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미륵이니라-49화 (49/187)

< 49화 유학을 익힌 미륵 >

정도전은 격하게 반대했다.

“이 선생은 고려에서 손에 꼽히는 유학자입니다. 그런데 그와 유학 논쟁을 펼치다니요?”

“나도 만만치 않소.”

“허. 좋습니다. 그렇다고 칩시다.”

“그렇다고 치는 게 아니라 진짜라오.”

“예. 예. 하지만, 굳이 이리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문정은 진심으로 설복시키려는 큰 뜻이니 말리지 마오.”

“동서고금에 어떤 주인이 수하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납니까?”

“본관.”

“허.”

뻔뻔한 왕선.

정도전은 헛웃음을 지었다.

“책임 못 집니다.”

“내가 이기면 군사의 입에서 ‘옴마니 반메홈’ 삼창. 어떻소?”

“지면요?”

“미륵장사 그만하리다.”

“허. 정말입니까?”

눈을 동그랗게 뜬 정도전.

왕선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거. 예상한 반응이 아닌데?”

“···무슨 말씀입니까?”

“미륵장사 싫어하는 거 같던데, 막상 세력 팽창에 도움 되는 거 같으니까 마음에 들었나 보오?”

“험험. 왜 이러십니까? 소생은 성리학자입니다.”

“누가 아니라고 했소? 어쨌거나 이제 시간이 된 거 같으니 갑시다.”

여유가 가득한 왕선의 발이 멈췄다.

언덕은 참으로 작았고, 정상은 평평했다. 전주천이 한눈에 들어왔고, 전주성도 아래로 굽어볼 수 있었다. 가만히 있노라면 하늘의 존엄함에 숙연해지고, 전주성의 풍요로움에 마음이 가득 찬다. 지적은 새소리는 이곳이야말로 사람이 편히 살 수 있는 불국정토임을 말해주고 있다. 난세가 개막된 혼란한 고려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너무나도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이곳은 황산에서 대승을 거둔 이성계가 종친을 모아서 승전 잔치를 베풀면서 대풍가를 부르며 야심을 보인 곳, 훗날 오목대라는 정자가 생기는 곳이었다.

지금 왕선이 두 발로써 이 땅을 밟고 있다.

“여기가 적당하겠군.”

왕선은 뒤돌아보면서 싱그럽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본 이문정은 소름이 돋았다.

유학 논쟁을 하자고 해서 왔는데 뭔가 불안함이 엄습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구인가? 고려를 대표하는 유학자 중 한 명이다.

마음을 다잡은 채로 입을 열었다.

“이제 시작합니까?”

“거. 성미가 급하군. 고된 몸을 좀 쉬고 하자고.”

왕선은 잠시 주변 경치를 구경하는 시늉을 하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지금부터 필요한 건 미륵 관심법으로 포장한 미륵의 현신이 아니라, 냉철한 현실 정치인의 모습이었다.

“이제 시작하지.”

“알겠습니다.”

“내가 먼저 운을 떼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일찍이 전주의 유력가가 내게 큰 고초를 당한 건 인격도 닦지 못하고 학문도 부실하며 옳은 일을 듣고도 행하지 못하고, 흠집을 고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이문정은 낯빛은 시뻘게졌다.

아픈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그리고 또 놀랐다.

지금 왕선의 입에서 나온 건 ‘논어 7편’에 나온 내용이다.

설마하니 이를 알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한 거다.

왕선은 그의 눈을 지그시 쳐다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이제부터 제대로 유학을 포함한 천하의 이치를 논해보지.”

이문정은 자세를 고쳐잡았다.

나지막하게 말했다.

“노자는 그대로 하려고 하는 일이 있지만, 장자는 도무지 하려고 하지 않는데, 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다만 하려고 하지 않는다.”

-주자어류다.

“주자어류에 나오는 내용이군.”

“!!!”

“다음 내용을 본관이 이어가면 되겠는가?”

-공회가 말했다. 장자는 노자에 비교하면 비교적 조금 온순합니다.

“공회가 말했다. 장자는 노자에 비교하면 비교적 조금 온순합니다.”

“!!!”

“거, 입에 벌레 들어가겠네.”

“허, 험.”

“내가 계속 이어가지. ‘주자가 말하기를 노자는 양보하는데 애써 노력하였고, 장자는 무엇을 발견하면 그것이 이상한 것이 되었습니다. 장자는 질탕하였고, 노자는 수렴했기 때문에, 다리를 가지런히 하고 손을 거둬들였지만, 장자는 어떠한 규칙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규범에 매이지도 않았습니다.’ 어떤가?”

