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속이고, 속이고 또 속이고 >
“딱 적절했습니다.”
전주목의 속현을 단속하고 온 마천목의 말.
역시 지병마사 안주가 속현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정도전이 턱을 긁적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이대로 문제가 있군요.”
“군사. 그게 무슨 말이오?”
“말 그대로입니다. 전주목의 속현들이 익주의 접근을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이건 아주 곤란한 사태인 거지요.”
이거 은근히 돌려 까는 거 같다.
왕선은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의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속현의 향리들은 눈치가 아주 빠릅니다. 군웅할거가 개막된 현 정국에서 그런 사람들이 유명무실한 중앙의 공문 한 장으로 익주로 붙으려고 했다? 대단한 숙장이라고 할 수도 없는 지병마사 안주를 믿고? 이건 말이 안 됩니다.”
“군사의 말은 다른 뭔가가 있다는 거구려.”
“예.”
“짐작되는 바가 무엇이오?”
“지금으로서는 없습니다.”
“그러면 방책은?”
“깜깜할 때는 일단 들이대야죠.”
턱을 긁적이던 정도전의 손이 지도의 한 지역을 가리켰다.
“우선 함열현을 도모하시지요.”
“전주의 속현이 아닌 곳을 친다?”
“예. 함열현은 익주의 지척에 있는 거점. 아군의 의지가 분명하게 천명될 겁니다.”
“그건 그대로 안주를 자극하겠군.”
“안주가 생각이 있는 인물이라면 도내산은소가 있는 함열현을 반드시 차지하려고 할 겁니다. 그런데 아군이 먼저 공격한다? 주공의 말씀대로 발끈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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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병마사 안주는 군웅할거가 개막된 이후 익주를 기반으로 하여 세를 확대할 방법을 고심했다. 역시 눈에 띈 곳은 가까운 전주였다. 만일, 전주를 아래로 둔다면 일대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순천의 정지와도 자웅을 겨룰 수 있다.
만일 정지까지 장악하면 전라도의 패권을 장악하게 되는 것이니 고려의 대표적인 군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주를 도모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심을 거듭할 때 이인임이 큰 선물을 전했다. 전주를 익주의 밑에 두어 통치하라는 내용이었다. 군웅할거라는 시대적 상황과 동떨어진 내용이었으나 나쁜 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만일, 전주가 따르면 그대로 좋은 거고, 그렇지 않더라도 속현은 흔들 수 있으니까.
결과, 왕선은 단호하게 관리를 내쫓았고, 속현의 단속을 시작했다.
그러나 안주는 느긋했다.
“이제 어찌 될 것 같소?”
“왕선이 생각이 있다면 도내산은소가 있는 함열현을 도모하려고 할 것이외다.”
“과연. 내 생각도 그렇소.”
“내 수하들을 함열현에 배치하겠소. 전주의 군사가 들어오는 즉시 모조리 도륙하리다.”
“내가 귀공을 믿지 않으면 누가를 믿겠소? 하하하. 군웅할거의 개막과 동시에 왕선의 이름이 지도에서 지워지겠구려.”
“과찬이오.”
안주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마주 앉은 사람을 신뢰 가득한 눈으로 쳐다봤다.
“괜한 말이 아니오. 귀공이 아니었다면 왕선의 움직임을 어찌 이토록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겠소?”
“···하면, 나는 곧장 마천목을 제압하러 함열현으로 가보겠소.”
“아니. 직접? 수하들을 보내도 충분하지 않겠소?”
“왕선의 의제 마천목은 임견미를 제압한 무장이오. 내가 직접 가야 하오.”
“음. 하긴. 좋소. 나도 준비되는 대로 따르겠소.”
“먼저 가서 기다리겠소. 장군이 올 때쯤이면 상황이 마무리되어 있겠지만.”
“하하하. 이런. 너무 늦지 않도록 서둘러야겠소이다.”
“그리고 약조는 반드시 지키시오.”
안주는 호탕하게 웃었다.
“물론이외다. 나세 장군.”
나세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언월도를 고쳐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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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은 연신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전녹생이 곁으로 다가와서 옅게 웃었다.
“삼봉 군사.”
“···예.”
“그 속을 내가 잘 아네.”
“예?”
“일전에 왜구가 쳐들어 왔을 때 주공께서 문수도량을 여셨지. 아주 크고 성대하게. 정말 이해할 수 없었지. 하지만, 결과는 자네도 잘 알 것이네.”
