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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56화 (56/187)

< 56화 정도전이 너무 강함 >

“부안에서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부안이라.”

“예. 조만간 왕선의 병력이 부안을 점령하지 않겠습니까?”

“처신을 물어보는 것이렷다?”

“예.”

김제의 유력가 조익신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파악된 정보에 의하면 왕선은 저수지 근처 황무지를 모두 개간할 생각인 거 같더군.”

“그렇습니다. 전주에서 저수지를 많이 축조했는데 놀랍게도 자발적인 참여였다고 하더군요.”

“이번에도 그리하겠지?”

“예.”

“좋아. 이대로 왕선에게 귀의하지.”

“괜찮겠습니까?”

“부실한 이희필보다는 백배 괜찮을 것이네. 일단 그에게 협조해서 최대한 얻어낼 수 있는 걸 얻어낼 것이네.”

“하면, 그리 전하겠습니다.”

“그러게. 아. 철저하게 내 지시를 따르라고 하게. 섣불리 행동하지 말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어르신의 명을 따르면서 잘 단결해야 왕선도 경거망동 못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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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필과 이금이 죽은 김제는 안정을 되찾았다. 그 즉시 나세는 병사를 일으켜서 부안까지 점령했다.

김제 관청에서 새 영토를 점검 중인 정도전은 웃음이 마르지 않았다. 늘 싱글벙글거렸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실성했다고 생각할 정도다. 하지만, 속사정을 아는 사람은 다 이해했다.

최근 전주의 기세가 실로 대단했기 때문이다.

나라 안의 큰 제언이라고 불리는 3호가 있는 익주, 김제, 부안을 모두 장악했다. 그야말로 최고 곡창지대로 품은 거다. 여기저기 손상된 부분을 손봐준 다음 곧바로 노는 땅의 경작을 진행할 계획이다.

정도전의 붓은 빠르게 움직였다.

“김제, 부안에도 저수지를 축조해야 하는데.”

물론 입도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역시 전주에서 시행한 대로 저수지 축조에 참여한 가호를 기준으로 토지를 나눈다고 해야겠어. 하면, 자발적인 참여가 줄을 이을 거야.”

싱글벙글.

그러다가 갑자기 왕선의 얼굴이 떠올랐다.

오만상을 찌푸린다.

“썩 물러가라!”

고개를 세차게 젓자 왕선의 얼굴이 사라졌다.

다시 싱글벙글.

“음. 그래도 김제, 부안은 진통이 제법 있을 거야. 익주도 마찬가지고.”

사실 전주는 대적할 만한 유력가문이 애초에 박살 났다.

심지어 최대 명문가인 전주 이씨는 백기 투항하여 서원을 담당하고 있다.

이러하다 보니 전주에서는 왕선의 의지가 곧바로 집행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익주와 김제, 부안은 사정이 달랐다. 여전히 유력가문이 존재했다.

이곳의 백성이 전주를 일컬어 불국정토라고 지칭한 것은 절대 무리가 아니었다.

“군사님.”

“그래. 왔는가?”

“아. 송구합니다.”

“송구하다니?”

“교주님.”

정도전의 눈동자가 거세게 떨렸다.

“···이봐. 만리.”

정도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걸 느낀 밀교원 만리는 황급히 보고를 시작했다.

“말씀하신 걸 모두 파악했습니다.”

당장이라도 불벼락을 내려칠 것 같던 정도전은 애써 침착함을 끌어 올렸다.

“···어떻던가?”

“역시 대부분 토지 겸병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음. 백성들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발고했습니다.”

“그래?”

“어...찌 할까요?”

“이 사람아. 뭘 어찌하나? 당장 끌고 오게.”

“발고한 백성들을요?”

“자네 미쳤나? 그들을 처벌하면 앞으로 백성들은 어떤 문제도 입에 담지 못해. 백성의 입을 틀어막는 위정자는 길거리의 개똥보다 못하다는 걸 모르나?”

“송, 송구합니다.”

“거론된 지주들 다 끌고 오란 말이야.”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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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가?”

