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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48화 (48/187)

< 48화 미륵의 관대함 >

느닷없는 왕선의 말.

그런데 그건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이옥.”

“예, 예. 주공.”

“돌아간다.”

“예?”

“성문은...”

왕선은 나세와 병사들을 슬쩍 쳐다봤다.

“그냥 열어두게.”

“주, 주공.”

황망함이 가득한 이옥.

왕선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돼지 잡게. 잔치나 열자고.”

그러면서 어안이 벙벙한 나세에게 말했다.

“이게 미륵이야. 당신처럼 부하들 사지로 밀어 넣는 건 마군이고.”

덧붙였다.

“한명 한명. 다 당신보고 평생 따라다닌 사람이던데. 객지에서 밥도 안 먹이고 싸우다가 죽게 하려고? 한심하군.”

“무, 무슨.”

“돼지고기 생각나면 들어오고.”

그 말을 끝으로 왕선이 등을 돌렸다.

이옥은 황급히 곁으로 다가갔다.

“주공. 어쩌시려고요?”

“나세를 취하려고 하는 걸세.”

“예?”

“걱정하지 말고 돼지고기 냄새가 지천에 깔리게 하게. 아주 맛깔나게 굽자고.”

그리고 재가화상 그리고 백성들도 뒤를 따랐다.

“과연 우리가 선택한 미륵이시다.”

“적을 상대로 저런 배포를 보이시다니.”

“적에게 돼지고기를 베풀 줄 아는 관대함이라니.”

지나치는 백성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

평생 전장에서 살았다.

그런데 이토록 황당한 일은 없다.

그랬다. 나세는 황당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갑자기 등을 돌리는 적장과 그들을 멀뚱히 쳐다보는 꼴이라니.

“···장군. 어찌합니까?”

엄청난 기백을 보이면서 사기를 끌어 올린 나세의 기세는 온데간데없다.

백전의 무장으로서의 경험이 아무런 효과가 없다.

그의 뇌리에는 왕선의 말이 걷잡을 수 없는 크기로 커지고 있었다.

“장군. 차라리 결사전을 펼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싸울 수는 있겠나?”

나세의 말대로다.

병사들의 분위기는 너무 어수선하다. 맥이 빠질 대로 빠진 탓이다. 이대로 싸우는 건 무리수다. 무엇보다 필승을 자신할 수 없다.

“이길 수 없는 전장에 부하를 내밀 수는 없지 않겠나.”

“하면···.”

“자네 마지막으로 고기 먹은 지 얼마나 됐나?”

“예?”

“실컷 배나 채우고 전라도를 떠나세.”

“장, 장군. 또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고려 땅에 우리가 갈만한 곳이 없겠나. 들어가지.”

어차피 싸워서 이기지 못한다면 지병마사 안주가 어찌 나올지는 불 보듯 뻔하다.

나세는 무던하게 웃으면서 걸음을 옮겼다.

한편, 익주는 잔치가 한창이었다.

곳곳에서 돼지를 잡았다.

“지병마사 안주가 제법 터전을 잘 잡았군. 아까울 만도 해.”

“하하. 주공. 그게 어디 지병 마사의 능력이겠습니까? 익주는 원래 풍요로운 지역입니다.”

“하긴. 그건 그렇지.”

이옥의 말대로다.

원래 금강하구의 임피에는 조창인 진성창(현 군산시 성상면 창오리)이 있었는데 왜구들의 약탈이 심했다. 해서, 선왕 시절 진성창을 내륙인 익주로 옮겼는데 바로 덕성창이다.

즉, 익주의 덕성창은 나주의 영산창과 더불어 전라도의 세곡이 집중되는 곳이다. 괜히 지병마사 안주가 전주를 도발할 배포를 낸 것이 아니다. 그만큼 익주는 상당히 풍요로웠다.

“그나저나 나세가 어찌 나올 것 같습니까?”

왕선은 빙그레 웃었다.

짧은 시간이었으나 나세와 병사들의 속내를 들여다봤다.

그간의 고초가 실로 대단했다.

지병마사 안주의 박해도 엄청났고.

“돼지 먹으러 올 것이네.”

“그런 다음에는요?”

“떠나려고 하겠지. 물론, 잡아야지.”

그때 멀찍이서 소란이 일었다.

“주공. 나세가 온 거 같습니다.”

“격하게 환영해주게.”

그러나 굳이 이옥이 나설 필요도 없었다.

“와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

익주의 백성들이 열렬히 환호하며 나세를 반긴 거다.

“그래. 뭐하러 싸워?!”

“이렇게 숟가락 나누면 얼마나 좋아?”

