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환장하는 나세 >
나세는 한탄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처지가 너무나도 비참하다고 느껴진 것이다.
조금 전 안주와 나눈 대화가 고통스럽게 스쳤다.
*****
시뻘게진 안주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이게 대체 뭐요!”
노기를 참지 않고 대갈성을 내질렀다.
나세는 굳은 안색으로 듣고만 있었다.
“함열현에서 헛짓을 할 동안 왕선 놈이 익주를 점령하다니!”
철저하게 매복을 준비했다.
그러나 오라는 마천목은 오지 않고 급보가 전해졌다.
익주가 점령당했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안주는 황급히 회군을 시작했다.
“하. 이희필의 군사가 대패했다고 하오. 당신이 꾀어내겠다고 호언장담한 마천목에게 말이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이오?!”
“진정하시오.”
“진정? 하.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소?”
안주는 절대 화를 참지 않았다.
“애초 당신이 이런 말 같지도 않은 계책을 꺼내지 않았다면 익주와 김제의 대군이 전주성을 포위 압살했을 거요. 그랬다면 지금쯤 전주를 나누고 있었을 거란 말이외다! 알겠소? 작금의 이 개 같은 상황은 바로 당신! 당신 때문에 발생한 것이오!”
“···지병마사.”
“하. 이러고도 거점을 원하오?”
“···내가 어찌 그럴 수가 있겠소.”
안주는 화를 삭이지 못한 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몽골놈의 부관 따위나 하던 작자의 말을 들은 내가 미쳤지.”
물론 나세와 부관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다.
참다못한 부관이 나서려고 하자 나세가 막았다.
“지병마사.”
“또 뭐요?”
“익주를 점령한 왕선은 내가 물리치겠소.”
“하. 그건 당연한 거 아니오?”
“···하면, 즉시 출정하겠소.”
나세는 곧장 등을 돌렸다.
안주의 조롱이 울렸다.
“이게 마지막이외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당신을 내칠 거요.”
나세는 주먹을 꽉 쥔 채로 말했다.
“명심하리다.”
*****
“장군. 괜찮으십니까?”
나세는 자책했다.
부관이 위로를 건넬 정도로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거다.
“미안하네. 못난 모습 보였어.”
“아닙니다.”
“자네들이 못난 사람을 만나서 고생이 많군. 항상 면목이 없네.”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소인들은 장군과 함께한 것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려 최고의 숙장으로 꼽히는 장군이십니다. 시절이 수상하여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 겁니다.”
“예. 반드시 장군께서 포효하실 날이 올 겁니다.”
부관들은 앞다퉈 나세에게 힘을 실었다.
나세는 피식 웃음이 났다.
“내가 자네들에게 힘을 줘야 하는데 거꾸로 됐군.”
“장군은 항상 소인들에게 힘이 되십니다.”
“하하. 그런가?”
“예. 장군.”
나세는 자세를 고쳐잡았다.
“조그만. 조금만 더 고생하게. 내가 반드시 자네들의 신의에 보답할 것이야.”
언월도를 잡은 손에 힘을 꽉 실었다.
“움직이지.”
“예! 장군!”
나세의 정예 강군 200명은 빠른 속도로 익주를 향해서 진군했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장군.”
정찰을 한 부관의 묘한 표정으로 달려온다.
“진군로에 백성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직접 가보시지요.”
현장에 당도한 나세는 황당한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수십 명의 백성이 기분 좋게 흥얼거리면서 밥을 지어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뉘시오?”
노인 한 명이 눈을 껌뻑이면서 물었다.
“누구길래 백주에 창칼을 들고 우리를 위협하십니까?”
“···왜 이곳에서 밥을 해 먹나?”
나세가 답하지 않고 물었다.
노인과 사람들은 대충 분위기를 파악하고 눈치를 살폈다.
“이곳이 가장 좋아서 그렇습니다.”
...본인들이 좋다는데 어쩌겠는가.
그러려니 하고 살폈는데 쌀이 아주 풍족하다.
노인은 눈치껏 나섰다.
“미륵께서 내리신 쌀입지요.”
“미륵?”
“예. 얼마 전에 미륵사에 미륵께서 하생하셨습니다.”
“허.”
“미륵께서 미륵사의 땡중들을 혼쭐내시고 쌀을 내리셨습지요.”
“허.”
“같이 드시겠습니까? 보아하니 먼 길 오시느라 끼니도 챙기지 못하신 거 같은데.”
노인의 말대로다.
안주가 보급도 제대로 해주지 않은 상태.
안주의 성정이 못돼먹은 것도 있겠으나 거점인 익주가 점령당한 상태라서 보급이 막힌 게 주된 이유다. 한 마디로 굶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이들과 한가롭게 밥이나 먹을 때가 아니다.
