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미륵을 참칭하는 사람 >
“통치하는 사람의 공덕은 열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 질이 좋고.”
“두 번째 자유가 있고.”
“세 번째 성질이 포악하지 않고.”
“네 번째 노하지 않고.”
“다섯 번째 은혜가 크고.”
“여섯 번째 정직한 자의 말을 잘 따르고.”
“일곱 번째 분수를 잘 지키고, 법에 따르고.”
“여덟 번째 선악을 잘 구별하고.”
“아홉 번째 사물을 잘 분별하고.”
“열 번째 제멋대로의 행동을 삼가는 것이라네.”
“그런데 우리 사는 땅을 보면 참으로 박하네.”
“첫 번째 왕족이 아니고.”
“두 번째 김제 땅도 벗어나지 못하고.”
“세 번째 매번 군사를 일으키고.”
“네 번째 항상 화가 나 있고.”
“다섯 번째 백성의 말을 듣지 않고.”
“여섯 번째 싸우면 패하고.”
“일곱 번째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여덟 번째 선악이 제 마음대로.”
“아홉 번째 민심을 읽지 못하며.”
“열 번째 혼자 독야청정하는구나.”
언제부터인가 김제에서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묘한 노래를 불렀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게 아니었다. 담긴 의미가 실로 묘했기 때문이다.
“어떤가?”
“오. 미륵의 글자를 읽을 수 있게 되었소.”
만리는 흐뭇하게 웃었다.
“내 말 명심하게. 이걸 섣불리 남에게 알려주면 미륵께서 노하실 것이네.”
“어찌 그걸 잊겠소? 걱정하지 마시오.”
“그리고 하나 더.”
“어서 말씀하시오.”
“그...”
“왜 그러오?”
“아. 이 글자를 익히면 이 땅이 당신을 기억할 거요.”
“그건 또 무슨 말이오?”
“그러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이 글자를 잊으면 안 된다는 말이오.”
“아. 이 글자를 아는 사람들끼리 서로 기억해서 어딘 가에 묘지명이라도 써준다는 거구려.”
“과연. 훌륭하오.”
“하하. 과찬이오.”
“당신도 이제 밀교원이오. 밀교원은 이 글자를 이 고려 땅 전체에 알리는 가장 중차대한 역할을 한다오.”
“당신이 내게 알려준 거처럼?”
“과연 훌륭하오.”
“하하. 과찬이오.”
“그래서 말인데 이 글자를 함부로 알리면 곤란하오.”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조금 전에는 널리 알려야 한다고 하지 않았소?”
너무나도 합당하고 논리적인 지적에 만리는 말문이 잠시 막혔다.
“...이 글자는 인간의 가장 큰 사치라고 하셨소.”
“사치?”
“그렇소. 생각해보시오. 이 각박한 세상에 너도나도 사치를 부리면 어찌 되겠소?”
“그러면 큰일이지. 아껴야 잘 산다는 말이 있으니까.”
“과연 훌륭하오.”
“하하. 과찬이오.”
김제에 잠입한 밀교원들은 날래고 체격 좋은 사람을 선별하여 ‘미륵의 글자’를 가르쳤다. 효과는 무척 컸다. 불과 며칠 만에 글자를 깨우치는 기적은 ‘미륵의 권능’을 믿게 한 거다.
이들은 김제의 토박이다. 하여, 이들이야말로 노래를 퍼지게 한 일등 공신이었다. 그렇게 김제의 민심은 흉흉해졌다.
밀교원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어어. 멈추시오. 여긴 함부로 오면 안 되오. 썩 물러가시오.”
“고생 많소.”
“누구요?”
“미륵을 믿소?”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미륵을 안 믿는 사람이 어딨소?”
“하지만 참된 믿음인지는 확인해봐야 하오.”
“그게 무슨 말이오?”
“증명할 기회를 주겠다는 거요.”
김제를 지키는 병사들에게도 은밀히 접근했다.
바야흐로 김제 곳곳에 ‘미륵의 증표’가 내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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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관내로 내려간 이금은 미간을 찌푸렸다.
“옴마니 반메홈.”
“어찌 그러십니까.”
