?”

“아. 그 고약한 인사들이 겁박을 해대니 참을 수가 있어야지요.”

“그나저나 이옥과는 무슨 일이 있소?”

“이옥이 뭐라고 하던가요?”

“그건 아니오만. 아까 보니까 이상하던데?”

정도전은 쓰게 웃었다.

“다른 건 귀신같이 알아차리면서 그건 왜 모르십니까?”

“묻는 말에 대답해주면 참 좋을 거 같소만.”

“다른 사정이 아닙니다. 신돈 때문입니다.”

“신돈?”

“예. 소생의 스승이었던 유숙 선생을 숙청한 건 신돈이었지요.”

“이옥의 부친은 신돈의 당여였으니까?”

“예. 선대의 악연이라고 할까요? 뭐. 그래도 크게 문제가 되는 건 아닌데 오늘따라 영 아니꼽게 행동하긴 하더군요.”

“군사라는 사람이 그것도 제압 못 하오?”

“설마요.”

정도전은 입 주변을 쓰다듬으면서 짓궂게 웃었다.

“다른 사정도 아니고 이옥은 제 부친의 일입니다. 마음이 정리될 시간을 주는 거지요. 딱 거기까지. 소생이 배려해주는 겁니다.”

“잘 하시오.”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실 이 부분은 이옥의 행동이 틀렸다.

선대의 악연에 정도전은 한발 물러나 있기도 하지만, 지금은 엄연한 상급자가 아닌가.

하지만, 왕선은 직접 개입할 생각은 없었다. 이건 군사 정도전이 이옥을 제대로 제압해야 할 문제이니까.

사실 그리고 정도전이 이옥을 제압하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 사람이 제압하지 못한 사람은 역사상 한 명뿐이니까. 지금은 머나먼 동북면에 있을 그 사람.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 봅시다. 어쩔 생각으로 그랬소?”

“음. 설마 그들과 타협하시려고요?”

“미쳤소?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시오.”

정도전은 입맛을 다시면서 말했다.

“토지 겸병은 바로 잡아야지요. 그거 못 잡으면 땅 넓혀도 죽은 땅 먹는 겁니다.”

“군사가 시작을 이상하게 했다는 생각은 안 하시오? 멀쩡한 토지 문서를 갈기갈기 찢던 군사의 모습에서 일이 개판 됐다는 걸 깨달았는데? 아무리 세상이 어지럽더라도 하필이면 진본을 찢어 가지고.”

“그 정도는 해줘야 그 작자들이 허튼 수를 안 하지요.”

“하긴. 그건 잘한 거 같소. 수작질하는 게 훤히 보이긴 했으니까. 속이 시원하더군. 본관이었으면 철퇴를 휘둘렀을 거요. 아. 저번에 철퇴와 안대를 선물로 준다더니?”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 철퇴와 안대는 솜씨 좋은 장인을 수소문하고 있습니다.”

“기대가 크오. 그래. 무슨 말이 하고 싶소?”

정도전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조리 몰수하시지요.”

“그들의 토지를?”

“예. 이참에 계구수전의 전면적 시행을 하는 겁니다.”

“음. 고려 전역의 지주가 나를 죽이려고 하겠구려? 죽창을 들고 내 사지를 찢으려고 할 거요.”

“막무가내로 땅을 뺏으면 그리될 겁니다.”

“내가 죽길 바라오?”

“소생을 너무 띄엄띄엄 보시는 거 아닙니까? 판을 잘 만들어보겠습니다. 완벽한 명분으로 몰수할 수 있게 말입니다. 주공께서도 전주에서 해냈지 않습니까.”

“그때는 군웅할거 전이었소. 관청에 귀속시킨다는 확고 부당한 명분이 있었고. 그런데 지금 그렇게 하면 사정이 많이 달라진다오. 누가 보더라도 내가 토지를 삼키려는 걸로 보일 건데?”

“군웅할거입니다. 힘이 명분이지요. 민심이 명분이고. 우리는 둘 다 가지고 있습니다.”

“불가하오.”

“음. 초심을 잃으셨군요.”