“됐네. 자네들이나 맛있게 들게.”
“알겠습니다.”
나세는 진군을 재촉했다.
괜히 시간을 끌면 굶주렸을 병사들만 더 힘들다.
...그러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숟가락 200개 더 올리는 게 뭐 대수라고. 어서 앉으시지요.”
또 다른 백성들이 무리 지어 밥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세는 진군을 재차 재촉했다.
“아이고. 고생 많습니다. 안 그래도 돼지를 잡았더랍니다. 좀 드시지요.”
아예 돼지를 잡아서 잔치를 벌이는 무리도 있다.
나세는 헛웃음을 지으면 진군을 재촉했다.
“보아하니 제때 챙겨 먹지 못한 거 같은데 주린 배나 채우고 가시지요.”
“······.”
“보다시피 쌀이 넉넉 합니다. 이게 다 미륵의 권능이 아니겠습니까.”
“······.”
“미륵께서 이르시길 굶주린 사람을 내 몸처럼 여기라고 했습니다. 앉으세요.”
“······.”
언제부터 간격도 좁아졌다.
100걸음을 가지 않아도 새로운 무리가 보인다.
슬쩍 돌아보니 병사들의 목울대로 군침이 셀 수도 없이 넘어간다.
아무리 정예 강군이라고 할지라도 굶주림과 싸울 수는 없다.
나세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거 아무래도 고약한 작전에 걸린 게 분명하다.
“장군.”
“왕선이라는 놈. 아주 고약한 작전을 쓰는군.”
“예. 보통 이럴 때는 더 굶주리게 하는데 대놓고 먹을 걸 깔아버리다니. 기상천외한 방법입니다.”
“병사들의 사기는?”
“좋지 않습니다. 차라리 배라도 채우게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저 쌀에 뭐가 들어가 있을지 알고.”
“그들도 먹었습니다. 탈이 나지는 않을 겁니다.”
“그때 급습할 수도 있어.”
“그러면 쌀을 뺏는 건 어떻습니까?”
“우리가 터를 잡을 곳도 전라도가 될 것이네. 백성의 식량을 수탈했다는 악명을 얻으면 어찌 되겠나? 힘겹게 거점을 잡더라도 민심을 잃고 쫓겨날 것이네.”
“···송구합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닐세. 병사들을 다독이고 이대로 진군하지.”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장군.”
“왜 그러나?”
“그...미륵이 하생했다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일지 짐작 가시는 바가 있습니까?”
“왕선의 작전이겠지. 아군의 사기를 저하하려는.”
“음. 알겠습니다.”
그 뒤로도 수차례 잔칫상을 만났다.
나세는 이를 악물고 강행군을 이어갔다.
“장군. 조만간 익주에 당도합니다.”
“적군의 움직임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습니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곧장 진군한다.”
“예. 아. 앞에도 밥 먹는 무리가 있는 거 같습니다.”
“···무시해.”
나세의 강군이 다시 진군을 시작하여 익주의 지척에 이르렀을 때도 과연 밥 먹는 무리는 있었다. 그런데 눈에 띄게 다른 점이 있다. 그들은 모두 승려고 규모가 수백 명이라는 것이다.
...세상은 그들을 재가화상이라고 불렀다.
나세의 미간이 와락 일그러졌다.
“전군!”
-차아아아아아앙!
-차아아아아아앙!
“나무아미타불!”
-부아아아아아앙!
-부아아아아아앙!
재가화상들이 도끼를 꺼내 들었다.
순식간에 전운이 감돌았다.
“잠시.”
싸늘한 전운을 무색하게 만드는 나지막한 목소리.
뒷짐을 진 채로 모습을 보이는 사람.
바로 왕선이었다.
*****
“대사.”
“예.”
“거. 불교에서 제일 싸움 잘하는 신을 뭐라고 하오?”
선탄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인 말씀이신지.”
“불법을 수호하는 신 중에서 가장 위력적인 존재가 있을 거 아니오. 그걸 묻는 거요.”
선탄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저 없이 말했다.
“많은 신이 있으나 위타천이 단연 최고입니다.”
*****
왕선은 자세를 고쳐잡았다.
오른손 검지를 움직였다.
“너를 나의 위타천으로 삼겠노라.”
“미친놈.”
나세의 언월도가 크게 움직였다.
그 순간
-쏴아아아아아앙!
-차아아아아아앙!
화살이 나세의 언월도를 내쳤다.
이옥은 재빨리 칼을 빼 들고 왕선의 앞에 섰다.
“오랜만이오. 나세 장군.”
나세의 미간이 살짝 꿈틀였다.
속전속결이 필수인 전장에서 까다로운 상대를 만난 거다.
그 순간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웅성거림이 들렸다.
황급히 주변을 살펴봤다.
“!!!”
