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두 사람을 얻다(제목 수정, 후반부 내용 삭제) >
왕선의 준엄한 선언.
익주에서 온 관리와 병사들은 아연실색하며 부리나케 도망쳤다.
“전 선생. 익주는 누구의 거점이오?”
“지병마사 안주가 세력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슬쩍 정도전을 쳐다봤다.
-지병마사 안주라. 노장이 노골적으로 나온다? 그러면 이번에는 전주목에 딸린 속현을 흔들어대겠군.
왕선은 흡족하게 웃었다.
“천목.”
“예.”
“속현을 제대로 단속하게.”
“속현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지. 지병마사가 속현을 흔들어서 전주를 고립시키려고 할 거야. 미리 방비해야지.”
“과연. 알겠습니다. 즉각 출병 준비하겠습니다.”
정도전은 흠칫 놀랐으나 애써 티 내지 않았다.
왕선은 그의 동요를 즐겼다.
“주공. 지병마사는 독불장군입니다. 이대로 물러나지 않을 겁니다. 군사적 충돌이 발생할 가능성이 큽니다.”
“전주와 익주는 경계를 마주하고 있소. 언제라도 충돌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겠소? 때마침 적당한 명분까지 주어졌으니 능히 그리할 거요.”
왕선의 말대로다.
어차피 두 세력은 충돌할 수밖에 없다.
“전 선생은 군량이 부족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해주시오.”
“알겠습니다. 주공.”
숨을 골랐다.
익주와 전면전을 펼칠 때가 다가온 거다.
그러면 제대로 준비해야 한다.
지금 전주군의 최고 취약점은 지휘관의 부족이다. 마천목이 유능하지만 한 손이 열손의 역할을 할 수는 없다. 그러면 군을 잘 통솔할 수 있는 장수가 필요하다.
이때를 대비해서 산 채로 잡아 온 사람이 있다.
바로 이옥이다.
왕선은 이옥이 잡혀 있는 옥사로 이동했다.
초췌한 몰골로 망가져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전처럼 눈빛이 살아 있고 체력관리도 잘 한 거 같다. 하긴, 입은 자물쇠를 걸어둔 것처럼 열리지 않아도 끼니는 꼬박 챙겨 먹는다고 했으니까.
“안색이 더 좋아졌군. 밥이 입맛에 맞나 봐?”
“······.”
“공짜 밥을 그렇게 먹었으면 예의상 답변이라도 해야지. 그게 예법이지. 안 그런가?”
여전히 이옥은 묵묵부답.
“음. 노비로 살아봐서 아무거나 잘 먹는다던가. 이런 곳이 익숙하다던가. 이런 상투적인 답변이라도 해보라고.”
이옥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그러나 여전히 입은 열리지 않았다.
왕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여러 회유에도 굴하지 않은 대쪽같은 성정은 잘 알겠고. 그런데 이인임이 진짜 약조를 지킬 거로 생각하나?”
느닷없는 일갈.
그런데 이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말 자네 부친의 명예를 회복시켜 한을 풀 수 있을 거로 생각하나?”
“!!!”
“이인임은 그냥 정치하는 사람이야. 저 자신을 위해서. 그런데 지금 아무런 쓸모가 없어진 너를 위해서 그런 무리수를 둘 이유는 없지.”
“···그게 무슨 말이오?”
“오. 드디어 입을 열었군.”
“어서 말씀하시오!”
“신돈의 당여였던 네 부친은 그가 몰락하자 역적으로 몰렸어. 너는 노비가 됐고. 그런데 너는 왜구의 침략에 큰 공을 세워서 신원이 복원됐지.”
“조금 전에 하던 말. 이어서 하시오.”
“답답하군. 이인임이 뭐하러 역적으로 몰린 가문의 명예를 다시 잡아주냐고. 네가 건재했으면 앞으로는 가능성이 있지만 지금 포로 신분인데. 이인임은 네가 죽은 줄 알고 있어. 그리고 군왕도 아니고 권신에게 그런 충정을 보이는 건 대체 어느 나라 법도야?”
이옥도 알고 있었다.
포로의 신세가 된 이상 이인임이 신경 써주지 않을 거라는 걸.
그래서 죽지 않고자 먹었다. 혹시라도 상대를 자극해 참수당할까 봐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이를 후벼판다. 미칠 듯 괴로웠다.
그를 지그시 쳐다보던 왕선의 입에서 나지막한 말이 새어 나왔다.
“내가 해주지.”
“!!!”
“내가 네 억울한 사연을 보듬어 주겠다는 거다. 내가.”
“당신은 또 어찌 믿소? 나를 이용하다가 버릴 게 아니오?”