“그것이···.”

-학문이 이리도 깊단 말인가?

왕선은 여유롭게 웃었다. 하지만 속내까지 그런 건 아니었다.

...아저씨. 빨리 다음 구절 떠올려봐.

안 되겠다 싶어서 빙그레 웃으면서 말을 꺼냈다.

“이번에는 다른 걸 해보지.”

“···순자가 말했다. ‘사람의 성(性)은 악하니, 선하게 되는 것은 인위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굽은 나무는 반드시 도지개를 갖추거나 쪄서 바로잡은 뒤에 곧게 되고, 무딘 쇠는 반드시 숫돌에 간 뒤에 날카롭게 된다. 지금 사람의 성(性)은 악하니 반드시 스승의 법도를 배운 뒤에 바르게 되고, 예의를 얻은 뒤에 다스려지게 된다.’ 이어보십시오.”

“얼마든지.”

“어서 하십시오.”

“음.”

“왜 그러십니까?”

왕선은 잠시 눈을 감았다.

“옴마니 반메홈.”

“뭐하십니까?”

기다려봐. 다 시간이 필요한 일이니까.

슬쩍 실눈을 뜬 채로 말했다.

“주자가 말했다. ‘순자가 마음을 기를 때 성(性)보다 좋은 것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순자는 본래 성을 알지 못한 것이다. 이미 성하다면 마음을 어찌 기를 수 있겠는가?”

이문정은 입술을 깨물었다.

“고자와 맹자의 논쟁. 어떻습니까?”

“좋지.”

“주공께서 고자 하십시오.”

“그것만은 싫소.”

갑자기 말투까지 바뀐다. 이문정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모르십니까?”

“그건 아닌데, 그냥 싫소. 맹자 하겠소. 이것만은 양보해주시오. 부탁하오.”

“···알겠습니다.”

“참으로 감사하오. 고자.”

“······.”

“뭐하오. 고자. 하시오?”

이문정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타고난 것을 성(性)이라고 합니다.”

“고자야. 타고난 것을 성이라고 한다면, 흰 것 희다고 하는 것과 같으냐?”

“그렇습니다.”

“오. 과연 고자로다.”

“······.”

“고자야. 고자야. 하면, 개의 성이 소의 성과 같으며, 소의 성이 사람의 성과 같은 것이냐? 네 말대로라면 인의예지의 순수한 것이 사람과 동물이 같다는 것이니 참으로 틀려먹었구나. 네가 그래서 고자이니라.”

“성(性)은 버드나무와 같고, 의(義)는 버드나무로 만든 그릇과 같으니, 사람의 성(性)을 인의라고 여기는 것은 버드나무를 그릇이라고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성(性)은 본래 인의가 없어서 반드시 바로잡은 뒤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고자야. 고자야. 네가 그래서 고자이니라.”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고자야. 버드나무의 성질을 따라서 그릇을 만들었느냐? 아니면, 장차 버드나무를 죽이고 해쳐서 그릇을 만든다면, 또한 장차 사람을 죽이고 해쳐서 인의를 한다는 건가?”

“···성(性)은 여울물과 같습니다. 동쪽으로 물길을 트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물길을 트면 서쪽으로 흐르오. 사람의 성이 선하거나 선하지 않은 구분이 없는 것은 마치 물이 동쪽과 서쪽으로 나누어지지 않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허. 참으로 고자다운 발상이로다.”

“왜 이러십니까?”

“고자야. 잘 생각해보라. 동서로 흘러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물은 진실로 상하의 구분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성이 선한 것은 물이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과 같다. 사람은 선하지 않음이 없고 물은 아래로 흘러내려 가지 않음이 없다. 지금 물을 쳐서 튀어 오르게 한다면 이마를 지나게 할 수 있고, 산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이것이 물의 성인가? 이는 단지 그렇게 만든 것에 불과하다. 사람의 성 또한 이와 같다.”

이문정은 질린듯한 표정이었다.

-이, 이럴 수가.

왕선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네가 무슨 생각으로 날 주인으로 섬기겠노라고 말하였는지 알고 있다. 해서, 오늘의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여, 역시 이 자는 궁예가 분명하다. 속내를 다 훤히 들여다본 거야.

이문정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본관은 백성의 이름으로 미륵이 되었다. 그것이 단지 혹세무민의 길이라고만 생각했나?”

“그, 그것이···.”

“세상의 이치를 모두 알고자 한다. 그래야 백성이 원하는 미륵이 될 수 있으니까.”

이문정의 안색은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완벽하게 왕선에게 제압당하고 만 것이다.