“세간에 떠드는 내용은 모두 석가의 말이 아닌가.”
“그렇습니까?”
“석가가 우진 대왕을 만난 이야기로다.”
“하면, 미욱한 무리가 의도적으로 퍼트린 게 분명합니다.”
“짐작 가는 곳이 없지는 않다.”
“가까운 전주에 미륵을 사칭하는 무리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참으로 불경한 인사가 아닌가. 마군이도 그런 마군이가 없다.”
“그렇습니다. 그러고 보면 그자도 참으로 딱합니다. 지척에 참 미륵이 있거늘.”
“마군이다. 딱하다니?”
“송구합니다. 소승이 실언했습니다.”
이금은 중얼거리면서 지천에 깔린 종이를 살폈다.
“이것이 미륵의 글자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한데, 이를 익힌 사람이 있는 거 같습니다.”
“허.”
“소문에 불과하지만 수일 내로 익혔다고 합니다.”
수일 내로? 그게 말이 되는가?
이금의 볼이 살짝 씰룩였다.
“마하반야바라밀.”
“어찌 그러십니까?”
“놀랍도다.”
승려들이 쳐다보자 이금은 눈을 감으면서 다시 읊었다.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이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한데, 권능이 느껴진다.”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미륵의 권능은 감히 짐작할 수 없다. 흘러진 것이 분명하다.”
“하면···.”
“이는 미륵의 글자가 맞다. 내가 만들지는 않았으나 그 힘이 실린 것이니라.”
“오. 과연. 그렇다면 세간의 말이 모두 사실임이 분명합니다.”
“그래. 내 힘이 실렸다면 응당 그리함이 옳다.”
“지금 당장 중생들에게 알리겠습니다.”
...지나치게 서두르면 곤란하다.
이금은 최대한 여유를 보이면서 손을 내저었다.
“그 전에 확인할 것이 있네.”
“무엇입니까?”
“내 글자를 탐한 중생을 몇 명 데려오게. 친히 만나서 사정을 들어볼 것이야. 그런 연유에 진위를 정확하게 하는 게 순서지.”
“소승이 미욱했습니다.”
이금은 자비롭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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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필은 노발대발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영문이냐!”
“장, 장군.”
“저잣거리에서 나를 농락하는 노래가 버젓이 불리고 있다. 너희는 대체 뭐 하는 놈들이야?!”
“고정하십시오.”
“내가 지금 고정하게 생겼나!”
부관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속은 달랐다.
애초 조기 진압을 하려 했으나 민심이 동요할 걸 우려하여 내버려 둔 건 이희필이 아닌가?
물론, 티를 낼 수는 없다. 지금 이희필의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상태다. 괜한 말을 꺼내서 역정을 다 받아내는 수고를 할 필요는 없다.
“정확한 상황을 말해.”
“일전에 괘서는 미륵의 글자라고 합니다. 지금 퍼진 흉흉한 노래는 글자를 해독한 것이고요.”
“뭐? 미륵의 글자?”
“그렇습니다.”
이희필은 대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전라도 땅에서 미륵을 사칭하며 자신을 괴롭힐 사람은 한 명뿐이다.
어금니를 깨물었다.
“왕선. 그놈이군.”
“소인들도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노래를 지껄이는 무리도 왕선의 간자가 분명해.”
“장, 장군. 단지 노래를 옮기는 사람은 김제의 백성이 다수입니다. 물론 왕선의 간자가 시작했겠지만 인제 와서는 그걸 파악하는 게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조기에 진압하자고 한 거다.
하지만 이제 상황은 걷잡을 수 없다.
김제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다.
말 그대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
이희필.
주변의 평가를 떠나서 아주 무능한 인물은 아니다. 평소 그라면 당면한 위기를 파헤쳐갈 묘안을 당장 찾아내지 못하더라도 냉정한 사고를 유지하면서 대안을 모색했을 거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큰 패배로 입지가 흔들렸고 간악한 술책으로 거점이 통째로 거덜 나게 생긴 절체절명의 위기가 아닌가.
“당장 군사를 동원해서 혹세무민하는 무리를 모조리 색출해.”
