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미륵이니라-55화 (55/187)

< 55화 백성을 섬기는 궁예 >

평생 이날만을 기다렸다.

오직 이날만을 기다렸다.

한시도 쉬지 않고 수양에 힘썼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었다.

내가 미륵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 거다.

승려들을 꾀어냈다.

그리고 천하가 난세로 돌입했다.

혼탁함이 갈수록 커졌다.

고통에 허덕이는 중생들은 미륵의 하생만을 기다렸다.

하늘은 과연 미륵을 돕는다고 여겼다.

평생 기다렸던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하산했다. 수백 명이 미륵을 연호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평생의 공덕이 부질없다고 느껴질 만큼 허탈했다.

아니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이 순간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래. 맞다. 지금 왕선의 뒤에 있는 수백 명의 중생이 길을 잃은 것이다.

이금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악을 썼다.

“내가 미륵이야! 너는 마군이야!”

절규에 가까운 외침.

온화함이 가득했던 그의 미소는 더 찾을 수가 없었다.

왕선이 나섰다.

“너는 미륵이 맞다.”

“!!!”

“너는 미륵이야.”

“그, 그래. 드디어 네가 깨달았구나.”

“한 줌도 되지 않는 승려들의 미륵.”

“갈! 미륵이시외다!”

결국, 은산사 승려들이 나섰다.

“너희는 미륵을 가릴 권한이 없다.”

“은산사는 고려 미륵신앙의 총본산이외다. 우리가 아니라면 누가 미륵을 알아본다는 말이오?”

왕선은 어수선한 분위기를 보이는 백성들을 쳐다봤다.

“바로 저들이다.”

“중생이 어찌 미륵을 알아보오?”

“하. 미륵은 중생을 위해서 있는 부처다.”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렸다.

“한 줌도 되지 않는 승려를 위한 부처가 아니다.”

“이보시오!”

“너희가 은산사에 똬리를 틀고 있는 동안 백성은 헐벗고 고통받았다. 진정 미륵신앙을 따르는 승려라면 어찌 그럴 수 있는가? 일각을 아까워하며 한 명이라도 더 나서서 백성을 어루만져야 한다. 그런데 너희가 그랬는가? 아니다. 너희는 미륵신앙의 총본산이라는 허명에 사로잡혀서 은산사에서 불경이나 외웠다. 묻노라. 석존께서 불법을 설파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너희처럼 종교를 권력으로 삼아서 백성 위에 군림하라고 하셨던가?”

은산사 승려들의 얼굴은 시뻘게졌다.

왕선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너희가 미륵이라고 따르는 이금이 한 작태를 보라. 난세에 허덕이는 백성을 구제했는가? 그들을 만나서 어려움을 도와주었기에 미륵이 되었는가? 백성이 자발적으로 그를 미륵이라고 따랐는가? 아니다. 썩어빠진 땡중들을 만나서 사특한 혀를 놀리면서 미륵 장사를 했을 뿐이다.”

왕선은 오른손 검지를 뻗었다.

“너희가 왜 거짓 미륵에게 속았는가? 왜 썩어빠진 땡중이 되었는가? 중생을 만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산속에 틀어박혀서 불경이나 외웠기 때문이다. 머릿속에는 불경의 내용이 가득 차서 혀는 현란하게 움직이지만, 속에는 똥이 가득 찼어. 보라. 너희 때문에 김제 전역에 똥 냄새가 넘쳐난다. 진정 너희가 미륵의 가르침을 따르는 승려라면 불경 외우는 시간을 줄이고 백성의 손을 잡았어야 했다. 그런데 너희가 그랬는가?”

일갈했다.

“그래서 너희가 땡중이다. 너희야말로 마군이다. 그러니 중생이 원하지도 않는 거짓 미륵을 만든 거야. 왜? 은산사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매섭게 쏘아붙였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은산사 승려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지금 왕선이 내뱉는 말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가슴 한쪽에 있던 어두운 기억이기 때문이었다.

왕선은 그들을 지그시 쳐다봤다.

-그, 그렇다면 당신은 왜 미륵인가?

왕선은 오른손을 거칠게 내저으면서 외쳤다.

“내가 왜 미륵이냐고 물었는가?”

“!!!”

“나는 미륵이 아니다.”

“!!!”

순식간에 장내가 술렁였다.

“하지만 나는 미륵이다.”

“그게 무슨 말이오?”

“저들이 나를 미륵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여, 나는 미륵이며, 미륵의 길을 간다. 그리하여 전주는 불국정토이다.”

왕선은 매섭게 일갈했다.