“예.”

“토지 겸병? 지주?”

“그렇습니다.”

“음.”

왕선은 잠시 고심하다가 말했다.

“앞서게. 직접 가볼 테니까.”

어디 정도전의 솜씨를 제대로 견식 해 볼 생각이었다.

정도전은 김제 관청이 아니라 백성이 오가는 성 한가운데 지주들을 모아뒀다.

이 대목에서부터 왕선은 정도전답다고 생각했다.

아마 오늘 그가 품은 이상을 백성에게 전달하려는 생각이 분명하다.

방해받지 않고 편안하게 구경할 의도로 멀찍이 자리 잡았다.

끌려온 지주들은 불쾌함을 숨기지 않았다.

“이보시오. 삼봉 선생. 백주에 우리를 잡아 온 연유가 무엇이오?”

“...삼봉 선생?”

“삼봉 선생이 아니시오?”

“나는 군사외다.”

“아. 그렇소? 삼봉 선생?”

지주들은 상당히 뻣뻣했다.

정도전은 이들이 이렇게 나오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지금 천하는 왕조 창업 이래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난세가 펼쳐진 상태다. 이런 난세에서 군웅이 제대로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두 가지가 필요했다.

가장 우선시 되는 건 역시 민심이었다. 그 어떤 군웅이라도 처음에는 이를 통해서 기반을 쌓아 올린다. 왕선처럼 가문의 지역적 기반이 없다면 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적당하게 기반이 쌓인 다음에는 더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이 있다.

바로 지역 유력가의 협조.

이것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영주’의 ‘영지’는 순식간에 무너지게 된다.

과거 태봉국의 궁예가 그랬던 것처럼.

전주에서 거대한 민심을 타고 세력을 확장한 왕선이다.

그 위력은 순식간에 익주를 거쳐서 김제, 부안까지 장악할 정도였다.

이 나라 고려에서 가장 풍족한 지역을 움켜쥔 것이다.

이럴 때 왕선에게 중요한 건 내실을 다지는 것이다.

즉, 지금부터는 유력가와 적절한 협조를 해야 한다. 이건 필연적이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일대의 유력가문이 이를 모를 리 없지 않겠는가?

그들은 노련한 인사들이다.

왕선을 선택한 이상 적당하게 양보할 생각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내실을 다지고자 유력가와 손을 잡는다고 하더라도 민심을 아예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없다.

뒤에서는 적당한 거래를 하고, 앞에서는 왕선의 위력에 고개를 숙이면 된다.

그래. 분명히 그렇게 결정했을 것이다.

다만, 상대가 왕선이 아니라 군사인 정도전이기에 기선 제압을 하고자 이리 나오는 거다.

그들은 왁자지껄 떠들더니 말했다.

“거. 적당히 합시다. 우리도 체면이 있는데.”

“······.”

“좋은 날 받아서 만납시다. 그때 호칭도 제대로 불러 주리다.”

이건 한 마디로 제대로 대접해보라는 말이다.

본격적인 대화는 그때 할 수 있다는 말.

그러니까 더 자신들을 귀찮게 하면 협조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한 명씩 등을 돌렸다.

정도전의 눈이 가늘어졌다.

“기가 막히는군.”

“허. 뭐요?”

그런데 유력가들이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게 하나 있다.

바로 삼봉 정도전이라는 인물.

“지금부터 움직이는 사람은 즉결심판하리다.”

“허. 이보시오!”

지주들은 삿대질하면서 따져댔다.

그런데도 정도전은 꼿꼿하게 선 채로 노려봤다.

“웃기고 자빠졌군.”

“이보시오!”

“누가 당신들과 협조한다던가?”

“!!!”

“그런 얄팍한 수로 이권이나 챙기려고 했다면 이희필을 열심히 지원했어야지.”

“가, 감히! 백면서생 따위가!”

“당신들 사람 잘못 봤소이다. 이 삼봉 정도전의 성질이 좀 고약하거든.”

정도전의 눈매가 싸늘하다.

