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위대한 글자 >
“괜히 이 사람이 시간을 뺏은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아니외다. 또 아무리 바쁘더라도 제일 군사가 청하는 만남을 어찌 거절할 수 있겠소?”
정도전은 싱긋 웃으면서 나세에게 술을 권했다.
“어떻습니까?”
“술맛이 아주 좋군요.”
“자고로 낮술이 가장 맛있는 법이지요.”
“하하. 과연 그렇소.”
“소생이 재미난 이야기를 하나 해볼까 합니다.”
“기대가 크오.”
정도전은 술을 한잔 걸치더니 말을 이었다.
“백로가 있습니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말라는 말이 있을 만큼 청백리의 상징이지요.”
“보슬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날에 백로가 붙박이처럼 그 자리에 서 있지 않겠습니까? 깃털이 모두 젖는데 말입니다.”
“참으로 고결한 새가 아니겠소?”
“그런데 말입니다. 그 속이 조금 다릅니다.”
“다르다고요?”
“예. 실상은 여울의 물고기와 새우를 잡아먹으려다가 사람이 오길래 황급히 움직였지 않겠습니까? 풀 무성한 건너편 언덕으로 말입니다.”
“······.”
“배가 고파 죽겠는데 사람들은 자리를 떠나지를 않아요. 조금이라도 빨리 물고기와 새우를 잡아서 배를 채우고 싶은데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고 고결하다고 칭찬합니다. 참으로 우습지 않습니까?”
나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세상은 장군더러 수하를 위하는 덕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소생의 눈에는 꼭 그렇게만 보이지 않습니다.”
술을 한잔 더 걸친다.
정도전의 표정은 평소와는 달리 날카롭기 이를 데 없다.
“도롱이를 입고 들일을 나온 농부가 풀이 무성한 시냇가에 잠시 몸을 쉬면서 여유를 즐겼답니다. 그때 백로 한 마리가 옆으로 다가왔지 뭡니까? 아무래도 풀더미로만 알고 그랬을 겁니다. 사람이 있는지 생각하지도 못한 거지요.”
“······.”
“백로는 그 자리에서 가만히 서서 시냇물만 쳐다봤습니다. 물 위로 떠 오르는 물고기 따위를 잡아먹으려는 속셈이었겠지요. 농부는 난처했습니다. 만일, 자리에서 일어나면 놀란 백로가 날아갈까 염려가 된 겁니다. 그래서 백로의 사냥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정도전은 다시 술잔에 술을 따랐다.
술병의 술이 술잔으로 이동하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린다.
“농부의 마음 씀씀이가 참으로 기특합니다. 그런데 소생은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압니까?”
“···모르오.”
“백로가 노리는 시냇물의 물고기는 주인이 있거든요.”
“군사.”
나세의 안색은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내가 원나라 출신이라서 이러는 거요?”
“음. 고작 그런 이유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만?”
“나는 주공께 언월도를 받쳤소.”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만?”
다시 평소대로 능청스러운 말투였다.
“백로 이야기가 별로 재미없었나 보군요.”
“······.”
“좋아요. 그러면 이렇게 말하지요. 판단은 이 사람이 합니다.”
너는 내 아래에 있는 사람이다. 뭐 그런 뜻이다.
난세의 눈썹이 꿈틀였다.
정도전은 그를 쳐다보면서 술병을 들었다.
그러나 술병이 향한 곳은 나세의 잔이 아니었다. 자작을 위한 것이다.
나세의 눈에는 갈등이 생겼다.
...어찌해야 하는가?
그러나 갈등은 길지 않았다. 태연하게 손을 뻗었다.
“내가 한잔 드리리다.”
정도전은 물끄러미 쳐다만 봤다.
나세는 천천히 말을 보탰다.
“편히 받으시오.”
그제야 정도전은 빙그레 웃으면서 술병을 건넸다.
“가득 따라주시구려.”
“여부가 있겠소.”
그랬다. 지금 정도전은 나세를 제압한 거다.