백성들은 신이 난 듯 덩실덩실 춤을 췄다.

“경사로구나!”

먹거리를 들고 나세의 병사들에게 다가갔다.

병사들은 얼떨떨한 반응이다. 평생 이런 격한 환영은 처음인 탓이다.

“장군.”

나세는 아무 말도 없이 사람들을 쳐다봤다.

곳곳에서 춤을 추고 술과 음식을 나눴다.

병사들은 감히 먹지는 못하고 눈치만 살폈다.

“먹게.”

나세의 허락이 떨어졌다.

병사들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음식을 받았다.

그러자 좌중은 더 떠들썩해졌다.

“여기가 바로 용화세계로구나!”

“여기가 바로 불국정토로구나!”

“지화자로다!”

사방에서 흥겨운 노래를 불렀고, 덩실덩실 춤을 춘다.

어린 남아가 나세에게 다가가서 술과 음식을 건넸다.

나세는 멈칫했다.

“우리의 위타천이 되어주세요.”

“뭐?”

“이거 드시고 우리의 위타천이 되어주세요.”

“···너희의 위타천?”

“우리의 위타천이 되어서 이 땅을 지켜주세요.”

그러자 춤추던 모든 사람이 나세를 쳐다봤다.

나세는 멍하게 멈춰섰다.

“백성의 위타천이라. 실로 아름답도다.”

왕선이었다.

나세는 흠칫했다. 백전의 장수였으나 일찍이 이런 상황은 없었다.

왕선은 손을 내밀어서 나세의 상흔을 가리켰다.

“젊은 승려가 있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인가.

복잡한 의미의 침묵이 거세게 치밀었다.

“그는 배고픔에 지쳐 잠이 들었고 꿈을 꾸었는데 미륵을 만났노라.”

“······.”

“승려가 물었다. ‘미륵이시여. 소승은 얼마나 더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합니까?’ 이에 미륵이 답했다. ‘아직 불국정토는 멀었다. 원한다면 너를 내 곁에 두겠다. 하면,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이니라.’ 그러자 승려가 답했다.”

“······.”

“소승이 어찌 혼자만의 평안을 찾겠습니까? 더 많은 중생을 만나겠습니다.”

언월도를 세게 움켜쥐고 있던 나세의 손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왕선은 탄식하듯 말했다.

“머리를 깎고 사찰에서 삼천 배를 올려야만 불자가 아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아낀다면 이미 불자이니라.”

나세의 눈이 흔들렸다.

“이제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거라. 이곳은 불국정토이니라. 다 왔노라. 방황하지 말라.”

나세. 고려 최고의 숙장 중 한 명이다. 하지만, 군웅으로 성장하기는 어려웠다. 그리되자 여기저기서 손을 내밀었다. 당연했다. 그를 원하는 군웅은 참으로 많았다.

그처럼 뛰어난 무장이라면 누구라도 수하에 두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200명의 군사는 불편했다. 언제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의심은 절대 없어질 수 없다. 뛰어난 무장이었기에 손발을 거세한 채로 확실한 수하로 두고 싶기 때문이다. 해서, 나세는 정처 없이 떠돌았다. 오직 자신을 믿고 따르는 군사들이 편히 쉴 수 있는 곳을 찾아서.

나세는 그간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한데, 지금 왕선이 거짓말처럼 이를 쓰다듬고 있다.

나세는 침묵했다.

그가 보이는 침묵의 의미는 신중했다.

올곧은 정신과 마음을 가진 사람이기에 신중한 침묵을 보였다.

하여, 그는 함부로 말하지 않았다.

“불이(不二)에 대한 통찰이 네 안의 전쟁을 멈추게 할 것이다. 지금까지 다투며 살아온 너를 쉬게 하라. 그 싸움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니다.”

나세의 눈은 거침없이 흔들렸다.

미륵의 현신이라고 자처하는 사람. 왕선.

반 이인임 연합군에서 그의 능력을 확인했다. 대단하긴 했다.

그러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 술책에 넘어가는 건 정신이 나약한 탓이라고 가볍게 치부했다. 사람의 약한 부분을 자극하여 미혹하는 간사한 혀를 가진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자신의 마음이 요동쳤다.

평생 이토록 마음을 어루만져줬던 사람이 있던가.

그랬다. 이 나라 고려는 자신을 진정으로 받아주지 않았다.

단지 태생이 고려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참으로 폐쇄적인 나라였다.

언월도가 눈에 띄게 떨렸다.

...왕선은 미륵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나세에게 만큼은 미륵이었다.

그 모습을 본 왕선의 입가에는 자애로운 미소가 감돌았다.

“어찌하여 고행을 하게 되었는가?”