그제야 지주들은 이대로는 곤란하다는 걸 느꼈다.

만일 여기서 괜한 충돌이 발생하면 손해가 발생할 수도 있다.

“하. 좋소. 대체 우리를 부른 이유가 뭐요?”

“토지 겸병.”

“그게 뭐가 문제요?”

“토지 겸병은 국법으로 금하고 있소만?”

“하. 제대로 말씀하시오. 토지 겸병을 금하고 있는 게 아니라 부당한 방법의 조세 징수를 금하는 거요. 우리는 가문의 토지에서 세를 징수하오.”

애초 지주들은 왕선과 타협하여 적당한 수준으로 토지 겸병을 거두기로 했다.

그래야 왕선도 백성의 지지를 유지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정도전이 이렇게 나오지 심사가 완전히 틀려버린 거다.

“보시오!”

지주들은 너도나도 토지 문서를 꺼냈다.

정도전은 조소를 날렸다.

“이거 준비가 아주 철저하시오? 토지 문서까지 들고 오다니.”

“흥! 시절이 수상하여 백면서생이 이렇게 날뛰지 않소? 당연히 이렇게 문서는 들고 다녀야지!”

“음.”

지주들은 의기양양하며 토지 문서를 내밀었다.

“위조문서 아니외다.”

정도전은 문서를 받아서 요리조리 살폈다.

이거 진짜다.

딱 봐도 진짜 같다.

하긴. 아무리 겸병이라고 하더라도 처음 토지 소유자는 있을 거다.

보아하니 바로 그런 사람만 토지 문서를 가져온 거 같다.

“여기서 사과하면 조금 전의 무례는 넘어가리다.”

정도전이 지주를 슬쩍 쳐다봤다.

“무례?”

그러더니 파안대소를 했다.

“이봐. 당신 미쳤나?”

그리고

-쫘아아아악!

토지 문서를 갈기갈기 찢었다.

“진짜 미친놈들일세.”

“이, 이놈이!”

멱살을 잡으려고 덤빈다.

정도전이 힘껏 내쳐버렸다.

가쁜 숨을 쉬면서 외쳤다.

“조세를 징수하는 이유는 경작한 대가가 아니다.”

그 말이 끝날 때 슬그머니 이옥이 곁에 섰다.

정도전이 슬쩍 노려봤다.

...거. 정말 일찍 오네?

뭐. 이런 뜻.

이옥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보시오! 책상물림도 이런 책상물림이 없을 거요! 백성들이 내 땅에서 경작했소! 당연히 대가를 내야지! 토지 겸병이 문제라고? 하. 당신이 찢은 내 문서는 수백 년간 내려온 가문의 문서요! 당신이 지금 내 가문의 재산을 부정한 거요! 내 절대 이를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요!”

울분을 토한다.

지주들의 분위기는 흉흉하다.

그러나 상대는 정도전이다.

“가르침을 내리겠다.”

“이, 이자가 정녕!”

“이 자? 이 새끼가 진짜 미쳤나.”

“!!!”

정도전의 입에서는 거침없는 육두문자가 퍼부어졌다.

“나 전주 목사의 제일 군사 정도전이야. 분위기 파악 못 하지? 진짜 성깔대로 한번 해줘? 어깨 위에 달린 그 모가지 날려주랴?”

원래 이렇게 해주면 이옥이 적당한 곳에 화살 한 대 날려줘야 한다.

그런데 영 굼뜨다. 정도전이 다시 째려보자 이옥이 자세를 취한다

지주들의 낯빛이 하얗게 질리자 정도전이 자세를 고쳐잡고 일렀다.

“가르침을 내리겠다.”

재차 언급한다.