“장, 장군. 그리하면 민심이 크게 동요할 겁니다.”
“지금 이대로 두면 김제는 끝이야.”
이희필의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부관들은 목을 움츠리면서 어물쩍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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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관내 북쪽.
평소대로 오가면서 노래를 읊조리던 백성들은 느닷없는 상황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장한 군사들이 지천에 깔렸지 않은가.
그리고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끌려가기 시작한 거다.
그때
“옴마니 반메홈.”
멀찍이서 큰 소리가 일었다. 수십 명의 승려가 합장하면서 다가왔다.
자비로움이 가득 담긴 승려들의 읊조림은 아수라장을 멎게 했다.
지척에 다가온 승려들은 걸음을 멈췄다. 가장 선두에 있던 노승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어찌하여 불국정토의 지척에서 아수라장이 펼쳐졌는가.”
그의 목소리는 참으로 정갈했다.
“멈추거라.”
승려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그러자 머리에 금빛 수건을 쓰고 몸에는 도포를 두른 이금이 모습을 보였다.
군사들은 눈을 껌뻑이면서 그들을 쳐다봤다.
“은산사의 스님들이 어쩐 일이십니까? 그리고 미륵이라니요?”
“백주에 백성을 괴롭히는 연유가 무엇인가?”
“이는 관부의 일입니다. 사찰에서 관여할 일이 아닙니다.”
이금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너는 미륵의 글자를 익혔는가?”
“어, 어찌 아십니까?”
“내가 너에게 미륵의 글자를 내렸거늘.”
“!!!”
이금은 양손을 모아서 합장했다.
“옴마니 반메홈.”
은산사 승려들이 따랐다.
“옴마니 반메홈.”
이금은 다시 눈을 떴다.
“마하반야바라밀.”
어리둥절.
눈만 껌뻑이는 군사들에게 일갈했다.
“수일 만에 글자를 깨쳤을 것이다.”
“그, 그렇습니다.”
“나의 권능이 아니면 어찌 가능했겠는가?”
“진정 미륵이십니까?”
“나를 따르는 저 승려들이 어디에서 왔는가.”
“은산사입니다.”
“은산사는 어떤 사찰인가?”
“고려 미륵신앙의 총본산입니다.”
“내가 누구인가?”
“오. 미륵이시여.”
그 즉시 승려들이 합장했다.
“옴마니 반메홈.”
“마하반야바라밀.”
이금은 좌중을 돌아보면서 외쳤다.
“다른 귀신에게 기도하고 제사를 지내는 사람. 말과 소의 고기를 먹는 사람, 재물을 남에게 나누어주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죽을 것이다.”
“미륵이시여.”
“마군이는 불국정토에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과연 그렇습니다.”
“가르침의 바다는 한량없지만, 그것을 행하는 것은 한마디 말에 있다. 뜻을 얻었다면 말을 잊어야 하니, 한마디 말도 필요 없다. 이를 체득한다면 부처의 마음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고통이 가득한 속세에 어찌 이것이 쉽겠는가? 하여 내린 것이 미륵의 글자이니라. 너희는 이미 다 얻은 것이다.”
“오. 미륵이시여.”
“옴마니 반메홈.”
“옴마니 반메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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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드디어 이희필이 군사를 움직였습니다.”
“이거 생각보다 성미가 급한 사람이었군.”
“그렇습니다.”
“좋아. 이제 가보자고. 내가 왔다고 하면 이희필이 대경하여 달려 나올 거야.”
“절대 소제의 곁에서 떨어지시면 안 됩니다.”
“그게 아니라 자네가 내 곁에서 딱 붙어 있어야지.”
“송구합니다.”
“됐네. 어서 가지.”
왕선은 싱긋 웃으면서 걸음을 옮겼다.
정도전의 계책대로 밀교원들은 김제를 완전히 마비시켜버렸다.
수백 명에 이르는 이희필의 군사 중 절반 이상이 미륵의 글자를 익혔고 압도적인 권능에 무릎을 꿇은 거다. 모든 게 순탄했다.
시뻘게진 안색으로 노발대발할 이희필을 생각하니 벌써 기분이 좋다.