군부는 위계가 중요하다.
전주가 아니라 고려라는 나라의 체계를 본다면 정도전은 절대 나세 위에 존재할 수 없다. 마천목과 이옥은 둘째 문제다.
그리고 이건 이대로 상당한 문제로 번질 가능성이 컸다. 전주의 군권을 가진 제일 군사로서 군략을 펼치는 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으니까.
이건 절대 기우가 아니었다. 얼마 전 회의 때 이옥과 벌인 신경전이 전장으로 번질 가능성은 농후하다. 심지어 제일 군사로서 입안할 군략에 토를 달면서 따질 수도 있다. 이건 원칙을 떠나서 정도전의 성정으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 이옥 장군 말이외다.”
“···말씀하시구려. 군사.”
“두 사람이 펼치는 선의의 경쟁은 문제 삼지 않을 거요. 그러나 또다시 주공께서 계시는 자리에서 그런 무례한 행동을 하면 그냥 넘어가지 않겠소.”
“···알겠소.”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이는 이옥 장군에게도 분명하게 전할 거니까.”
그 말을 끝으로 정도전이 술병을 내밀었다.
술잔을 받으면서 나세가 물었다.
“그나저나 주공께서 정말 글자를 가르치시오?”
정도전은 헛웃음 지었다.
정말로 그 해괴한 글자를 들고 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기면서 나세를 멀뚱히 쳐다봤다.
“혹시 손을 잘 지지는 방법을 아오?”
“···손을 지진다고 하셨소?”
“기가 막히게 지지는 방법이 있으면 말해주시오.”
정도전의 입가에는 익살스러운 미소가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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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원들은 웅성거렸다.
전주 목사이자 미륵이신 분께서 이르신 말이 너무나도 얼토당토않기 때문이다.
예상했던 반응. 대수롭지 않다.
“의심할 필요 없네.”
“아, 아닙니다. 단지 놀라서 그랬습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얼추 열흘이면 세상 만물을 글자로 적을 수 있을 것이다.”
“열, 열흘입니까?”
“더 빠른 사람도 있을 것이다.”
“!!!”
“놀라지 말게.”
“호, 혹시 이것이 미륵의 글자입니까?”
“어?”
“미륵의 글자가 아니라면 어찌 열흘 만에 익힐 수가 있겠습니까?”
왕선은 헛웃음을 삼켰다.
여기서 이게 이렇게 치고 올 줄 몰랐다.
슬쩍 보니 정보원들의 눈이 반짝인다.
...그래. 뭐. 그렇게 하자.
“옳다. 이는 미륵의 글자이니라. 하여, 가능한 일이다.”
이왕 이러는 김에 제대로 하기로 했다.
단서를 달았다.
“그러나 미륵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이를 익힐 수 없다.”
“반드시 익히겠습니다.”
그렇게 열흘이 지났다.
사람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지금까지 보여준 왕선의 어떤 행보보다 놀라운 일이었다.
단 며칠 만에 배울 수 있는 글자라니?!
“진짜 열흘 만에 글자를 익혔어.”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 발생했어.”
“이건 우리가 한 일이 아니야.”
“미륵의 권능이 분명해.”
“그래. 이건 그야말로 미륵의 글자야.”
“감히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권능이 담긴 글자야.”
그랬다.
그게 아니고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학자들도 평생 정진하면서 익히는 게 글자다.
그런데 미륵의 언어는 고작 24자였다.
24자 만으로 천하 만물을 모두 표현할 수 있었다.
사실 이 시대 말을 정확하게 표현하려면 훈민정음 28자가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왕선이 그 28자를 알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왕선은 개의치 않았다. 24자만 하더라도 충분하다. 왜? 이 글자는 그런 글자니까.
왕선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불국정토는 고통이 없다. 글자를 익히는 고통을 어찌 내리겠는가?”
“미륵이시여.”
“불국정토는 차별이 없다. 글자를 아는 사람만 안다면 그 또한 차별이 아니겠는가?”