“두 가지를 보여주겠다.”
“두 가지?”
“나주에 똬리 틀고 신선놀음하는 염제신의 목숨을 네게 맡기지.”
염제신은 이옥의 아버지 이춘부와 철천지원수다.
이옥의 눈이 격하게 떨렸다.
“이건 복수고. 명예 회복해야지?”
“······.”
“진정한 명예회복은 고인이 된 네 부친의 길이 옳았다는 걸 증명하는 거다. 정확하게는 신돈의 길이겠군.”
“설, 설마.”
“전민변정도감. 전주에서 다시 시작하겠다.”
“!!!”
“이만하면 나를 믿을 수 있겠나?”
이옥의 눈에는 습도가 거세가 올라왔다.
“따르겠습니다. 주공.”
“내가 내건 조건의 효력은 여기까지. 그러면 앞으로 나를 진실로 섬길 이유는 네가 만들어야지.”
왕선의 말이 이옥의 뇌리를 관통했다.
비참했던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쳤다.
이옥은 눈물이 흐르는 걸 느꼈다.
“앞으로는...”
“앞으로는?”
이옥은 오열하며 말했다.
“웃고 싶습니다.”
“허락하지.”
“감사합니다. 주공.”
“네 입가에 미소가 걷어지는 날. 나를 떠나도 좋다.”
“항상 웃겠습니다.”
“그 또한 허락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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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곱씹었다.
“대표 없이 과세 없다.”
피식 웃었다.
“그냥 애송이 술주정뱅이가 아니었어.”
머릿속이 복잡했다.
“거. 누가 애송이고, 누가 술 주정뱅이오?”
평온하던 정도전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왕선이 싱글벙글 웃고 있다.
“왜 남의 말을 엿듣소?”
“됐고. 계속 그럴 거요?”
“아닌 밤중의 홍두깨라더니. 남의 밤 산책을 방해하더니 그게 무슨 말이시오?”
“검증은 다 한 거 같아서.”
정도전은 조금 움찔했다.
“검증이라니요?”
“이 사람을 검증했지 않소이까.”
“누가? 내가? 누구를? 목사를요? 하하. 농이 과하시오.”
“내가 지금 농을 하는 거로 보이시오?”
어느새 왕선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다.
칠색 팔색하며 촐랑대던 정도전은 머쓱하게 밤하늘을 보면서 차분히 자세를 고쳤다.
“내 검증이 긍정적이라고 자신하는 이유가 있소?”
“계구수전.”
“뭐, 뭐요?”
정도전의 목소리는 사래가 걸린 듯 거칠었다.
“내가 전주에서 그 비슷한 걸 흉내 내고 있소. 앞으로 내가 점령할 지역은 모두 이렇게 할 것이외다. 즉, 전주는 시범지역이라는 거요.”
“······.”
“그런데 알지 않소이까. 그건 이 땅에 일찍이 없던 토지 제도요. 어떤 부작용이 발생할지 가늠할 수가 없소. 선행을 제대로 해볼 수 없는 여건도 있었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오?”
“당신이라면 나보다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전 선생이 있지 않소.”
“전 선생은 전 선생의 역할이 있고.”
정도전은 혼란스럽다.
일전에 재상 총재제를 언급하더니 이제는 계구수전이란다.
...정도전 본인의 신념이 왕선의 입에서 줄줄 나오고 있는 거다.
“나는 당신의 신념을 이 땅에 구현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오.”
이성계는 아니야. 이건 사실이야. 역사가 그랬으니까.
왕선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정도전의 눈을 정면으로 주시했다.
“어떻소?”
“···뭘 말이오?”
“나의 군사가 되어주시겠소?”
정도전의 안색은 굳어졌고, 눈에는 갈등이 일었다.
사실 이성은 왕선을 높게 평가했으나 감정적으로 그 사실을 인정하기 힘든 이유가 있었다.
“목사께서는 미륵을 참칭했소.”
“맞소. 그걸 백성이 원했으니까.”
“나는 유자. 불교를 증오하오.”
“그것도 알고 있소. 얼마든지 증오하시오.”
“···만일 목사가 민본의 가치를 꺼내서 백성을 교화해냈다면 나는 이토록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오. 그러나 현실은 석가의 말로서 백성을 현혹한 것이오.”
“민본의 가치가 구현된 세상이 불국정토요.”
“그럴 수도.”
의외로 정도전은 반박하지 않았다.
사실 이 자리에서 구태의연한 논쟁을 하는 건 무의미하다.
정도전이 본 왕선은 불교를 신봉하는 사람이 아니다.
미륵의 이름으로 백성을 규합한 군웅이었다.
