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진정한 미륵 >
백제 최대 사찰인 미륵사의 각 금당은 지하구조로 이루어진 독특한 형식이었다. 이는 미륵신앙에 따라 미륵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오기를 기원하는 의미였다.
하지만, 미륵은 석가가 열반에 든 이후 56억 7천만 년이 되었을 때 이승으로 하생하기에 아직은 한참 멀었다.
하여, 당대의 승려들은 미륵을 미륵사에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굳이 만나려 한다면 열심히 정진하여 보살이 된 다음 도솔천에 가는 방법이 유일했다. 물론, 보살이 된다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기에 미륵을 직접 만난다는 건 어쩌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56억 7천 만 년 이후의 승려들은 몰라도 당대의 승려는 말이다.
그리고 당대의 고승으로 손꼽히는 선탄 역시 마찬가지다.
그저 오늘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평온하기 이를 데 없었다.
“대사.”
평소와 다른 게 하나 있다면 불공 중에 자신을 부르는 승려의 존재였다.
지금까지 선탄이 불공을 올릴 때 말을 건넨 사람은 없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승려 한 명이 공손하게 합장한 채로 쳐다보고 있다.
참선을 방해받았으나 상대가 불편할까 봐 오히려 더 자비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무슨 일인가?”
“나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네.”
무슨 일인지 물어보지도 않는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면 이렇게 찾지도 않았을 것이니까.
승려를 따라서 미륵사 남문을 나선 선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떤 일이 있어도 평정심을 잃지 않을 것만 같던 노승이 헛웃음을 지었다.
얼핏 봐도 헐벗고 굶주린 백성 수백 명이 미륵사 남문 앞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지 않은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선탄이 나지막하게 합장하며 염불을 외웠다.
그러나 소란은 멎지 않았다.
“미륵사로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언제 미륵사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은 적이 있었던가?
“미륵사에 가면 된다고 들었습니다.”
선탄은 의구심이 들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
그러나 흥분한 군중은 대화할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일단 저들을 진정시켜야 한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고승이 다시 염불을 외웠다.
“미륵사에 미륵께서 강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미륵? 강림?
선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하지만 물어볼 틈이 없다. 흥분한 군중의 목소리는 갈수록 커졌다.
지켜보다 못 한 미륵사 승려들이 선탄을 거들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수십 명의 승려가 염불을 외웠다. 그제야 군중들의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소승은 미륵사의 불제자 선탄이라고 하오.”
“대사. 미륵사로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미륵사는 언제나 열려 있소. 소승에게 허락받을 일이 아니오.”
“미륵사의 사천왕이 항상 이놈들을 노려봅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공양미도 내지 못할 놈들이 어디 발을 내미냐고 말입니다.”
“허.”
“사찰이 헐벗고 가난한 이놈들의 발걸음을 내친지 오래됐습니다. 스님들이 허락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거지부대의 시선이 삼삼오오 모여서 구경하는 사람들로 향했다.
구경꾼들의 복색은 참으로 깔끔하고 좋아 보인다.
언제부터인가 재력을 갖춘 사람들만 보인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걸 강제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오해가 있소. 우리 불제자들은 중생을 차별하지 않소.”
“예. 예. 맞습니다. 들어가도 되지요. 한데, 시선이 따갑습니다.”
“그 또한 오해. 그러니 들어오시오.”
선탄은 자애롭게 웃었다.
그러자 거지부대는 술렁였다.
“미륵사에 가면 등 따시게 눕고 배불리 먹여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미륵사에 미륵께서 강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허.”
선탄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이제야 이 많은 사람이 몰려온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보아하니 어디선가 또 미륵을 참칭하는 작자가 생긴 거다.
세상이 어지러울 때마다 항상 발생하는 일이지만 참담하긴 매한가지다.
어디 그뿐인가? 급기야 난세가 길어지면 지역을 할거하는 군웅이 미륵을 참칭 하기도 한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전후 사정을 파악한 선탄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미륵불께서는 56억 7천만년 후에 하생하시오. 시주들이 잘못 알고 있는 거요.”
“그러면 미륵사에서 우리를 구해주지 않는 겁니까?”
“미륵사는 언제나 중생을 위하오.”
“그 말씀은···.”
“소승과 승려들이 중생을 위해서 매일 참선하며 불공을 올리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돌아가시오.”
“!!!”
사람들은 술렁였다.
“아, 아니.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시주들의 집으로 돌아가시구려.”
“하면, 우리를 구제해주시지 않는 겁니까?”
“미륵사는 부처님을 모시는 곳이오.”
“그렇게나 많은 쌀을 비축해두고 어찌 중생을 외면하는 겁니까?”