“오. 미륵이시여.”
“그리하여 미륵의 글자를 창제하여 내렸노라.”
“과연 미륵이십니다.”
그야말로 인세에 기적이 내려졌다.
왕선은 두 손을 뻗어서 하늘을 가리켰다.
“불국정토는 입에서 나오는 모든 소리를 글자로 옮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세에 존재하는 글자는 그러지 못한다. 이런 까닭으로 많은 중생이 말하고자 할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느니라. 내 이를 가엾게 여겼기에 미륵의 권능으로 24자를 내렸노라. 이는 불국정토의 상징일 것이니 그야말로 미륵의 글자이니라.”
“미륵이시여!”
“말하는 대로 적어라!”
“말하는 대로 적겠습니다!”
“생각하는 대로 적어라!”
“생각하는 대로 적겠습니다!”
“옴마니 반메홈.”
충격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열광의 도가니가 남았다.
그런데도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그 강도가 실로 컸는데 바로 삼봉 정도전이었다.
“이, 이럴 수가.”
“군사도 배워야겠지?”
이죽거리는 목소리.
정도전은 흠칫 놀라면서 고개를 돌렸다.
...미륵께서 웃고 계셨다.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하는 우매한 행동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미륵의 제일 군사가 말이외다.”
“어, 어찌···.”
“못 들었소? 미륵의 글자외다. 미륵을 경배하는 마음만 있다면 누구나 익힐 수 있다오. 그야말로 미륵의 권능이지요.”
“고, 고작 24자이거늘.”
“거. 아직도 믿지 못하오?”
“···아닙니다.”
왕선은 싱그럽게 웃었다.
그의 뒤로 하인들이 열기가 풀풀 나는 도구를 들고 왔다.
그걸 본 정도전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왕선의 미소가 더 진해졌다.
“남아 일언 중천금?”
“하하.”
정도전의 이마에 굵은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한 번만 봐주십시오.”
“내가 왜?”
“잘하겠습니다.”
“애초 잘하지 그랬소?”
왕선은 정도전이 나세의 기선을 제압한 일을 알고 있다.
나세로서는 무척이나 억울할 수도, 통탄할 수도 있으나 잘한 일이다.
고려 최고의 숙장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나세를 그냥 군부에 집어넣었다가는 위계부터 다 흐트러질 수도 있다.
그런 부분에서 보면 정도전은 정말 난 사람이었다.
그런 거물을 단번에 제압하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니까.
하긴. 이러니까 나라를 창업했겠지.
그랬다. 왕선은 이처럼 대단한 사람의 손을 지지는 맛을 느끼고 싶었다.
“소생이 많은 고민을 해봤습니다.”
“고민은 손을 지져도 할 수 있소만?”
“들어나 보십시오.”
점차 열기가 다가오자 정도전은 핼쑥한 안색으로 말했다.
“미, 미륵의 글자를 이대로 보급하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아쉽군. 기껏 만들었는데.”
열기는 움직였다.
정도전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오, 옴마니 반메홈!”
왕선은 눈을 껌뻑였다.
지금 정도전의 입에서 놀라운 내용이 나온 것이 아닌가?
심지어 제 의지로 말이다. 실로 놀라운 생존 의지가 아닐 수 없다.
정도전은 잽싸게 입을 열었다.
“미륵의 글자는 숨겨야 합니다.”
“왜 그렇소?”
“미륵의 글자를 만천하에 알리는 건 난세가 종식된 이후가 되어야 합니다.”
그 순간 왕선이 손을 들었다.
정도전의 입은 속사포처럼 움직였다.
“훌륭한 도구는 시절과 일치해야 합니다. 지금 미륵의 글자는 전주의 힘을 강하게 하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작금의 천하는 수성의 시대가 아니지 않습니까.”
“······.”
“난세를 종식하는 데 미륵의 글자는 큰 도구가 될 겁니다.”