수백 명의 백성이 모여들고 있다.
그들은 지금까지 만났던 밥 해 먹던 자들이었다.
왕선은 빙그레 웃었다.
*****
안주의 주력이 모두 빠져나간 익주 점령은 순탄했다.
무엇보다 삼삼오오 잠입한 재가화상들이 일시에 무력을 사용하자 더 수월했다.
남은 건 급히 회군할 안주와 마지막 결전을 치르는 것이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하나 생겼다.
바로 나세였다.
고려를 대표하는 숙장이 고작 안주의 객장이나 하고 있단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세라.”
“주공. 나세 장군은 원나라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여전히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그 탓에 군웅할거가 개막된 지금도 적당한 거점을 찾지 못한 겁니다.”
“뛰어난 무장인데 품으려는 군웅이 없나?”
“그의 능력을 탐하는 사람은 많을 겁니다. 하지만, 이끌고 있을 군사는 부담스럽겠지요.”
“병사를 떼어놓을 수는 없겠지.”
“예. 나세 정도의 숙장이 수백의 병사를 통제할 수 있다면 심히 부담스럽지요. 결정적으로 그 정도 세력의 군웅은 굳이 나세 장군을 품지 않아도 자력으로 팽창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군.”
“예. 지병마사 안주는 나세의 능력과 병사 모두가 필요하니까요. 아마도 전주를 취한 다음 적당한 거점을 내려준다고 했을 겁니다.”
“흠.”
“어차피 시간은 우리 편입니다. 적들은 갈수록 굶주릴 거니까요.”
이옥은 자신감 가득한 미소를 보였다.
“주공. 나세를 취하십시오.”
*****
왕선이 자연스럽게 오른손을 들었다.
사방에서 외쳤다.
“우리의 미륵이시여! 미륵의 위타천을 여기까지 인도했습니다!”
“참으로 장하도다.”
기괴한 분위기.
나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건 곤란하다. 병사의 동요가 걱정됐다.
서둘러서 명령을 내려야 한다.
그런데
“옴마니 반메홈.”
“옴마니 반메홈.”
“옴마니 반메홈.”
사방을 둘러싼 수백 명의 백성이 주문을 외웠다.
병사들의 사기는 곤두박질쳤다.
그 순간
-부아아아아앙!
거센 파공음이 들렸다. 한 자루의 칼이 위협을 가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사방에서 압박해오는 공세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섣불리 막아섰다가 약간의 부족함이라도 보이면 곧장 황천길로 떠나게 된다.
하면, 당장 피하는 게 능사다.
그러나 나세는 물러서지 않았다.
매섭게 눈을 치켜뜨며 언월도를 고쳐잡았고, 온 힘을 다해서 휘둘렀다.
-차아아아아앙!
-차아아아아앙!
한 자루의 언월도는 천하에 위력을 자랑하듯 공세를 막아냈다.
언월도의 주인은 칼의 주인을 노려봤다. 역시 이옥이었다.
싸워서 이길 자신은 있다. 그러나 대장전으로 승패가 좌우되는 상황이 아니다.
“옴마니 반메홈.”
“옴마니 반메홈.”
“옴마니 반메홈.”
갈수록 분위기는 기괴하다.
병사들은 주눅 들어가고 있다.
무엇하나 유리한 게 없다.
나세는 직감했다.
...오늘 여기서 죽는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평생 전장을 누비며 살아왔다. 늘 죽음이라는 존재를 지척에 두고 살았다. 이질적인 존재였으나, 더는 이질적이지 않다.
하여, 나세는 물러서지 않았다.
언월도를 거칠게 돌리면서 외쳤다.
“전군!”
압도적인 위용을 보였다.
“죽기를 각오하라!”
엄청난 기백.
“여기서 뼈를 묻는다!”
상상을 초월하는 결기.
“이 땅에 나와 그대들이 존재했음을 알릴 것이다!”
언월도가 하늘로 향했다.
“나세의 군사들이여! 싸우라!”
그 어디에도 싸워 이기자는 말은 없다.
최후의 승자가 되자는 내용이 없다.
그 엄청난 기세에 병사들은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외쳤다.
“나세 장군과 함께!”
나세의 언월도가 휘둘러지며 병사들의 사기를 고취한 건 찰나였다.
당장이라도 선혈이 난무할 것만 같았다.
숨 한번 쉬면 창칼이 어지럽게 오갈 피비린내 가득한 전장이 될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딱. 바로 그때였다.
“지랄하고 있네.”
한마디의 욕설이 전장의 개막을 멈추게 했다.
왕선은 거칠게 손을 내저으면서 근엄하게 말했다.
“밥은 먹고 다니냐?”
덧붙였다.
“애들 밥은 먹이고 다니냐고.”
< 47화 환장하는 나세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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