여기까지 왔는데 변수가 있을 리는 없다. 마음이 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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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금은 합장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한 번씩 주변을 돌아봤다.
은산사 승려를 제외하더라도 족히 수백 명은 되는 인파였다.
실로 엄청난 인원이 뒤를 따르고 있는 거다.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제 남은 건 김제 관청으로 가서 이희필을 진정으로 설복시키는 거다.
자신 있었다. 미륵의 권능을 얻었지 않은가.
변수 따위는 고민하지 않았다.
한편, 왕선은 반대편에서 몰려오는 수백의 인파를 확인했다.
“응?”
눈을 비볐다.
크게 뜨고 다시 쳐다봤다.
“어? 천목아. 저 사람들은 뭐지?”
“글, 글쎄요. 군사에게 전달받은 내용에 이런 건 없었는데.”
“그렇지? 내가 오기 전에 밀교원이 움직였을 리도 없는데.”
그때였다.
“옴마니 반메홈.”
“옴마니 반메홈.”
무척 익숙한 주문이 두 사람의 귀를 때렸다.
그리고
“내가 누구인가?”
“미륵이십니다!”
“나는 미륵이니라!”
“오. 미륵이시여!”
왕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천목아. 내가 지금 보고 듣고 있는 게 뭐냐?”
“그, 그러게 말입니다.”
“그러니까 말인즉슨 저 앞에 있는 땡중이 미륵이라는 거지?”
“정황상 그런 거 같습니다.”
그 순간 왕선과 이금의 눈이 마주쳤다.
왕선의 미간이 아주 많이 좁혀졌다.
이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미륵의 현신이 행차하거늘 저토록 멀뚱히 쳐다보고 있다니.
그러나 이해할 수 있다. 다들 처음은 저랬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미륵을 따르게 될 것이다.
맞다. 저들은 아직 미륵의 선언을 듣지 못했다. 하나씩 일러줘야 한다. 그게 미륵의 자세다.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미륵불이 아닌가.
“천목아.”
“예, 예. 형님.”
“이거 아무래도 일이 제대로 틀어진 거 같다.”
“그런 거 같습니다.”
마천목은 창을 고쳐잡았다.
그때 준엄한 꾸짖음이 두 사람의 귀를 때렸다.
“다른 귀신에게 기도하고 제사를 지내는 사람. 말과 소의 고기를 먹는 사람, 재물을 남에게 나누어주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죽을 것이다.”
...이건 또 무슨 참신한 개소리일까? 정도전이 저기 있나?
왕선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제사 지낼 사람은 지내야지.”
설마 왕선이 말대답할 줄은 몰랐던 이금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이 거대한 인파가 움직이면서 주문을 외치는데 주눅 들지 않고 태연한 기색을 보이는 사람들이다.
본능이 강하게 말했다. 필시 예사로운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그렇다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곤란하다.
“무당하고 친하게 지낼 사람은 그리하고. 고기 먹고 싶은 사람은 먹어야지. 그리고 또 뭐? 남에게 재물을 나누어주지 않은 사람을 벌한다고? 좋은 말이긴 한데 남의 재물을 강탈하지 않고 차곡차곡 쌓은 사람도 벌하는 건 억지지.”
“가르침을 내리겠다.”
“내가 왜 당신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지?”
“허.”
“그리고 하나 더 묻지. 왜 당신이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강제하지? 그건 대체 어디 법도야?”
“이는 도솔촌의 법도이니라.”
“도솔촌?”
“그러하다.”
“도솔촌의 법도를 당신이 어찌 아오?”
기다렸다는 듯이 이금이 준엄하게 외쳤다.
“나는 미륵이니라!”
왕선이 비웃었다.
“그래? 나는 전주 목사 왕선이다.”
이금의 눈썹이 꿈틀였다.
역시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었다.
이 기회에 잘 설득하면 큰 힘이 될 것이다.
이거 처음부터 일이 술술 풀린다.
그의 속내를 들여다본 왕선은 고소를 머금었다.
이거 뼛속까지 제대로 된 사기꾼이로구나.
< 53화 미륵을 참칭하는 사람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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