사실 왕선은 한글이 한자의 자리를 대신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언젠가는 그렇게 되더라도 지금 당장 고집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자고로 지배적인 문자의 위치는 지식을 담고 있는 정도로 결정 나는 법이다.
당장 한글을 지배적인 글자로 만들어 내려면, 방대한 양의 서책을 한글 인쇄물로 찍어야 한다. 그런데 그럴 수 있는 여력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 또, 그건 하루 이틀 걸리는 일도 아니다.
군웅할거로 돌입한 이런 난세에 한가롭게 그런 개혁을 하고 있을 수는 없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역량은 난세의 극복에 맞추는 게 옳다.
하여, 한글은 가장 효율적인 정보조직의 글자로만 사용할 생각이었다. 체계를 잘 잡고 훈련을 해낸다면 천하에서 가장 기민한 정보조직의 포문을 열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사실 섣불리 한글의 전면적 보급을 시도하다가 한글의 효용성이 다른 군웅까지 흘러가게 된다면 괜한 짓만 하게 되는 거다. 뭐하러 그런 짓을 하는가?
결국, 인위적인 수단으로 한글의 위치를 끌어 올리는 방법 따위는 지금으로서는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계 최고의 글자는 때가 되면 알아서 제 자리를 찾게 될 거고, 한글이 지배적인 글자가 되게끔 통치로서 밀어주는 건 난세가 끝장난 다음이다. 그때 전면적인 편찬사업을 진행하면 될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글은 미륵의 언어로 알려질 거다. 이건 정략, 군략에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왕선은 정도전을 지그시 쳐다봤다.
“글자 익혀야지요?”
“물론입니다.”
“이 글자는 미륵의 권능이 들어간 미륵의 글자라오. 미륵을 믿지 않으면 못 익힌다는 말이외다.”
“······.”
“군사가 이걸 익히면 진실로 미륵을 숭배하는 걸 의미한다오. 거는 기대가 크오.”
정도전은 무조건 익히게 될 거다.
이 글자는 모든 사람이 익힐 수 있는 권능이 깃든 것이니까.
“···기대에 부합하겠습니다.”
정도전은 죽을상을 하면서 답했다.
“아. 정보조직 말이외다.”
“예.”
“괜찮은 이름도 하나 만들어보시오.”
“알겠습니다.”
왕선은 싱그럽게 웃으면서 돌아섰다.
이로써 한글 보급의 시작은 순조롭게 진행된 거다.
물론 이것이 마냥 순탄하지는 않았다.
“어째서 글자를 익히지 않겠다는 건가?”
발이 빠른 정보원 중 한 명인 만리는 눈치를 살폈다.
왕선은 자애롭게 웃으면서 말했다.
“솔직하게 말해도 탈이 없다.”
“···바쁘게 다닐 시간도 부족합니다.”
“익히는 데 얼마 걸리지 않는데?”
“솔직히 눈치 빠르게 정보를 파악하고, 열심히 달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만리는 제법 훌륭한 정보원이었다. 그래서 그럴까? 글자를 몰라도 정보원의 역할을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뭐.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왕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정말입니까?”
“대신 내가 내린 임무를 하나 완수하면 네 말대로 하게 해주지.”
“반드시 성공하겠습니다.”
왕선은 서찰을 하나 건네면서 말했다.
“여기 적힌 걸 해내거라.”
“글자를 읽지 못합니다.”
“물어보면 되지 않겠느냐.”
“알겠습니다.”
그 직후 만리는 서찰을 들고 바쁘게 이동했다.
“이보게.”
“어. 만리. 왜 그러나?”
“이것도 읽어보게. 목사께서 내리신 명령일세.”
“그래? 어디 한번 보지.”
함께 일하는 천리는 서찰을 읽더니 만리를 슬쩍 쳐다봤다.
“모르겠네.”
“아니. 어째서 모르는가?”
“아직 배움이 짧아서 그래.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
“알겠네.”
그런데 다른 사람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더는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그럴수록 만리는 확신했다.