“미륵사의 쌀은 부처님께 바치는 것이오.”
상황을 지켜보던 재력가들은 비아냥거렸다.
“거지가 따로 없구나. 사찰에 와서 구걸하다니.”
“다 업보야. 업보.”
“이번 생에 부지런히 살면 다음 생에 부유하게 태어나는 걸 모르는 거지. 무지한 것들.”
“해서 우리가 매일 부처님께 불공을 올리는 거야.”
그들의 조롱은 선탄의 귀에도 들렸으나 애써 외면했다.
지금 막아야 할 건 저들의 입이 아니라 막무가내 억지를 쓰는 자들이니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모두 물러가시오. 더 소란을 피우면 용납하지 않을 것이외다.”
사실상의 겁박.
사람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때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양측의 대립을 분산하게 하는 괴이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나무아미타불! 아미타불에게 몸과 마음을 바쳐 의지하고 예배함을 이르는 말.”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
“나무관세음보살마하살! 위대한 관세음보살에게 몸과 마음을 바쳐 의지하고 예배함을 이르는 말.”
미륵사로 몰려든 사람들이 좌우로 갈렸다.
활과 칼을 움켜쥔 무장의 호위를 받은 젊은이가 보인다.
바로 왕선이다.
“한데, 미륵사의 땡중들은 이 염불을 외울 자격이 없도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왕선은 황당함이 가득한 선탄의 눈을 주시하면서 외쳤다.
“일찍이 석존께서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왕사성을 찾자 마가다 국의 빔비사라 왕이 왕사성 부근의 죽림 동산에 지어 바친 것이 사찰의 유례다. 석존의 가르침을 온몸으로 수행해야 할 사찰에서 헐벗고 굶주린 중생을 외면하다니! 너희가 그러고도 아미타불을 입에 담을 수 있는가?”
필시 저 사람이 미륵을 참칭했을 것이다.
선탄은 차분하게 왕선을 쳐다봤다.
“부처님의...”
“갈!”
왕선은 선탄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다.
“석존께서는 그 많은 공양미를 요구하시지 않았다!”
왕선의 외침은 이어졌다.
“석존께서는 이처럼 거대한 사찰도 이르지 않으셨다.”
“시주께서 그걸 어찌 아시오?”
여전히 선탄의 목소리는 차분하다.
왕선의 눈에 이채가 띄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장 좌중을 돌아봤다.
“헐벗고 굶주렸구나.”
선탄을 무시한 채 사람들에게 향했다.
“내 너희를 구제하고자 왔노라.”
“우, 우리를 구제한다고 하셨습니까?”
“너희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쌀과 등 따뜻하게 잘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해주겠노라.”
“정, 정말입니까?”
그때 저 멀리서 소란이 일었다.
시선을 옮긴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저, 저건.”
수레였다. 쌀이 가득한 수레.
왕선은 자애롭게 말했다.
“모두 너희에게 나누겠노라.”
“정, 정말입니까?”
“옳다. 또 싸울 필요가 없다. 너희 모두 받을 만큼 넉넉하게 준비했으니까.”
“오.”
“나눠준 쌀을 들고 전주로 가라. 가면 거처가 마련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줄 수 있는 건 경작할 땅과 가옥을 지을 공간이다.”
“그,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하, 한데 전주 목사가 그걸 승인해주겠습니까?”
“내가 전주 목사 왕선이다.”
사람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때 웅성거리던 인파 속에서 외침이 들렸다.
“미, 미륵이시다.”
“!!!”
“저분이야말로 미륵이시다!”
“!!!”
“미륵이 달리 미륵인가? 우리를 구제하면 미륵이야!”
외침은 순식간에 퍼졌다.
“미륵이시여!”
“미륵이시여!”
왕선은 오른손을 뻗었다.
“옴마니 반메홈.”
사람들이 따랐다.
“옴마니 반메홈.”
왕선이 외쳤다.
“오! 연꽃 속의 보석이여!”
사람들이 열광했다.
“오! 연꽃 속의 보석이여!”
왕선이 물었다.
“미륵사는 누구의 것인가?!”
사람들이 답했다.
“응당 미륵의 것입니다.”
왕선이 외쳤다.
“모든 것은 미륵의 품으로!”
사람들이 화답했다.
“모든 것은 미륵의 품으로!”
천년고찰 미륵사의 남문.
그곳에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발생했다.
선탄의 평정심이 완전히 깨졌다.
그 순간 왕선과 눈이 마주쳤다.
당장 이 광기를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해서, 온 힘을 다해서 외쳤다.
“갈!”
