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밀교 교주 정도전 >
“···생각해봤습니다.”
정도전이 쭈뼛거리면서 말했다.
왕선은 슬쩍 쳐다봤다.
-민본. 딱 좋아.
참 정도전다운 명칭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뜻이 나쁘지는 않다. 훌륭하다.
...그러나 너무 식상하다.
“됐소.”
“예?”
“내가 정했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대일여래의 비밀스러운 가르침. 밀교. 어떻소? 담긴 뜻도 딱 적당하지 않소?”
“허.”
“왜 그러오?”
“주공께서는 미륵이라면서요?”
“그래서요?”
더 무슨 말을 하겠는가.
정도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왕선은 흡족하게 웃었다.
“밀교원을 모두 부르시오.”
“그렇지 않아도 미리 대기 시켜뒀습니다.”
빠릿빠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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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교에서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 우주 그 자체를 의인화하여 대일여래라 하고, 모든 부처와 보살은 대일여래(大日如來)의 화신이며, 우주 그 자체가 그 여래의 법문이라 한다. 이 법문은 금강과 같이 견고하다고 하여 금강승(金剛乘)이라고 불렀다.
발 빠른 사람으로 구성된 밀교원은 100여 명에 이르렀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다. 그러나 미륵의 글자가 보급된 조직이었기에 효과는 다른 세력의 정보조직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긴장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너희는 이 시각부터 전라도를 기본으로 하여 군웅들의 행방을 모두 파악해야 한다.”
“작은 움직임도 놓치지 않겠습니다.”
“음. 그런데 정보조직은 무엇보다 암호가 중요하겠지?”
“정해주십시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이게 적절하겠군.”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참으로 합당합니다.”
“연습해보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훌륭하군.”
그러는 동안 정도전은 한심해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왕선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 모습을 본 정도전은 갑자기 오한이 올라왔다.
“크고 작은 어려움은 밀교의 교주를 통하라.”
“밀교의 교주는 누구입니까?”
왕선의 검지가 움직이더니 한 사람을 가리키며 멈췄다.
찰나 정도전의 안색이 썩었으나 금세 웃으면서 말했다.
“해야 할 일은 따로 전하겠네.”
“알겠습니다. 교...”
“어, 어서 가보게.”
“예. 교주님.”
“아. 그전에.”
왕선은 익살스럽게 웃었다.
“다음에는 제단을 하나 마련해줄 테니 화로에 불을 피우고 진언을 외우면서 불 속에 물건을 던져 공양하면서 명령을 듣게. 제대로 의궤를 세워야지.”
“아. 응당 그리하겠습니다.
밀교원이 자리를 비우자 왕선은 싱긋 웃으면서 정도전을 쳐다봤다.
왕선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교주?”
“···교주 아닙니다.”
“밀교 교주.”
“교주 아닙니다.”
“궁예의 제일 군사이자 밀교의 교주라. 참으로 공사가 다망하오?”
정도전의 표정은 아주 완벽히 썩어 부패할 지경이었다.
왕선은 조금 더 나가줬다.
“즉신성불.”
“무슨 말입니까?”
“신밀, 구밀, 의밀. 만다르의 세계를 체득하기 위한 수행인 3밀이라오. 이 수행은 인계를 맺고, 진언을 외우며, 대일여래를 깊이 사유함으로써 여래의 몸, 말, 뜻과 수행자의 몸, 말, 뜻이 수행자의 체험 속에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이라오. 이를 즉신성불이라고 한다지?”
“······.”
“우리 밀교 교주께서 이를 수행해야 할 것이니 미리 말해주는 거라오.”
정도전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졌다.
“대체 그런 건 어디서 들으신 겁니까?”
어디서 듣긴. 미륵사 선탄에게 들었지.
왕선의 미소는 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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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패배를 당한 이희필은 노심초사하면서 세력을 다시 일으키려고 하고 있으나 쉽지 않았다. 하지만, 좌절하지는 않았다. 김제는 비옥한 지역이었고, 근처 부안은 무주공산이었기 때문에 영향력에 들어왔다. 당장은 사정이 좋지 않으나 금방 세력을 다시 일으킬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장군.”