글자를 익히는 건 큰 효용성이 없다고 말이다.
다시 서찰을 들고 왕선을 찾았는데 모두 모여 있다.
“그래. 일은 잘 처리했나?”
“아무도 글자를 읽지 못했습니다.”
“정말인가?”
“예. 어쩔 수 없이 명령을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직접 일러주신다면 반드시 처리할 자신이 있습니다.”
“천리.”
“예.”
“만리의 말이 사실인가?”
“아닙니다. 글자를 읽었습니다. 소인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모두 내용을 알고 있습니다.”
“천, 천리! 그게 무슨 말인가? 분명 내게 뜻을 모르겠다고 했었네.”
“서찰의 내용대로 한 걸세.”
“대, 대체 무슨 말이야?!”
만리는 당황하면서 서찰을 펼쳤다.
그 내용은 간략했다.
[누구도 내용을 알려주지 말라.]
그리고 서찰에 적힌 뜻을 알게 된 만리는 눈만 껌뻑였다.
“절체절명의 순간 내가 너희 모두에게 말을 전하지 못할 수도 있다. 다른 사람에게도 말을 전해 듣지 못할 수도 있다. 그때 글자를 모른다면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 바로 지금처럼.”
왕선의 말이 이어졌다.
“너희는 가장 먼저 움직이고, 가장 은밀해야 한다. 발이 빠른 건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이 다는 아니다. 제대로 싸우기 위해서는 제대로 배워야 한다. 열심히 싸우더라도 잘 싸우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니라. 하여, 새로운 글자를 내린 것이다. 만리야.”
“예, 예.”
“아직도 본관의 뜻을 모르겠느냐.”
만리는 시뻘게진 안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통곡하듯 말했다.
“이놈이 어리석었습니다. 벌을 내려주십시오.”
“모르는 건 죄가 아니지. 그러나 이제는 알았으니 앞으로는 죄가 된다.”
왕선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 글자가 지금은 고작 정보를 주고받는 도구로만 쓰이지만, 먼 훗날 너희가 이 땅에 존재했음을 말하는 가장 위대한 수단이 될 것이다.”
위대한 글자가 맞으니까.
“훗날 누군가 너희의 생명을 위협할 때 이 글자로서 싸우라. 하면, 이길 것이다.”
붓은 칼보다 강하며, 가장 강한 붓은 한글을 품은 붓이기에.
“훗날 잠시 힘이 부족하여 이 땅이 혼란에 빠졌을 때 적에게 모두 빼앗겨도 오직 이 글자만은 지키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어찌하여 그렇습니까?”
“오직 이 글자만이 이 땅이 너희의 터전이었음을 기억할 것이기에 그러하다.”
아주 잠시 숨을 골랐다.
“비록 지금은 전주의 몇 명만 아는 작전상의 글자이지만 훗날 이 땅의 모든 이가 익히게 될 것이다.”
“어째서 모두 알아야 합니까?”
“이 글자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사치이니라.”
왕선이 힘을 주면서 말했다.
“이 사치를 고려 만백성에게 전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습니다!”
“너희가 선봉에 설 것이다. 하여, 당부하겠다.”
“이르십시오.”
“미륵의 글자는 너희의 벗으로 삼고, 글자가 적힌 종이는 정원으로 삼아라. 그리하여 벗의 아름다움을 즐기며, 정원의 열매를 먹으면서 천하 만물을 탐하라.”
...학교는 다음에. 지금은 바쁘다.
마무리를 지었다.
“이 글자를 안다는 것. 그것은 너희가 선택받았다는 가장 큰 증거이니라.”
이로써 종래 가졌던 미륵의 권위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글자. 바로 글자 때문에.
그러니까 위대한 한글로 인해서.
그랬다. 일자무식이 며칠 만에 글자를 깨우치는 건 지금까지 개척한 인간의 영역으로는 감히 설명할 수 없었다. 이는 오직 절대적인 미륵의 권능을 의미했다.
< 51화 위대한 글자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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