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미륵이니라-42화 (42/187)

< 42화 대표 없이 과세도 없다 >

조선 창업을 입안한 혁명가.

난세를 끝장내고 민본의 나라를 연 선구자.

그러나 끝내 마지막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비운의 개혁가.

삼봉 정도전.

바로 그 사람이 눈앞에 있다.

그리고

...진짜 죽이고 싶다.

왕선은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당신이 삼봉 정도전일 줄은 몰랐소.”

왜구가 창궐하고 권문세가의 횡포가 천하를 뒤덮은 나라.

권신의 횡포로 군웅할거가 개막된 난세 중의 난세.

그러나 백성의 목소리로 권농서를 만들고 땅을 나누는 선정이 이뤄지는 지역을 일궈낸 사람.

어지러운 세상임에도 백성의 입가에 웃음을 내린 전주 목사가 눈앞에 있다.

정도전은 조소를 날렸다.

“전 선생께서 참으로 고생이 많으셨겠소?”

-술주정뱅이를 모시는 게 얼마나 힘들까. 차라리 이인임을 섬기는 게 쉽지.

...보아하니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구나.

이 기괴한 대치의 중립지대에 속한 전녹생은 어색하게 웃었다.

“삼봉.”

“오...랜만에 뵙습니다. 선생께서는 무탈하셨...을 리가 없으시겠군요. 참으로 노고가 많으십니다.”

“전 선생.”

왕선이 끼어들었다.

“예. 주공.”

“목은 이색의 제자이자 포은 정몽주의 동문을 오늘 만나기로 하지 않았소?”

“그...렇습니다.”

“그 사람은 좀 늦나 보오?”

“음.”

이 사람이 그 삼봉 정도전 아니라고 말해.

동명이인이라고 말하라고.

왕선은 간절했다.

그러나

“···이 사람이 그 삼봉 정도전 맞습니다.”

왕선은 한탄했다.

정도전의 눈꼬리를 올리면서 말했다.

“전 선생. 전주 구경은 잘 했습니다. 참으로 좋은 곳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이 감동을 잊지 못할 거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뜻한 바가 있어서 내일 일찍 길을 떠나려고 합니다.”

왕선은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일단 이 인간이 삼봉 정도전인 건 확실하다.

성격이 지랄 같아도 이성계, 이방원과 함께 조선 건국의 3대 주주 중 한 명인 그 정도전이 확실하다.

“전 선생.”

“예. 주공.”

“주공은 무슨. 전 선생. 소생이 더 좋은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함께 가시죠.”

“삼봉. 말이 과하네. 어찌 이렇게 경망스럽게 행동하는가?”

전녹생의 목소리에는 노기가 은은하게 담겼다.

그제야 정도전은 눈치 살피는 시늉을 한다. 물론 진심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전 선생. 이 사람과 따로 대화를 나눠도 되겠소?”

“됐소. 일 없소. 갈 거요. 뒤도 안 돌아보고.”

“어허. 삼봉.”

다시 쭈글해지는 정도전.

전녹생은 한숨을 쉬더니 공손하게 말했다.

“하면, 소생은 먼저 돌아가겠습니다.”

“고맙소.”

“아닙니다. 편히 대화를 나누십시오. 삼봉. 허튼 생각 말고 주공의 말씀을 듣게. 만일, 또 경거망동하면 자네를 용서치 않을 거야.”

전녹생이 물러나자 정도전은 다시 자세를 편하게 하더니 술잔을 들었다.

“거. 우리 사이에 무슨 할 말이 있다고. 그래도 고생이란 고생을 다 하는 우리 전 선생께서 저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들어나 보겠소. 그러나 이 술 다 마시면 갈 거요.”

“그거 내가 산 술이외다.”

“그래서 술값 한다는 거요.”

“먹을 필요 없소. 순식간에 술이 확 깰 거니까.”

“어련하시겠소?”

까칠하기가 이를 데 없다.

그래. 어디 보자. 언제까지 그렇게 나대는지.

왕선은 내뱉듯 한 단어를 던졌다.

“재상 총재제.”

“재상 총재제는 무슨 얼어 죽을. 술이 하나도 안 깨는...뭐, 뭐요?”

왕선은 정도전의 손에서 술잔을 뺏었다.

“이건 내가 마시겠소.”

“방, 방금 뭐라고 했소?”

“술주정이나 부려봤소. 하면, 인연이 닿으면 또 봅시다. 살펴 가시오.”

“이, 이보시오.”

왕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도전은 눈을 껌뻑이다가 황급히 외쳤다.

“목, 목사!”

왕선이 걸음을 옮겼다.

“목, 목사 나리.”

호칭이 계속 바뀐다.