“웬 소란이냐?”
가뜩이나 신경 쓸 게 한두 가지 아니다.
이럴 때 부관의 소란스러움은 절대 반가운 게 아니다.
부관은 이희필의 예민함을 잘 알고 있었기에 눈치를 살피면서 말했다.
“관내에 괘서가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괘서? 무슨 내용이길래.”
“그것이 도통 알 수 없습니다.”
부관은 황급히 괘서를 보였다.
“이건 글자가 아닌데?”
“그런데 한두 장이 아닙니다.”
“한두 장이 아니다?”
“예.”
“음.”
“어찌할까요?”
“일단 그냥 둬.”
“하지만 민심이 술렁이지 않겠습니까?”
“뜻도 모를 내용 때문에 군사를 동원하면 더 낭패야.”
이희필의 말대로 김제의 민심은 흉흉했다. 그러나 그건 단지 군사적 패배만이 원인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이희필이 이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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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선이 미륵사를 성지라고 칭했으나 그건 작은 지역을 장악한 군웅의 잡설일 뿐,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고려 미륵신앙의 총본산은 은산사였다.
은산사에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가진 이금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면서 사찰을 거닐었다.
“대사. 괘서가 돌고 있습니다.”
“괘서라니?”
“일단 보십시오.”
이금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무엇인가?”
“소승도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부터 김제 관내 곳곳에 붙었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합장한 채로 연신 법호를 읊던 이금은 고개를 저었다.
“분별과 집착을 떠난 지혜의 완성을 뜻하는 마하반야바라밀을 독음했음에도 보이지 않아. 이건 아무런 뜻이 없는 글자일세. 어떤 가벼운 인사가 장난질을 친 거야. 괘념치 말게.”
“한데, 한두 장이 아닙니다.”
“한두 장이 아니라고?”
“그렇습니다.”
이금은 탄식했다.
“한 두 장이 아니라면 조직적으로 일을 도모하는 세력이 있다는 걸세. 뜻 모를 내용을 종이에 적어서 배포하는 걸 보면 노림수가 반드시 있을 걸세.”
“소승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고통받는 중생들을 현혹하다니.”
“대사께서 길을 내려주십시오.”
“길이라고 할 게 있나? 모두 미륵의 뜻대로 가는 것이네.”
“세상이 혼란스럽습니다. 난세입니다. 만백성이 미륵불의 재림만을 기다립니다. 언제까지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겠습니까?”
이금은 자애롭게 웃으면서 합장했다.
“옴마니 반메홈.”
“옴마니 반메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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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는 곡괭이를 들고 김제 관내를 걸었다.
누가 보더라도 땀 흘려 일하다 온 농부의 모습이었다.
태연하게 주변을 살피던 그의 눈에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이 보였다.
은근슬쩍 걸음을 근처로 가서 귀를 기울였다.
“대체 이게 무슨 그림일까?”
“요즘 관내에 잔뜩 붙어 있던데?”
“요상 한 게 아닐까?”
“음. 그러면 군사들이 나서지 않았을까?”
“이 사람아. 군사들이라고 뭘 알겠나. 보아하니 지체 높은 분들도 이게 뭔지 모르는 거 같더라고.”
“괘서군.”
“괘서야.”
“어?”
대화가 마무리되어갈 때쯤 만리가 어물쩍 끼어들었다.
사람들은 의아한 눈으로 만리를 쳐다봤다.
“뉘시오?”
“그게 중요하오?”
“그건 그렇지만. 그나저나 왜 놀란 거요?”
“내가 이걸 아오.”
“정말이오?”
“정말이오.”
“어서 말해보시오.”
“궁금하오?”
만리는 뜸을 들였다.
“아. 어서 말해보시오.”
“이건 미륵의 글자요.”
“미륵의 글자?”
“간절히 미륵을 믿는 사람만이 읽을 수 있다오.”