“···익히 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않습니까. 속현의 향리를 모두 불러내다니요. 예. 맞습니다. 그들이 뭔가를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입을 열지는 않을 겁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들은 철저하게 강자에게 붙습니다. 아군이 자력으로 안주를 제압하지 못하면 절대 진심으로 승복하지 않을 거란 말입니다. 지금처럼 억지로 그들의 입을 열게 만들거나 겁박한다? 차후 다른 세력이 위협을 가할 때 그들은 고민도 하지 않고 등을 돌릴 겁니다. 지금 우리는 속현 향리의 저울대에 올라가 있는 상황이란 말입니다.”
“군략에 문외한인 내가 들어도 자네가 낸 계책은 아주 완벽해. 천목을 함열현으로 보내서 안주를 꾀어내고 그 틈에 이옥이 익주를 친다. 성동격서도 이런 성동격서가 없지.”
“······.”
“한데, 주공께서 그걸 모르실까. 그런데도 이리하시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네.”
“······.”
“하하. 이 사람. 여전히 불편한 표정이군. 일단 지켜보게.”
정도전은 전녹생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전 선생께서는 어찌하여 주공을 그토록 신뢰하십니까?”
“중생이 미륵을 따르는데 이유가 있겠나?”
“예?”
정도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녹생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미륵은 두 가지가 있네. 혹세무민하는 미륵과 중생을 구제하는 미륵. 나는 주공이 후자라고 생각하네.”
전녹생은 사람들의 말보다 자신의 눈으로 본 걸 믿는 사람이다.
그는 정도전을 포은 정몽주보다 낮게 평가하지 않았다. 그만큼 전녹생은 보는 눈이 뛰어나다.
하지만 정도전은 큰 단점이 있다. 주관이 뚜렷하다 못해 독선적이다. 심지어 눈으로 본 것보다는 머릿속으로 떠올린 생각을 믿는 사람이다.
지금 전녹생은 이를 바로 잡아주고 있는 거다.
비록 정도전의 지재보다 뛰어나지는 못하지만, 연륜은 그냥 생긴 게 아니다.
정도전도 전녹생의 안목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고 있다.
그런 사람이 왕선을 이토록 신뢰한다.
“일단 지켜보자고.”
“···알겠습니다.”
그때 왕선이 뒷짐을 진 채로 다가왔다.
“무슨 대화를 이렇게 나누는 거요?”
“허. 설마 벌써 자리를 파하셨습니까?”
“뭐 그렇게 중요하고 좋은 자리라고.”
“허.”
정도전은 눈을 껌뻑였다.
“성과가 있습니까?”
그를 슬쩍 쳐다본 왕선이 빙그레 웃었다.
“생각 없는 사람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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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열현에 매복준비를 완벽하게 한 나세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 움직임이 없다고?”
“예.”
“허.”
나세는 반 이인임 연합군 시절에 왕선을 겪어봤다.
젊은 나이답게 상당한 패기를 보였다.
그랬다. 다른 장수들과는 달리 연일 진군을 주장했던 인사가 아닌가.
그런데 공세를 버리고 수세로 전환한다?
...사람을 잘못 본 건가?
고개를 저었다. 반 이인임 연합군에서 왕선의 행보는 일정했다. 오판할 수준의 성질이 아니었던 거다.
“음. 그게 아니라면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겠군.”
“장군. 지병마사께서 당도하셨습니다.”
나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장군.”
안주다.
부관이 이제 소식을 전했는데 벌써 온 거다.
...그의 표정이 상당히 좋지 않다.
“이게 어찌 된 것이오?”
“······.”
“전주의 군세가 함열현으로 올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지 않았소이까.”
애초 나세가 언급했으나 제 입으로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한 사람이다.
그런데 인제 와서는 책임을 추궁한다.
나세는 고소를 삼켰다. 그러나 떠돌이 장수에 불과한 처지다.
“조금 더 기다려 봅시다.”
“허. 이거 괜히 군사를 일으킨 게 아니오?”
“······.”
“차라리 전주로 진군하는 건 어떻소?”
“아직 속단하기는 어렵소. 왕선은 반드시 먼저 움직일 것이외다.”
“허. 답답하구려. 더 시간이 지나면 왕선은 아군이 함열현에 매복한 걸 알아차릴 거요. 매복이 뭐요? 적이 몰라야 매복이오. 그런데 다 알아차리면 그걸 뭐하러 하오?”
안주는 짜증이 담긴 어조로 쏘아댔다.
나세의 표정은 경직됐다. 함께 있던 부관들도 불편한 표정이다.
“내 말대로 합시다. 이왕 군사를 일으켰으니 전주로 진군하는 거요. 장군이 선봉을 서시구려. 큰 공을 세울 기회를 주는 것이외다.”
자기 군사의 피해를 줄이려는 얄팍한 수작질.
그런데도 나세는 참았다. 원나라 출신인 자신이 고려에서 살아가기로 한 이후 이런 대우는 익숙했으니까.