...그런데 자신의 입에서 나온 게 아니다.
왕선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한심하군.”
“!!!”
“가르침을 내리겠다.”
“뭐, 뭐라?!”
“탐욕을 알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닦아야 한다. 두 가지가 무엇인가?”
“!!!”
“모르는가?”
“가, 감히.”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답하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왕선은 조롱하듯 말했다.
“사마타와 위팟사나다.”
“!!!”
“사마타를 닦아 무엇을 성취하고, 마음을 닦고 닦아 무엇을 성취하는가? 바로 탐욕이 끊어진다. 위팟사나를 닦아 무엇을 성취하고, 지혜를 닦고 닦아 무엇을 성취하는가? 바로 무명이 끊어진다.”
왕선이 검지로 선탄을 가리켰다.
“바로 너희가 익혀야 할 것이니라.”
“!!!”
여기까지 오면서 왕선은 수차례 고민했다.
전주를 둘러싼 난국을 해결하려면 반드시 미륵사의 힘이 필요하다.
여기서 문제. 하면, 미륵사를 어찌해야 할까?
설득할까? 정치적으로 타협할까?
번뇌가 끊이지 않았다. 내내보다 쉬운 길에 대한 욕구가 거세게 치밀었다. 그것은 미륵사와 타협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키지 않았다.
이 어지러운 난세.
헐벗고 굶주린 백성.
뿌리부터 썩어가는 나라.
이 모든 것에 미륵사를 비롯한 불교계의 책임이 없지 않다. 아니, 무척이나 거대했다. 그런데 그들과 손을 잡는다?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럴 거면 미륵을 참칭하지 말았어야 한다.
미륵이 왜 미륵인가? 백성을 구제하기에 미륵이다.
골수까지 썩은 세력과 타협하는 건 미륵이 아니다.
그래서 결정했다. 이들을 억누른다. 미륵사를 제압한다.
해서, 불교를 정화한다. 미륵의 이름으로.
해서, 중생을 구한다. 미륵의 이름으로.
오직 미륵의 이름으로 이 땅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킨다.
바로 오늘이 그 시작이다.
“더는 소승을 시험하지 마시오.”
“시험?”
“난세에 미륵을 참칭하는 군웅이 발생하는 건 필연적인 일. 거기까지는 묵과할 수 있소. 그러나 미륵불을 모시는 미륵사를 이토록 어지럽히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해서?”
“미륵을 참칭하고자 한다면 최소한의 선을 지켜야 하오!”
“나는 미륵을 참칭하지 않았다.”
“그것이 참칭이오!”
“네 눈으로 보지 않았나? 내가 언제 미륵을 참칭했지?”
“그게 무슨...”
선탄은 멈칫했다.
...왕선의 말대로다. 왕선은 미륵을 참칭하지 않았다. 사방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왕선을 미륵이라고 부른 거다.
그를 지켜보던 왕선이 일갈했다.
“미륵의 이름을 가져다가 호의호식하는 건 바로 너희 미륵사가 아닌가! 미륵을 참칭하는 건 여기에 똬리를 튼 너희 미륵사의 땡중들이야!”
“!!!”
“사원전이라는 같잖은 이름으로 토지 겸병을 일삼고 백성의 땅을 수탈하고 고리대를 일삼는 너희의 작태는 도솔천의 법도인가? 미륵의 세상이라는 용화세계의 법도인가? 사찰에 쌀을 가져다 바치는 재력가가 아니면 상대도 하지 않는 너희 땡중들이 사용하기엔 미륵의 명칭이 너무나도 거창하지 않은가!”
“!!!”
“나는 미륵을 참칭하지 않는다. 그러나 백성이 내가 미륵이 되길 원한다면 기어이 미륵이 될 것이다.”
왕선은 죽일 듯 선탄을 노려봤다.
“만일!”
숨을 고르지 않고 다시 외쳤다.
“만일! 백성이 더는 내가 미륵임을 원하지 않으면 이를 입에 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이 내가 미륵이길 원한다면 이 땅을 용화세계, 불국정토로 만들기 위해서 죽는 그 순간까지 발악할 것이야!”
왕선은 양손을 뻗쳤다.
“내가!”
온 힘을 다해서 외쳤다.
“진정한!”
다시 외치려고 할 때
“미륵이십니다!”
거대한 화답이 울렸다.
왕선은 기세 있게 검지를 내밀며 외쳤다.
“미륵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저 요망한 글자를 뽑아낼 것이니라!”
그때
-쏴아아아아아아앙!
이옥의 화살이
-퍼어어어어어어억!
미륵사의 현판을 박살 냈다.
< 45화 진정한 미륵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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