“본관은 다른 욕심이 없다. 나 스스로 유학자들이 이르는 혹세무민의 길을 걸어서 백성이 말하는 혹세무민을 이 땅에서 걷어낼 것이다. 그리하여 튼튼하고 평화로운 이 나라 고려의 앞날에 이바지할 것이니라.”

미륵.

그것은 거대한 민심을 끌어 앉을 수 있다. 이는 노도와 같은 기세를 일으킨다. 하지만, 그것이 강대한 세력과 직결하는 건 아니다.

또 하나. 민심을 등에 업는 순간 고려의 기득권인 권문세가와는 완전히 단절된다. 이는 언제라도 큰 위기에 직면할 수 있게 한다.

하면, 어쩔 것인가.

미륵이 업은 민심을 강대한 세력으로 만들어줄 인재를 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재를 어찌 구할 것인가? 이 땅의 내일을 그리는 유능한 인재를 전주로 오게 하는 것이다.

‘옴마니 반메홈’과 ‘성현께서 이르시기를’

두 가지가 공존하는 전주를 만드는 것이다.

“전주성 번잡하지 않은 곳에 서원을 세울 것이외다.”

이문정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랬다. 그는 선왕 시절 서원을 폐지하는 조정의 방침에 결사적으로 저항했다.

끝내 막아냈으나, 이후 크게 실망하여 낙향하지 않았던가.

한데, 지금 왕선이 서원을 논하고 있다.

...사특한 궁예의 현신이 말이다.

하지만 애써 침착했다. 고작 서원 한, 두 개 만든다고 진심을 알 수는 없다.

“서원이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세울 서원은 단지 유학만 연구하는 것이 아닐세.”

“하면, 무엇이 다릅니까?”

“이 나라 고려에서 처음으로 사(祠)와 재(齋)의 기능까지 겸비하게 할 것이네.”

이문정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진실로 원하고 바라던 서원의 참된 모습이 아닌가.

....궁예의 현신이 이를 논하고 있다.

“서원은 이 땅에 사는 백성의 내일을 그릴 것이다. 그들의 입에서 태평가가 쉬지 않고 흘러나올 수 있는 권농을 탐구할 것이며, 탐관오리와 유력가가 감히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못하게 하는 올곧은 제도를 만들어낼 것이다. 이 땅 전주의 서원은 성현의 가르침을 외우고 떠드는 것이 아니라 참된 유학이 현실에 적용될 수 있게 만들 것이다. 바로 현실 유학의 선봉이 될 것이니라.”

혼란스러운 이문정의 귀로 왕선의 말이 이어졌다.

“유학을 익힌 미륵의 말을 전하는 서원. 나는 이를 만들어 낼 것이다.”

선언하듯 말했다.

“백성의 내일을 그리면서 일신의 안위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고 쟁취한 안락함은 백성의 고혈을 짜낸 것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왕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 소생이 서원을 잘 이끌어보겠습니다.”

“왜?”

“백성의 내일과 소생의 내일을 합쳐보겠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잘 알 것이다.”

“그, 그렇습니다.”

“작은 거짓이나 부정이라도 있으면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다.”

“응당 그리할 것입니다.”

그제야 왕선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러면서 시선을 돌렸다. 정도전과 눈이 마주쳤다.

입꼬리를 크게 올려줬다.

그런데 정도전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외면하고 있다.

왕선의 미소가 더 진해졌다.

“군사?”

약조의 이행을 요구하는 부름.

정도전은 하늘을 원망하며 통곡하듯 외쳤다.

아니. 울부짖었다.

“옴마니 반메홈!”

전녹생, 마천목, 이옥, 나세 등 모든 사람이 정도전을 쳐다봤다.

그들의 눈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어떤 경우에도 미륵의 주문만은 외치지 않으려고 하던 인사가 바로 정도전이었다.

그런데 그가 선창하고 있다.

보아하니 오늘 진실로 감복된 것이 분명하다.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참으로 기쁘지 아니한가?

“옴마니 반메홈!”

또다시 정도전이 외친다.

사람들은 또 감탄했다.

“옴마니 반메홈!”

다른 사람들이 따랐다.

충분하다. 이 정도만 하더라도 삼봉 정도전의 굳은 충심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다. 정도전이 다시 외친 것이다.

“옴마니 반메홈!”

좌중은 충격에 휩싸였다.

설마 삼창까지 할 줄은 몰랐다.

삼봉 군사가 크게 감화된 것이리라.

감탄한 사람들은 답했다.

“옴마니 반메홈!”

참으로 아름다운 하루가 아닐 수 없다.

< 49화 유학을 익힌 미륵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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