“그저 몸 뉘어 쉴 곳만을 찾아서 떠돌았습니다.”

“그대를 원하는 사람이 많았을 것인데?”

“200명을 버릴 수 없습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합니다.”

“깨달음의 마음이자 시작하는 마음을 보디치타(Bodhichitta, 다른 모든 존재의 유익을 위하여 깨달음을 얻겠다는 마음)라고 했다. 너는 이미 충분하다.”

왕선은 한 걸음 더 내디뎠다.

나세의 상흔을 어루만졌다.

“업보로다.”

“어찌 감히 씻을 수 있겠습니까.”

“입으로 범한 죄는 입으로 씻어야 하고, 창칼로 범한 죄는 창칼로 씻어야 하노라.”

나세는 무릎을 꿇었다.

그 즉시 200명의 병사가 따랐다.

그리고 나세가 외쳤다.

“소인들의 미륵이 되어주십시오.”

왕선이 자세를 낮췄다.

“나는 미륵이 아닐세.”

“미륵이십니다.”

“하면, 미륵이 될 것이네.”

“미륵이시여.”

“그러나 언제라도 내가 미륵의 길을 벗어난다면 그 언월도를 휘두르게.”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백성의 위타천이 되어주게. 나의 위타천이 아니라.”

“백...성의 위타천?”

“미륵의 위타천은 미륵만을 지키지만, 백성의 위타천은 오직 백성을 지키지. 조운이 유비의 아들을 지키고자 백만대군을 단신으로 돌파한 것처럼 단 한 명의 백성의 목숨을 그처럼 구하는 위타천이 되게.”

마침내 나세가 양손으로 언월도를 들어 받쳤다.

그리고 선언하듯 외쳤다.

“안주의 목으로써 소장의 존재를 증명하겠습니다.”

“그전에.”

“이르십시오.”

“돼지고기가 타고 있네만?”

“예?”

“일단 배불리 먹게. 그게 미륵의 법도일세.”

왕선은 빙그레 웃으면서 자세를 고쳐잡았다.

그리고 오른손 검지로 자욱한 연기를 뿜어내는 돼지고기를 가리켰다.

“불법을 수호하라.”

“그, 그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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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동이 트자 나세는 병력을 이끌고 출정했다.

재가화상을 이끄는 이옥도 함께 따랐다.

속보에 의하면 마천목도 병사를 이끌고 안주의 후미를 노린다고 했다.

이로써 안주의 최후는 확정적이다.

그리고 안주는 전장에서 도주하다가 비참하게 죽었다.

바야흐로 왕선은 전주에 이어 익주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대승을 거두고 전주로 돌아간 왕선은 정도전과 마주쳤다.

“군사. 고생하셨소.”

“아. 네.”

“왜 그러오?”

“아. 네.”

쌀쌀함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다.

원래 까칠한 인사이긴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왕선은 의아한 표정으로 정도전을 쳐다봤다.

-뭐? 옴마니 반메홈? 모든 것은 미륵의 뜻대로? 하. 기가 막혀서.

아. 이문정이 대의를 제대로 구현했구나.

-그리고 뭐? 오! 연꽃 속의 보석이여?

어? 연꽃? 보석?

오! 연꽃 속의 보석이여. 이건 옴마니 반메홈의 뜻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건 말한 적이 없다.

왕선은 무릎을 '탁' 치면서 감탄했다.

이거 아무래도 이문정이 드디어 정의에 눈을 뜬 거 같다.

정도전을 상대로 제대로 정의 구현한 거다.

이건 뜻하지 않은 호재.

왕선이 기쁨을 주체하지 못할 때 인기척이 들렸다.

“목사.”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

이문정이었다.

“무슨 일이오?”

그래도 남이 볼 때는 반말은 자제해줬다.

이문정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왕선은 그를 지그시 쳐다봤다.

“전주 이씨의 가주가 되고 싶습니다.”

되겠다가 아니라 되고 싶다라.

그리고 분명한 존대.

이 두 가지가 뜻하는 바는 하나다.

왕선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게 끝인가?”

정확하게 하대해줬다.

이제 그래도 될 상황인지라.

이문정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숙였다.

“주공으로 모시겠습니다.”

“허락하지. 옴마니.”

“···반메홈.”

왕선은 빙그레 웃었다.

물론, 이문정이 어떤 마음인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건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스스로 찾아와 무릎을 꿇었으니 말이다. 또, 이 참에 그의 속에 있는 불신을 모조리 뽑아낼 생각이었다.

“이문정.”

“예.”

“진하게 토론 한번 하지.”

< 48화 미륵의 관대함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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