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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50화 (50/187)

< 50화 평가 >

정도전은 이토록 원통할 수가 없었다.

하늘을 노려보면 욕을 해대고 싶을 정도로 원망스럽다.

어쩌자고 그딴 내기를 했을까?

어쩌자고 궁예의 수작질에 넘어갔을까?

...옴마니 반메홈이라니.

...심지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죽고 싶고 또 죽고 싶었다.

“죽긴 왜 죽소?”

“!!!”

갑자기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

정도전은 사스라 치게 놀랐다.

“뭐, 뭡니까?!”

“당신 주공이지. 뭐긴 뭐요?”

왕선은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다.

“거. 쓸데없는 생각 그만하고 회의 갑시다.”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바쁘오.”

“!!!”

정도전을 뒤로한 채 왕선의 발걸음은 마치 축지법을 쓰듯 빠르게 움직였다.

정도전은 분루를 삼키며 뒤를 따랐다.

오늘은 중요한 날이었다.

군웅할거가 개막된 이후 처음으로 치른 전쟁을 냉철하게 평가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논의는 이어졌다. 그 속에 낯간지러운 칭찬 따위는 없었다. 철저하게 부족함을 도출하고자 했다. 왕선은 당연하거니와 정도전, 나세, 이옥, 마천목, 전녹생은 당연히 그럴 수 있는 인물이었다.

“함열현에서 매복하여 전주의 병사를 기다렸습니다.”

적장이었던 나세의 말.

“매복의 전제 조건은?”

“당연히 이희필과 안주의 밀월 관계를 전주가 모르는 겁니다.”

“좋아. 안주와 함께 작전을 수행했던 입장에서 계속 말해보게.”

“양군의 동맹을 전주가 알아차렸다고 하지만 사실 그때는 늦은 감이 없지 않았습니다.”

나세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전주는 군사적인 능력으로 안주와 이희필을 격퇴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의 말대로다.

만일 미륵사 재가화상의 도움이라는 반칙에 가까운 일이 없었더라면 익주 전선은 골치 아파졌을 거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전술적인 문제였다.

근본적으로 전략적인 문제, 즉 물자가 부족하다.

속전속결로 전투가 매듭지어져서 큰 무리는 없었는데, 장기전으로 진행됐다면 사정은 곤란해졌을 거다.

아직 왕선의 거점은 튼튼하지 못한 거다.

그러나 적장이었던 나세의 말은 충분히 공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옥이 나서려고 할 때 정도전이 손뼉을 '탁' 치면서 나섰다.

“정답. 바로 그겁니다. 과연 나세 장군.”

“과찬이시오.”

왕선이 끼어들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오?”

“이번에 안주와 이희필과 교전을 벌이면서 노출된 문제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뭐요?”

“첫 번째 우리는 동시에 두 곳에서 전투를 벌일 수 있는 능력이 아직은 부족하다는 겁니다.”

“두 번째는?”

“정보를 파악하는 능력이 너무 엉망입니다.”

정도전은 약간 아쉬운 듯 말을 이었다.

“나세 장군이 가장 먼저 지적한 문제와 같은 겁니다. 만일 아군이 양군의 밀월 관계를 미리 알았다면 작전을 더 수월하게 펼쳤을 겁니다. 아마 김제도 우리가 차지했을 수도 있지요.”

참으로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정도전이 코를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뭐. 김제가 넓은 평가를 끼고 있긴 하지만 냉정하게 평가하면 땅만 넓은 겁니다. 이희필은 그 옥토를 제대로 활용할 능력이 없습니다.”

“해서 김제를 도모하자는 말이오?”

“음. 저수지와 모내기법으로 폭발적인 군량 확보가 이뤄지기 전까지는 몸을 좀 사려야 합니다. 무리하게 군사를 일으키는 건 자멸의 지름길입니다.”

“첫 번째로 제기한 문제가 발목을 잡는구려.”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건 시간이 해결해줄 겁니다.”

“시간이 갈수록 전주와 김제의 역량은 벌어지게 될 겁니다. 심지어 익주까지 도모한 아군입니다. 충분합니다.”

자신감이 가득한 전녹생.

그의 말대로 전주의 생산량은 급증하고 있다.

분위기는 훈훈해졌다.

“그런데 미륵사는 어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이번에는 이옥이다.

“이번에 겪어본 재가화상의 힘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나세 장군.”

“예. 주공.”

“솔직하게 평가할 때 재가화상은 어땠나?”

“만일 그때 전면전을 펼쳤다면 소장이 필패했을 겁니다.”

“그때?”

“예. 소장이 이끌던 병사들의 사기가 곤두박질친 상태였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이를테면 대회전이라던가.”

“이깁니다.”

“누가?”

“소장이 이깁니다.”

나세는 묵직한 어조로 덧붙였다.

“반드시.”