“어찌 이리도 소상하게 알고 있소?”
“나는 미륵의 권능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오.”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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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의 벽골제, 부안의 눌제 그리고 아군이 장악한 익주의 황등제. 나라 안의 큰 제언이라고 불리는 이 세 곳을 일러 3호라고 하지요.”
제일 군사이자 밀교 교주 정도전이 호기롭게 말했다.
“계속 말해보시오. 교주?”
“···벽골제의 길이는 7,196척이고 넓이가 50척입니다. 수문이 네 곳인데, 가운데 세 곳은 모두 돌기둥을 세었으며 둑 위의 저수하는 곳이 거의 일식(30리)이나 됩니다.”
“둑 아래 묵은 땅은 실로 광활하여 둑 안의 3배가 되고?”
“···잘 아시는군요.”
“과찬이오. 교주?”
“···부안의 눌제는 벽골제의 3할 정도이며, 익주의 황등제는 길이가 900보, 둘레가 25리 정도 됩니다.”
“그만큼 벽골제의 크기가 압도적이라는 걸 뜻하오. 황등제와 눌제만 하더라도 고려 땅에서 비교할 수 있는 저수지는 찾기 어려우니까.”
이 시절 저수지가 작으면 지라고 했고 크면 호라고 한다.
“상주 공검지, 홍주의 합덕제, 제천의 이름지, 평안도 영유의 덕지 정도가 비교할 수 있습니다.”
“고려 최대의 저수지가 이 지역에 오밀조밀 모여있구려.”
“그렇습니다. 소생이 말이 바로 그겁니다.”
“벽골제 아래 묵은 땅은 6천여 결이고, 눌제 아래 묵은 땅은 1만여 결에 이릅니다.”
정통한 내정가 전녹생이다.
“삼봉 군사가 아주 좋은 내용을 꺼냈습니다. 경작을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놀리는 땅이 참으로 많습니다.”
“전 선생의 말대로입니다. 벽골제와 눌제 아래 묵은 땅은 근처 사람들을 모두 동원하더라도 경작할 수 없는 수준. 한 마디로 부양할 수 있는 백성을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는 옥토라는 겁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어느새 정도전과 전녹생은 주거니 받거니 한다.
이거 보아하니 대충 말을 맞추고 온 거 같다.
한 마디로 김제 먹자는 거다.
“천목아.”
“예. 형님.”
“그때 이희필의 기세가 어느 정도였지?”
“솔직히 크게 경계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습니다.”
“그래?”
“예. 과거 이름을 날리던 장수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냉정하게 봐야 합니다.”
이옥이다.
“이희필이 이름을 크게 알린 건 목호의 난을 진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시지 않습니까? 그때 고려군은 최영 장군이 총지휘관이었습니다.”
“음. 능력보다 명성이 과장됐다?”
“소장의 생각에 불과합니다.”
“아닐세. 천목도 그렇게 느꼈다니까.”
그런데 어쩐 일인지 나세가 조용하다.
음. 아무래도 일전에 다툼이 있고 정도전에게 경고받은 일로 몸을 사리는 거 같다.
...정확하게는 안타깝게도 객장의 버릇이 나오는 거다.
그건 곤란하다. 솔직히 이옥에게는 미안하지만 나세의 군무 능력은 전주 제일이다. 왕선은 그렇게 생각했다.
“나세 장군의 생각은?”
“···소장도 이옥 장군과 마천목 대장의 생각과 같습니다.”
“아니, 아니 그러지 말고.”
“예?”
“어떻게 하면 이희필을 제압할 수 있을지 물어보는 걸세. 음. 조금 더 정확하게 설명하겠네. 아군은 장기전을 원하지 않네. 이만하면 이해했나?”
“···장수가 제 군사의 신임도 얻지 못하는데 어찌 백성의 존경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득달같이 끼어든 목소리.
아무도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어차피 정도전이기 때문이다.
“밀...교원들의 정보가 속속 들어오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김제를 흔들어서 차지할 절호의 기회입니다. 나세 장군의 의견이 참으로 적절했습니다.”