“지병마사의 말을 잘 알겠소. 하지만 그리하면 전체 작전이 틀어지게 되오.”
“내 말이 그 말이오. 함열현 매복이 성과가 없으면 작전이 뭉개지는 것이외다. 왕선의 주력을 여기서 잡아두고 전주를 도모하는 게 우리 작전이오. 까먹었소?”
“어차피 아군이 연락을 취하지 않으면 전주성 공격은 무산되는 거요.”
“만일 아니라면?”
안주는 볼을 씰룩였다.
“만일 아군이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는데 전주성이 함락되면? 밥상에 숟가락이라도 얹힐 수 있겠소? 나야 익주라도 있지만, 당신은 어쩔 거요? 설마 공을 세우지도 않고 거점을 내놓으라고 할 생각이오?”
“지병마사 어른. 말씀이 과하십니다.”
참다못한 나세의 부관이 나섰다.
그러자 안주가 대갈성을 내질렀다.
“닥쳐라! 감히 어디라고 끼어드는 것이야!”
손찌검하려고 하자 나세가 막았다.
안주가 눈을 부라렸다.
“허. 이보시오.”
“송구하오. 내가 사죄하리다.”
분이 풀리는 건 아니지만 나세와 드잡이질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 정도면 충분히 위신을 살렸다. 자신과 나세의 상하를 분명히 한 거니까.
해서, 명령조로 외쳤다.
“됐소! 당장 출병 준비하시오! 쓸데없이 시간만 낭비했어.”
그때였다. 부관 한 명이 급히 달려왔다.
“전, 전주에서 군사가 출병했습니다!”
안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인가?”
“예. 1천 명입니다.”
“1천?! 오. 하면, 전주의 주력이 모두 나왔군!”
“그렇습니다!”
“적장은?”
“마천목입니다.”
“하하하. 나세 장군. 과연 대단하시오.”
안주는 순식간에 태세를 전환했다.
“다만 500명을 예상했는데 1천이 모두 나왔소.”
슬쩍 나세의 공을 깎아내린다.
“매복으로 전멸시키기는 어렵지만, 발목만 잡아도 그게 어디겠소? 이로써 왕선은 거점을 잃고 떠돌이가 될 거요. 거점이 없는 떠돌이 신세는 참으로 처량하지. 안 그렇소?”
나세는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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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은 기가 막혔다.
“확실한가?”
“예. 조금 전 김제의 이희필이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아군이 출병하자마자 곧장 움직이다니.”
“내가 뭐라고 했나? 주공을 믿어보라고 했지?”
여유로운 목소리.
전녹생이다.
“참으로 신통방통해. 안 그런가?”
“예. 이희필과 안주가 동맹을 체결했다니.”
속현의 향리들이 흔들릴 만했다. 익주와 김제가 손을 잡았다면 전주가 감당해낼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우니까.
그리고 정도전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어떤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만일 자신의 계책대로 움직였다면 전주는 무주공산이 됐을 거다.
그때 이희필이 들이닥쳤다면 막아낼 방도가...없지는 않았을 건데 어려움에 봉착하긴 했을 거다.
“그래. 마천목이 끌고 간 1천 명 중 500명이 잘 우회하여 돌아오고 있네.”
“예. 이희필은 전주가 무주공산인 줄 알고 들이닥칠 겁니다.”
“어찌할 생각인가?”
“음. 만일 초기 계책대로 움직였을 때 이희필이 들이닥쳤다면 소생이 어찌했을 거 같습니까?”
“이런. 성을 사수할 방책은 있었다는 거군. 역시 삼봉.”
정도전은 입맛을 다셨다.
“그러면 뭐합니까? 아군의 급소를 노리고 있는 적의 동맹을 파악하지 못했는데.”
“그건 주공께서 미륵이라서 그래. 우리는 평범한 중생이고.”
“괴력난신 좀 그만 신봉하십시오.”
“개경에 있는 권신이 괴력난신이지.”
정도전도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주공께서는 무슨 수로 익주를 점령하겠다고 호언장담하셨을까?”
“일천 명이나 데려갔어요. 수가 있겠지요.”
“일천 명?”
“이옥이 일기당천이지 않습니까.”
“이런.”
정도전은 고약하게 웃었다.
“이 엄중한 시국에 일기당천을 데리고 홀연히 사라지셨으니 반드시 성과를 내시겠지요.”
“하하하. 그건 그렇군. 반드시 그리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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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히 움직이던 이옥이 걸음을 멈췄다.
“주공. 도착했습니다.”
“좋군. 참으로 좋은 곳이야.”
왕선은 빙그레 웃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야지.”
“소장이 나서겠습니다.”
“그래. 미륵사에 이르게. 미륵의 현신이 왔노라고.”
< 44화 속이고, 속이고 또 속이고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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