“나를 못 믿소? 은산사의 사원전을 모조리 몰수해서 군사가 좋아하는 계구수전으로 변모시키고 있소.”

“그건 그렇지만···.”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소.”

“인제 보니 생각하신 게 있으시군요.”

“음. 잘만 하면 계구수전만큼 효과를 낼 수 있을 거 같아서.”

“...지주가 땅을 그대로 가지게 한 상태로요?”

“물론이오. 사실 그게 가장 아름답소. 토지 겸병이 심하면 심할수록.”

...그런 방법이 있다고?

정도전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

“이르시지요.”

왕선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세제도. 중요하지 않겠소?”

“그건 그렇지요. 생산량을 늘리는 만큼 거두는 방법도 잘 활용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갑자기 조세제도라니요?”

“일단 들어보시오. 일전에 전 선생도 그 문제를 고민했다오.”

“그때는 조세에 손을 대기 어려운 시기이기도 했지요.”

애초 농업을 진흥할 때 전녹생은 조세를 징수하는 방법과 생산량 확충하는 방법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때는 군웅할거가 개막되기 전이었다. 조세제도를 마음대로 어찌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해서, 이앙법의 확충으로 역량을 기울인 것이다.

“지금은 다르지 않겠소?”

“음. 조세제도를 합리적으로 만들면 좋긴 합니다만.”

“군사가 생각하는 문제점을 말해보시구려.”

“갑자기요?”

“어서 말해보시오. 일단 합의점부터 찾아봐야지.”

“음. 우리나라는 조는 토지에서 거두고 상요와 잡공은 군현마다 토산품을 관청에 바치게 합니다.”

“그렇지요.”

“토지에서의 소출은 얼마인가를 조사하여 계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요와 잡공만은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관청에 바치는 액수가 정해졌으나, 가호마다 무슨 물건을 얼마만큼 바쳐야 하고 장정마다 무슨 물건을 내야 하는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폐단이 참으로 커지겠구려.”

“오늘도 보셨을 겁니다. 가장 파악하기 쉬운 조세도 이 지경입니다. 토지 겸병 말입니다. 나라를 잡아 삼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파악할 수 없는 토산물은 어느 지경이겠습니까? 실로 엄청난 부정과 부패가 있을 겁니다. 관리는 속임수를 써서 제멋대로 징수할 겁니다. 유력가는 기상천외한 방법을 동원하여 상요와 잡공을 회피할 겁니다. 나라의 국용은 약해지고 백성은 죽어 나가는 겁니다. 믿지 않으실 수도 있지만, 이 거대 악이 토지 겸병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제대로 들여다보면 토지 겸병은 아무것도 아닐 겁니다.”

“역시 삼봉 정도전!”

“···예?”

“아아. 아니라오. 믿소. 믿는다는 말이외다. 그 문제가 심해지면 별의별 문제가 다 나올 거요. 방납 업체가 생길 정도로.”

왕선은 방납의 폐단을 구구절절하게 나열했다.

정도전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 문제를 이토록 동의해준 사람은 포은 정몽주 외에는 없었다.

...두 번째가 왕선이라는 점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다.

“주공께서도 잘 알고 계시는군요. 한데, 이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시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설마 이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겁니까?”

“물론이외다.”

“아주 간단하게 말씀해주십시오.”

“없애면 되오.”

“없애다니요?”

“토산물. 그거 없애면 되오.”

“···오늘부로 군사 사직하겠습니다.”

“또 왜 이러오?”

정도전은 한탄했다.

“사직하겠습니다.”

“진심이오?”

“진심이겠습니까? 소생은 군사 사직하면 딱 객사하기 좋습니다. 적을 너무 많이 만들어서.”

“잘 아네. 그러면 말 돌리지 말고.”

“생각해보십시오. 그걸 없애면 관청의 물품은 어떻게 조달할 겁니까? 앞선 경세가들이 없애지 않은 건 다 이유가 있습니다.”

“물품은 관청에서 사면 되오.”

“그 비용은 땅에서 솟아납니까?”

“오. 과연.”

“예?”

“땅에서 솟아난다오.”