은근히 나세를 좀 띄워준다.
의기소침한 모습이 조금 신경 쓰였나 보다.
“그래. 그러면 군사가...아. 미안하오.”
“예? 미안하다니요?”
“교주가 작전을 입안해보시오.”
“······.”
정도전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글자가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가장 적절할 때 김제를 흔들 겁니다. 변수는 없습니다.”
“무혈입성. 딱 좋군.”
“바로 그렇습니다.”
“훌륭하오. 밀교 교주.”
“주공.”
“왜 그러오?”
“이번에 승전하면 소생이 큰 선물을 드리고 싶습니다.”
“선물?”
“안대와 철퇴. 어떻습니까?”
왕선은 대수롭지 않게 쳐냈다.
“이왕이면 솜씨 좋은 장인의 물건으로 부탁하리다. 밀교 교주.”
옆에 있던 전녹생은 시선을 돌리더니 흐느낀다. 웃음을 참는 거다.
...전녹생마저.
정도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분루를 삼키며 말했다.
“···이번 작전의 마지막은 이희필의 목을 벨 장수를 선정하는 겁니다. 그것이야말로 유종의 미라고 할 수 있지요.”
갈구는 건 이쯤 하자.
왕선은 싱긋 웃으면서 좌중을 돌아봤다.
“유종의 미를 거둘 장수가 있나?”
곧바로 말을 고쳤다.
“아니군. 유종의 미를 거두려면 과정이 아름다워야지.”
“무슨 말씀입니까?”
“나세와 이옥.”
“예. 주공.”
“예. 주공.”
“두 사람 술 한잔하게.”
“예?”
“나세를 아군에 투항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이옥일세. 또, 절체절명의 순간 나세가 전투를 포기하게 한 가장 큰 원인은 이옥의 존재였고.”
두 사람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주공. 일전의 일은 앙금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웃기고 있네. 귀신을 속여.
왕선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두 사람. 염화미소가 가능해질 때까지 술 마시라고.”
“정말 앙금이 없습니다.”
“허. 내가 누구인가?”
“예?”
“나 미륵일세. 자네들 속 훤히 들여보고 있네만.”
이렇게까지 하는데 뭐라고 할 건가.
그날 밤 두 사람은 밤새 술 대결을 펼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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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미륵의 글자라고?”
“미륵을 믿는 사람은 읽을 수 있다더군.”
“이 사람아. 그걸 믿나? 사대부도 아니고 어찌 글자를 읽어? 내가 무식해도 그 정도는 알아.”
“이 사람아. 괘서에 적힌 글자가 어디 한자이던가? 다르지 않나. 미륵의 권능이 실린 글자라고.”
“음.”
“그리고 내가 괜히 말하는 게 아닐세. 얼마 전에 이걸 읽어내는 사람이 있었다고.”
“허. 정말인가?”
“정말이래도.”
그제야 사람들의 시선이 확 끌렸다.
남자는 가슴을 탕탕 두들기면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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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금은 헛웃음을 지었다.
“미륵의 글자?”
“그렇습니다.”
“옴마니 반메홈.”
“옴마니 반메홈. 감히 여쭙습니다.”
“말하게.”
“일찍이 글자를 창제하셨습니까?”
“미륵은 글자를 창제한 적이 없거늘.”
“하면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글자는 거짓이군요.”
“옳다. 거짓이다. 그리고 퍼트린 세력이야말로 마군이다.”
“마군입니까?”
“마군이가 분명하다.”
이금은 은산사 미륵전을 가득 채운 승려들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거짓 미륵이 세상을 어지럽힌다.”
“참된 미륵의 존재를 알려야 합니다.”
“아직 때가 아니거늘.”
“마군이가 중생을 현혹하고 있습니다. 더 늦출 수는 없습니다.”
“연꽃 속의 보석이여.”
“옴마니 반메홈.”
“하산하겠다.”
“오. 미륵이시여.”
< 52화 밀교 교주 정도전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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