“이금은 미륵을 참칭하여 중생에게 믿음을 강요했으나, 나는 백성이 미륵으로 옹립했다.”

승려들의 말문이 막혔다.

한편, 이금의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다급하게 외쳤다.

“나의 재가화상이...!!!”

-쏴아아아아아앙!

화살이 이금의 바로 앞에 꽂혔다.

“주공의 허락 없이 지껄이면 그 입을 관통시켜주지.”

흉흉한 기세를 보이면서 이옥이 모습을 보였다.

이금의 이마에는 굵은 땀이 흘렀다.

그의 눈알이 미친 듯 움직였다. 머릿속으로 수십 가지의 가정과 결론이 그려졌다.

결론을 내렸다. 이 난국을 타개할 방법은 하나뿐이다.

“전...주 목사라고 하셨소?”

“······.”

“무의미한 피를 볼 필요가 있겠소?”

상황을 보는 눈이 탁월하긴 했다.

“그래서?”

이금은 왕선에게 다가갔다.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우리의 대화로 이 대치를 끝낼 수 있을 거 같은데.”

왕선의 반응이 나쁘지 않자 이금이 밝게 웃으면서 외쳤다.

“오늘 내가 이 자를 설복시키겠노라.”

은산사 승려들은 반색했다.

그러나 전과는 느낌이 달랐다.

뭐랄까? 마지막 동아줄을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그 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왕선이 한 걸음 다가갔다.

이금은 여유롭게 웃고 있다.

왕선은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미륵불이시여.”

이금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역시 뭔가 통하는 게 있다. 잘하면 오늘 대화가 유일한 미륵으로서의 자리를 굳건하게 할 수가 있다. 전주 목사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그래. 이 혼탁한 세상. 군웅의 명단에 이름을 올린 왕선도 불교계를 등에 업고 백성을 통제할 수단이 필요할 거다.

이거 정말 제대로 말이 통하는 상대다.

이금의 미소가 진해질 때 왕선의 입이 움직였다.

“사실 나는 미륵이 아닙니다.”

“험험. 들어가서 말을 나누지. 당신도 곤란할 거 같으니.”

부드럽게 웃으면 말하던 이금은 왕선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런데 온몸에서 오한이 올라왔다.

...어찌 산 사람의 눈빛이 이처럼 섬뜩하단 말인가?

“나는 궁예다.”

“!!!”

온몸을 옥죄는 살기.

이금은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마, 마군이로다!”

그 순간 왕선이 오른손을 들었다.

-쏴아아아아아아앙!

-파파파파파파파팟!

화살이 이금의 오른팔을 관통했다.

“으, 으아아아아악!”

이금은 비명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나세가 언월도를 휘두르며 굳건하게 자세를 고쳐잡았다.

누구도 이금의 근처로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선 것이다.

“오늘 너희만의 미륵을 벌할 것이다.”

왕선이 다시 손을 내저었다.

-쏴아아아아아아앙!

-파파파파파파파팟!

화살이 이금의 왼팔을 관통했다.

“으아아아아아악!”

이금은 고통을 참지 못했다.

“나, 나를 구하라!”

발악하듯 외쳤다.

“어, 어서! 나를 구하라!”

“대체 어찌 이리도 잔혹할 수 있소?”

다시 나선 승려.

“미륵이라면 이럴 수는 없소.”

“나는 거짓 미륵을 벌하는 존재.”

왕선이 싸늘하게 노려보면서 일갈했다.

“궁예의 현신이다.”

“!!!”

은산사 승려들이 움찔했다.

구, 궁예라니?!

“어, 어찌 그 참담한 이름을 꺼내는 것이오?”

“백성의 고혈을 짜는 승려들만의 미륵보다 네놈들과 틀어졌으나 백성을 섬기는 궁예가 백배 낫다.”

“!!!”

“미륵은 허상이지만, 궁예는 실존했으니까. 나는 미륵의 권능을 가진 궁예.”

“!!!”

“나는 미륵의 희망을 뿌리는 궁예.”

“!!!”

“너희가 그동안 자행한 갖은 불법적 행위를 모조리 철퇴로 부숴버릴 궁예다.”

“!!!”

“이 정도면 네놈들의 그 같잖은 정의감이 불타오를 수 있겠지? 그래. 어서 도끼 들고 덤벼. 미륵을 지켜야지. 안 그래?”

그런데 누구도 나서지 못했다.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나세의 언월도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사방에서 느껴지는 분명한 적의 때문이었다.

평생 고결한 수행을 해온 은산사 승려들은 난생처음 접하는 중생의 거대한 적의에 식은땀까지 흘렸다.