“재가화상은 300명. 나세 장군의 병사는 200명이오. 수적 열세인데 어찌 그렇게 장담하시오?”

약간 불편함이 담긴 이옥의 말.

사실 재가화상을 이끌던 사람은 이옥이었다.

그러니까 나세의 말은 받아들이기에 따라서 이옥을 제압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기도 했다.

나세도 이를 인지하고 있으나 굳이 변명하지는 않았다.

“있는 그대로 말했소.”

“허. 이보시오. 재가화상의 무력은 일당백이었소. 안주를 토벌할 때 보지 않았소?”

“장군전을 펼치는 게 아니라 창칼이 난무하는 대회전이오. 사찰에서 수련한 무승과 대회전을 펼치는데 백전을 거친 병사들이 감당하지 못할 거라는 말이 틀린 거요.”

두 사람의 신경전이 점입가경이다.

사실 이건 기량이 비슷한 두 장수가 한 곳에 모이면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현상이기도 했다. 어쩌면 이런 점을 우려해서 군웅들이 나세를 거두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지병마사 안주는 갖은 겁박을 통해서 나세를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수하의 끔찍하게 아끼는 나세를 이용하여 일회성으로만 활용하려고 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만일, 안주가 나세를 중용하고자 했다면 절대 할 수 없는 행위였다.

반면, 왕선의 수하가 된 나세는 객장 나세와는 입장이 같을 수는 없다. 떠돌이 장수로서 눈치를 살피던 때와 달라야 한다. 해서, 장수로서 자기 생각을 가감 없이 던지는 것이다.

“실로 대단한 자신감구려.”

“자신감이라. 백전을 거친 내 경험을 말한 것이외다.”

두 사람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그때

“그것도 그거지만 김제의 움직임을 면밀하게 파악할 역량도 갖춰야 하겠지. 우리가 상대할 적이 이희필이 끝은 아니니까.”

나지막한 왕선의 목소리.

심지어 내용이 두 사람의 논쟁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졌다.

“물론입니다. 해서, 정보조직 확충을 건의합니다.”

정도전이 자연스레 답했다.

나세와 이옥은 그제야 자신들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황망함에 죄를 청하려고 했으나

“그 부분을 집행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이 무엇이오?”

왕선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정도전도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이지요. 원래 정보조직의 생명은 속도와 정확성이 아니겠습니까? 이를 원칙으로만 삼으면 글자를 깨우친 사람으로 조직을 구성해야 하는데 가당치도 않지요.”

나세와 이옥의 대립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음. 현실적으로 글자를 아는 사람으로만 조직을 굴리기는 어렵겠군.”

“예. 어쩔 수 없이 발 빠르고 눈치 빠른 사람을 많이 씁니다.”

“발 빠르고 눈치도 빠른데 글자까지 알면 금상첨화겠군.”

“모두 글자를 알면 실로 엄청난 힘을 낼 수가 있지요. 매번 대면하지 않아도 서찰로만 뜻을 전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이상에 불과합니다. 주공께서 언급한 정도가 되는 사람이라면 요직에 앉습니다. 어려운 한자를 깨우친 사람이 아닙니까? 평범한 백성은 불가능하지요. 뭐.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세력이 다 그렇습니다. 만일, 이를 해결할 방법이 있으면 사상 최강의 조직이 창설되는 거지요.”

“음. 내가 그 문제를 해결해주리다. 사상 최강의 조직을 창설해보시오.”

“예. 주공께서 그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말하던 정도전은 말을 멈추고 왕선을 쳐다봤다.

황당함이 가득 담긴 눈빛.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정보조직이 사용할 수 있는 글자를 만들어보겠다고 했소만?”

“···왜 이럽니까?”

“사상 최강의 조직이 탐이 나서 그렇소만?”

“주공.”

“말씀하시오.”

“우리 바쁩니다.”

“아오.”

“다행이군요.”

“그래서 한 말이오.”

정도전은 기가 막혔다.

“당장 소생의 눈에 보이는 물건만 하더라도 십수 개가 넘습니다. 발 빠르고 눈치 빠른 백성이 이걸 언제 외우고 있습니까? 그럴 시간에 강도 높은 훈련을 하는 게 좋습니다.”

아무래도 그들에게 한자를 가르치자는 말로 이해한 거 같다.

왕선은 가볍게 일축하기로 했다. 이건 어차피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지 못할 거니까.

“나 미륵이오.”

“아. 그렇습니까?”

“아. 그렇소.”

“불국정토가 참으로 알차게 꾸려집니다?”

“내 장담하리다.”

“참으로 알차게 꾸려지는걸?”

“군사가 짧은 식견을 통탄하면서 미륵을 외칠 것이라오.”

“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소생이요?”

“물론이외다. 저번에 보니까 아주 잘하던데?”

참담했던 며칠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정도전의 볼이 크게 씰룩였다.