“옛날의 성인(聖人)이 부세법(賦稅法)을 만든 것은 백성으로부터 조세를 걷어 자기를 봉양하려 한 것이 아니다. 무릇 백성은 서로 모여 살게 되면 반드시 싸움이 난다. 하여, 통치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법을 집행하여 백성을 다스려서 다툼을 없애고 민생을 편안하게 만든다. 그런데 백성을 다스리는 일은 농사를 지으면서 병행할 수 없다. 하여, 백성은 조세의 1할을 새(稅)로 바쳐서 통치자를 부양하는 것이다. 통치자가 백성으로부터 수취하는 것이 큰 만큼 통치자가 자기를 부양해주는 백성에 대한 보답도 또한 무거운 것이다. 하여, 맹자(孟子)가 일렀다. ‘야인(野人)이 없으면 군자(君子)를 부양할 수가 없고, 군자가 없으면 야인을 다스릴 수가 없다.’ 알겠느냐?”

지주들의 안색은 우락부락.

그러나 대놓고 따지기도 어렵다.

이옥의 화살이 겨눠지고 있지 않은가? 저 화살이 이금의 양팔을 박살 냈다. 두려운 화살이다.

물론, 설마 진짜 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나 세상일은 모른다. 혹시라도 상처를 입힐 수는 있으니까.

무엇보다 정도전의 눈에는 지금까지 보지 못한 광기가 있다.

그랬다. 오늘 그의 모습이 만백성 앞에 온전히 보이고 있다.

정도전은 숨을 크게 몰아쉬더니 내뱉었다.

“조세를 받는다는 건 그처럼 무섭고 무거운 일이다. 한 톨의 쌀알을 입에 집어넣더라도 백성의 고생을 새겨야 한다. 그래야만 올곧게 통치할 수 있다. 그런데 너희는 성인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한 것들이다. 백성의 공양을 당연한 것이라고만 생각한다. 한 줌의 땅을 권력으로 삼아 무참하게 휘두르면서 백성의 고혈을 짜내고 있다. 이 얼마나 흉측한 일인가!”

정도전은 백성들을 돌아봤다.

“당당 하라.”

백성들은 넋을 놓고 쳐다봤다.

말을 이었다.

“떳떳하라.”

눈시울이 붉어진 백성이 보였다.

힘주어 말했다.

“너희는 그럴 자격이 있다.”

마침내 백성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정도전은 옅게 웃었다.

이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모든 것은 미륵의 뜻으로!”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미륵의 가르침이로다!”

밀교원 만리였다.

...성현의 가르침이거늘. 천고에 남을 만큼 원통하도다.

정도전은 분루를 삼키면서 말했다.

“이 무도한 작자들이 처결은 차후 주공의 재가를 받아서 내리겠다.”

“오. 과연 미륵의 군사님이십니다.”

정도전의 볼이 살짝 씰룩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만리는 열심히 떠들었다.

“밀교의 교주님다운 시원한 일갈이었습니다!”

정도전은 눈을 부릅떴다.

만리는 시선을 돌리며 먼 산을 쳐다봤다.

...대체 나는 왜 찍힌 걸까?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만리를 쏘아보던 정도전은 시선을 바로 잡고 성큼성큼 걸었다.

지주들의 지척에 이르렀다.

“협상? 지랄하지 마. 네놈들 모가지. 내가 다 날려줄 거야.”

“!!!”

“상대를 봐가면서 수작질해. 알겠어?”

“다, 당신 이래도 무사할성싶으오?”

“어.”

“당신이 아무리 제일 군사라고 하더라도 이럴 수는 없소. 또, 이러고도 세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소? 동서고금에 유력가를 배척한 군웅이 살아남을 수는 없단 말이외다.”

“내가 모시는 주인의 정체를 말해줄까?”

“...뭐요?”

“내 주인은...”

정도전이 나지막하게 읊조리듯 말했다.

“궁예의 현신이다.”

“!!!”

“이번에는 태봉국처럼 실패하지 않으려고 제대로 준비했어. 기대하라고.”

“!!!”

정도전은 싱긋 웃어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왕선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들리지는 않았으나 그들의 속내가 읽힌 거다.

...아. 정도전 이 인간 진짜 미친놈이네.

그나저나 이옥은 오늘따라 왜 저렇게 굼뜰까?

궁금했다.

< 56화 정도전이 너무 강함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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