그러니 왕선이 언급한 불국정토는 태평성대를 의미하는 걸 알기에 따지고 들지 않은 거다.
그리고 바로 그 부분이 정도전의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솔직히 당신을 믿지 않았소.”
“알고 있소.”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없을 수도 있지만 그랬소.”
“없는 거 맞소.”
“내가 지금 농을 하는 거로 보이시오?”
“사과하리다.”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전주의 태평성대는 전 선생의 치적이라고 생각할 거요.”
“그래서? 지금은 아니오?”
“인정하겠소. 당신의 역량. 대단했소. 감탄할 정도로.”
“그런데 왜 고민하오?”
정도전은 숨을 내뱉듯 말했다.
“왜 하필 미륵이오?”
“그 이름이 그렇게 마음이 걸리는 것이오?”
“이 나라가 홍건적과 왜구 그리고 권문세족과 이인임 때문에 이 사달이 났다고 보시오? 단지 그들 때문에 그랬다고 보는 거요? 아니외다. 이 나라는 근본부터 썩은 것이오. 고려의 근본. 바로 불교요. 좋소. 백 보 양보해서 석가? 부처? 다 인정할 수 있소. 백성이 사사롭게 마음의 위안으로 삼는 걸 어찌 강제할 수 있겠소? 그러나 작금의 불교가 어디 그렇소? 그들은 석가의 이름을 팔아서 민심을 교란하고 있소. 엄청난 사유지를 운영하면서 단 한 번도 백성을 구휼하지 않는 파렴치한 그 작태를 보시오. 어디 그뿐이오? 멀쩡하게 경작하는 백성의 토지까지 뺏어가오. 토지 겸병? 그것이 귀족의 전유물이오? 불교도 제대로 발을 걸치고 있소. 바로 당신이 참칭한 미륵이 신으로 있는 그 불교!”
정도전의 어조는 격앙됐다.
“그 불교가 거목의 뿌리를 썩게 만든 것이란 말이외다.”
“······.”
“해서, 내 눈에 당신은 세상을 구원할 미륵이 아니라 민심을 현혹한 궁예로 보이는 것이오.”
“내가 미륵을 참칭했기에 불교와 결탁할 수밖에 없다?”
“아니오?”
“사원전 몰수. 약조하리다.”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고?”
“사원전도 계구수전? 뭐. 그거. 해보시오.”
“불교계와 척을 지겠다? 고작 전주 목사 따위가?”
“전주 목사 따위라니. 됐고. 어쨌든 지금은 믿으라는 말밖에 할 수 없소.”
“좋소. 당신의 의지. 믿어보겠소. 한데, 고려에서 그게 가능하오?”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조선은 가능하겠지. 그런데 조선은 없을 거야.
“내가 미륵인데 왜 불가능하오? 미륵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땡중이니 벌해도 괜찮소.”
“허.”
“미륵이 민본의 기치를 들겠소.”
정도전의 눈이 흔들렸다.
그러나 금세 날카로운 어조로 되물었다.
“고려에서?”
“고려는 불교도 있고 유학도 있으니 가능할 거 같소만?”
너무나도 단호한 어조.
정도전은 머뭇거렸다.
왕선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만일 미륵이 민본을 버릴 때 당신도 나를 버리시오.”
“너무 늦으면? 내가 당신에게 힘을 보태서 너무나도 강대해졌는데 그때 떠난들 뭘 할 수 있소?”
“대단한 자신감이군.”
하긴. 정도전이라면 이 정도는 해야지.
왕선은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할 거요. 미륵의 제일 군사로서 첫 번째 역할이오.”
“나는 답변을 듣지 않았소.”
“당신에게 전권을 주리다. 언제라도 내 목을 딸 수 있게.”
“!!!”
“이래도 못 믿겠소?”
어차피 왕선이 있는 한 불순한 의도로 권력을 흔드는 건 불가능하다.
정도전의 눈은 격하게 흔들렸다.
“당신의 최종 목표가 뭐요?”
“몰락한 왕족이 권력을 잡은 재상 총재제.”
재상이 권력을 잡은 재상총재제에 의하면 군주는 올곧은 재상을 임명하는 걸로 역할을 다한다. 그리고 왕선은 올곧은 재상을 바라볼 수 있는 절대적인 권능이 있다. 전권을 잡아서 군왕에게 이를 천거하면 될 일이다.
“···그 뒤는?”
정도전의 어조에는 묘한 긴장감과 설렘이 담겼다.
“고려의 존속. 딱 거기까지.”
정도전의 얼굴에 아주 잠시 진한 아쉬움이 스쳤다.
< 43화 두 사람을 얻다(제목 수정, 후반부 내용 삭제)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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