“너희가 미륵으로 모시던 작자의 최후를 잘 지켜보도록.”

“살, 살려주시오!”

“화형을 준비하라!”

“!!!”

이금은 구걸했다. 오줌까지 지렸다.

“제, 제발 살려주시오!”

은산사 승려들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렸다.

그래도 일말의 기대감이 있었다.

만일 여기서 이금이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면?

진정 미륵의 모습을 보였다면?

정녕 그랬다면 죽음을 각오하고 움직였을 수도.

하지만, 아니었다. 오줌까지 지리는 이금의 모습은 너무나도 추악했다.

“살, 살려주시오! 다시는 미륵을 참칭하지 않겠습니다!”

그의 절규를 들은 왕선이 합장하면서 답했다.

“미륵불이십니다. 어찌 그러십니까?”

“미, 미륵이 아닙니다.”

“미륵이십니다.”

“제, 제발. 나는 미륵이 아닙니다.”

“어허. 미륵이십니다.”

“제, 제발!”

“미륵의 권능을 보이소서.”

그 순간 이금의 사방에 불이 번졌다.

“으아아아아! 구, 궁예시여!”

“······.”

...미친놈인가? 이 와중에 궁예라니.

왕선은 고소를 삼켰다.

“구, 궁예시여!”

“오! 미륵이시여!”

이금은 발악하면서 고통을 호소했다.

“제, 제발...”

그렇게 죽었다.

...이금은 거짓 미륵이었다.

중생들이 보는 앞에서 적나라하게 밝혀진 이금의 사기 행각은 은산사의 위상을 땅에 떨어뜨렸다. 너무나도 참담했다. 승려들의 고개는 떨궈졌다.

왕선은 고개를 틀면서 노려봤다.

“너희의 미륵이 이 사특한 궁예의 손에 죽었다. 이제 남은 건 뭔가? 목숨을 걸고 불법을 수호할 건가?”

“······.”

“왜 말이 없지?”

“······.”

“나무아미타불? 옴마니반메홈? 뭐 이런 거 없나?”

“······.”

“한심하군. 잘 들어라. 백성은 미륵을 원하는 게 아니라 참된 위정자를 원한다. 불국정토를 바라는 게 아니라 태평성대를 꿈꾼다. 난세는 이런 위정자와 세상이 요원하기 때문에 단지 미륵을 갈구할 뿐이다. 한데, 너희는 이를 왜곡하여 백성의 위에 군림하고자 했다. 너희야말로 탐관오리보다 더한 작자들이야! 적어도 탐관오리는 백성의 기대를 받은 적이 없으니까. 해서, 배신을 당하지도 않으니까. 알겠는가? 너희는 백성들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와 배신을 준 것이다.”

한껏 조롱한 왕선은 등을 돌렸다.

많은 백성의 시선과 마주쳤다.

“다시는 미륵을 참칭하는 간악한 존재에게 속지 말아라.”

“목사께서는 미륵이 아니십니까?”

“듣지 못했나? 나는 궁예일세.”

“하하하. 궁예면 어떻고 미륵이면 어떻습니까?”

“그런가?”

“예. 이제 진짜 미륵이 하생하더라도 따르지 않을 겁니다.”

“왜 그런가?”

“목사께서 약조하시지 않았습니까? 이곳을 전주처럼 만들어주신다고.”

“전주?”

“고려의 불국정토. 전주 말입니다.”

“최선을 다하지.”

“그리고 청합니다.”

“말하게.”

“우리의 미륵이 되어주십시오.”

“궁예래도?”

“우리의 미륵이 되어주십시오.”

“허락하겠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환호성이 터졌다.

열광의 도가니. 오직 은산사 승려들만 침묵을 지켰다. 그들의 고개는 땅에 닿을 듯 내려가고 있었다.

“너희의 미륵으로서 첫 번째 명령을 내리겠다.”

“이르십시오.”

“은산사의 곳간을 가득 채우고 있을 곡식을 모두 들고 내려와서 나누도록 하라.”

천천히 등을 돌렸다.

참담한 안색을 한 승려들이 보인다.

“은산사가 소유한 모든 사원전을 몰수할 것이다. 모두 백성의 품으로 돌려줄 것이다. 응당 그리해야 한다.”

“!!!”

“또한, 종래 은산사가 가졌던 모든 권한을 박탈한다. 그리하여 두 번 다시는 백성을 핍박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덧붙였다.

“백성의 이름으로.”

그리고

“백성을 섬기는 미륵의 이름으로.”

< 55화 백성을 섬기는 궁예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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