“오. 궁예의 현신은 그런 신통력이 있습니까?”

“막가자는 거요?”

“누가요? 소생이요?”

“됐소.”

“그러니까 말 돌리지 말고요.”

“쌀로 받으면 되오.”

“예?”

“사전 1결당 쌀 12두? 뭐. 이건 군사가 합당한 수치를 제시하면 될 거고. 어쨌든 이런 식으로 쌀을 징수하는 거요.”

“······.”

“그 뒤 이 쌀로 물품을 사면 되오. 그러면 자연스럽게 물품을 조달하는 상인도 생길 거요. 어떻소? 참으로 위대하지 않소? 내가 이름도 정했다오.”

“그건 무리입니다.”

“응?”

쉽게 될 줄 알았는데 정도전이 반대한다.

왕선은 눈을 껌뻑였다.

“주공. 인두세가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땅에서 나는 곡식만으로 나라가 운영되지 않아서 인두세가 있는 겁니다.”

“원래 부족한 나라일수록 인두세가 있는 법이라오.”

“그게 현실입니다. 말씀하신 게 충분히 좋은 제도라는 건 소생도 알겠습니다. 잘만 정착하면 토지가 없는 백성은 부담에서 벗어나고 여유가 있는 지주가 많은 부담을 지게 될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제대로 되려면 토지 생산량이 그만큼 늘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 사정이 그 정도가 됩니까?”

“음. 그 정도가 되면 할 수 있소?”

“예.”

“기준은?”

“군량과 구휼미의 비축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무릇 3년마다 1년에 쓸 전곡을 비축해야 합니다. 이렇게 30년이 지나면 9년의 전곡이 부축됩니다. 하여, 흉년이나 전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지요.”

“난세로다.”

“예.”

“그런데 될 거요.”

“어찌 장담하십니까?”

“모내기법과 시비법.”

“예. 가능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새롭게 개간되는 엄청난 범위의 농지.”

왕선은 슬쩍 정도전을 가리켰다.

“부안과 김제를 개간할 생각에 연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지 않소이까. 충분히 생산력은 폭증할 거 같소만?”

“예. 그걸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모두 가정입니다. 그러는 동안 무슨 일이 생길지 누가 압니까.”

“바로 그 무슨 일이 가능하게 할 거요. 오늘 군사가 저들을 제대로 도발했지 않소이까. 딱 적절했소.”

정도전은 멈칫하더니 입꼬리가 크게 올라갔다.

“지주들의 저항을 역이용하자는 겁니까?”

“미친 듯이 발악하지 않겠소? 토지 겸병한다고 만들어둔 위조문서가 이번에는 완전히 발목을 잡게 될 거요.”

정도전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입가의 미소는 갈수록 진해졌고 키득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올 정도다.

“마음에 드오?”

“미치도록 마음에 듭니다.”

이거 아무래도 지주들한테 제대로 기분 상했나 보다.

이럴 때 보면 정말 사악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그나저나 명칭을 뭐라고 하실 겁니까?”

정해진 이름이 있다.

고민할 필요도 없다.

“대동법.”

“이름 참 별로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그런데 왜 그렇게 정했습니까?”

“나도 그게 궁금하오.”

“징벌의 의미가 담기면 더 좋을 건데.”

“앞으로는 ‘대동’이라는 이름이 징벌과 동의어가 될 거요.”

“바람직하군요.”

얼마 뒤 대대적으로 토지 문서를 확인했는데, 뿔이 난 지주들은 잘 단합하여 문서를 제시했다.

결과 김제와 부안의 모든 토지가 유력가문의 소유로 확인됐다.

한 토지의 소유자가 많게는 10명인 곳도 있었다.

마치 왕선과 정도전을 조롱하듯이 정말 아주 제대로 작당한 것이 분명했다.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그 직후 나세가 언월도를 휘두르면서 새로운 조세제도를 발표했다.

[사전 1결당 쌀 500두를 징수한다.]

조선 시대 대동법보다 40배 이상 무거운 세율.

인세에 사상 최강의 대동법이 강림했다.

< 57화 사상 최강의 대동법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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