왕선은 빙그레 웃으면서 화제를 돌렸다. 정확하게는 종결되지 않은 화두를 꺼낸 거다.

“미륵사는 그대로 두겠네.”

“주공. 큰 전력이 될 겁니다.”

“다른 군웅도 재가화상 끌고 나오면 어쩌려고?”

“···그건 주공만이 가능합니다.”

그렇긴 하지만.

사실 왕선도 아쉽긴 했다.

그러나 아닌 건 아니었다.

“필요하면 내가 적절하게 부르겠네. 그러나 절체절명의 위기가 아닌 이상 미륵사의 힘이 속세로 나오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네.”

“어째서 그렇습니까?”

“나는 이 나라가 이 사달이 난 원흉에 사찰세력도 한몫 단단히 했다고 생각하네. 제대로 정화한 모습을 보이지 않은 이상 내 오른쪽에 앉게 할 생각이 없어. 조금 더 지켜볼 것이야.”

“음.”

“그러니 미륵사는 이 땅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로 남겨두겠네.”

이토록 왕선의 의지가 굳건하다.

결국, 이옥은 수긍했다.

그렇게 회의를 파했다.

정도전은 물러나지 않고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주공.”

“왜 그러오?”

“왜 그러십니까?”

“본관이 뭘? 거기 차나 드시오.”

“맛없습니다. 이걸 대체 무슨 맛으로 먹는 것인지.”

“세상은 그런 걸 품격이라고 하오.”

“소생은 품격과 안 친합니다. 풍류라면 또 모를까.”

“주사겠지.”

“주공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르는군요. 실로 엄청난 술향이었는데.”

왕선은 더 대꾸하지 않고 지필묵을 꺼냈다.

그리고 일필휘지로 써 내려갔다.

그걸 지켜본 정도전은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왕선은 그를 슬쩍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차가 입에 맞지 않소?”

“말씀드린 대로 영 별로군요. 주공께서 서찰에 적어 내리는 이상한 그림도 별로고요.”

“음. 이상한 그림이라.”

“어쨌거나 할 일이 태산인지라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나세 장군과 따로 할 말이 있어서요.”

꼭 집어서 나세를 거론한다.

왕선은 모른 체했다.

“아. 그렇군. 그래도 이거나 한잔 들고 가시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듯한 차도 맛이 없는데, 차갑게 식어버린 차를 먹어서 뭐합니까?”

“내가 보장하리다. 맛이 꽤 좋소.”

왕선이 호언장담하자 정도전은 흥미가 동했다.

사실 그렇지 않아도 왕선이 마시던 차의 향이 계속 끌렸다.

“음. 소생의 차와 다른 겁니까?”

“물론이오.”

“허. 먹는 거로 차별을 하는 건 법도에 어긋납니다만?”

“주공과 군사가 같은 걸 먹는 건 아름다운 법도랍니까?”

“일단 마시고 평해보지요.”

정도전은 어물쩍 왕선의 찻잔을 들어서 코를 들이밀었다.

“허.”

그의 입에서 감탄사가 나왔다.

“이토록 향이 좋다니.”

“마음에 드오?”

“험험. 이런 향이라면 차 맛도 기대되는군요.”

왕선이 손을 움직이며 권하자 정도전은 기분 좋게 입을 댔다.

홀짝이는 소리가 들렸다.

“!!!”

이, 이건?!

정도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왕선은 그윽하게 웃었다.

정도전은 다급하게 남은 차를 다 마셨다.

마치 뭔가를 확인하려는 모양새였다.

“!!!”

왕선은 빙그레 웃었다.

“마음에 드오?”

찰나, 정도전은 눈을 부라렸다.

-진정 궁예의 현신이로다. 내게는 맛이라고 찾아볼 수 없는 차를 내주고, 본인은 이 맛 좋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니!

애써 침착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치밀어오르는 억겁의 분노는 숨겨지지 않았다. 힘겹게 만고의 인내를 꺼내서 백이십 번 순화하여 입을 열었다.

“기가 막히는군요.”

“마음에 드냐고 물었소만?”

“천하에 이런 고약한 일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대국을 논하는 자리에서 이런 몹쓸 차를 마시다니.”

“다 적었소. 한번 보겠소?”

“진작에 다 봤습니다. 참으로 해괴한 그림입니다? 이 신통방통한 차 맛처럼?”

“내기 하나 하겠소?”

“손을 지지기로 하지요.”

“합당하오.”

“좋습니다.”

정도전은 찬바람을 쌩쌩 날리면서 관청을 나섰다.

...그의 손에는 왕선의 차 병이 들려 있었다.

홀로 남은 왕선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자신감이 넘치는 미소였다.

왜? 확신하니까.

이건 검증된 세계 최고의 글자니까.

남은 건 정도전의 손을 지지는 가장 훌륭한 방법을 찾아내는 거다.

< 50화 평가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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