그러거나 말거나 왕선은 미련 없이 주막을 나섰다.

이미 거세게 요동치는 정도전의 속내를 다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는 절대 전주를 나가지 못할 거다.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일단 월척이 미끼를 문 거다.

정도전은 입을 벌린 채로 멍하게 왕선의 뒷모습만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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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임이 날린 신의 한 수는 고려 전역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말 그대로 군웅할거가 개막된 거다. 이름만 들어도 알 정도로 의미 있는 존재감을 보이는 세력이 고개를 치밀었다.

동북면의 이성계, 철원의 최영, 원주의 변안열, 경산의 배극렴, 밀양의 박위, 순천의 정지, 영천의 최무선, 남경의 이원계, 산청의 문익점, 단양의 우인열, 보령의 김성우, 청송의 심덕부, 합주(합천)의 양백연, 충주의 지용기.

그리고 전주의 왕선.

특이한 건 이성계의 이복형이었던 이원계가 반 이인임 연합군 이후 남경에 그대로 똬리를 틀어버렸다는 거다.

이들만이 아니다. 군현에서 미약한 힘이라도 가진 사람은 너도나도 군웅할거에 동참하고 나섰다. 이로 인해서 사실상 고려 전역에서 군웅이 난립하게 됐다.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변하고 있다.

이러한 시절에 수수방관하며 변화를 따라가지 않으면 몰락하게 된다. 그러하니 당연하게도 전주관청은 회의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다.

천목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말했다.

“형님. 저 사람은 누굽니까?”

“군식구.”

“거. 군식구라니. 말씀이 과하시오.”

정도전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면 뭐요?”

“참관인.”

“당신이 뭔데 전주관청의 일을 참관하오?”

“성리학자.”

“아. 그렇소? 인제 보니 대단한 사람이었구려?”

조롱을 들은 정도전이 따지려고 했으나 전녹생의 눈길이 매섭다.

입맛을 다시면서 활활 타오르는 전투 의지를 가라앉혔다.

“주공. 저수지 축조가 거의 끝을 보입니다.”

“하면, 백성들과 약조한 대로 땅을 나눠야겠구려.”

“예.”

“거. 땅을 나눌 때는 우물 정자로 딱 구분해서 나누면 되오.”

득달같이 끼어드는 정도전.

왕선은 무시했다.

“저수지 축조 참가 여부를 최우선으로 하시오.”

“혹시 식구가 많은 가호는 어찌합니까?”

“당장은 거기까지 챙길 수는 없소. 지금 중요한 건 토지 분배의 신뢰성이니까.”

저수지 축조의 대가로 분배되는 토지다.

여기에 다른 가치가 개입되면 시비가 발생할 가능성이 아주 크다.

“알겠습니다.”

“거. 박하구려.”

무시했다.

전녹생도 고개를 저었다.

“주공. 조세를 정리해야 합니다.”

“우물 정자로 딱 나누면 가운데 땅이 있소. 그 땅의 수확을 조세로 하고 나머지는 백성들이 가져가면 딱 맞겠구먼.”

정도전이 또 끼어들었으나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기존의 법도대로 생산량의 1할로 하겠소.”

전녹생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땅을 가진 자작농의 조세가 아닙니까. 지금 대상은 주공의 땅을 빌려서 경작하는 전호들입니다. 같은 법도를 적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응? 전 선생. 그 땅이 목사의 땅이라니요?”

“자네는 좀 조용히 하게.”

“끙.”

전녹생이 정리하자 정도전은 다시 쭈글해졌다.

왕선은 기분 좋게 웃었다.

“괜찮으니 그리하시오.”

그때 정도전의 눈빛이 사뭇 진지해졌다.

-이것 봐라? 음. 아니지. 아니지. 말은 누가 못해. 구체적인 대안이 있고 현실 감각이 있어야지. 암. 그래야지. 그래도 내가 좀 가르침을 내려야겠지? 어디 보자. 좋아. 이참에 이 삼봉이 제대로 검증해주지.

...미친놈.

왕선이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릴 때 정도전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렸다.

“그래도 난세인데 군량을 잘 비축해야지. 아. 혼잣말입니다.”

전녹생의 꾸중을 대비해서 방패도 잘 만들어 두고 있다.

계속 무시하던 왕선이었으나 이번만은 답해주기로 했다.

그러니까 검증에 응해주기로 한 거다.

“책상물림이 뭘 알겠소?”

물론 좋은 말은 안 나왔다.

일단 걸었다.

“뭐, 뭐요?”

“쌀이 부족하면 경작지를 더 확보하면 될 일이거늘.”

“허.”

“무릇 농업은 천하의 근본이오. 근본을 근본답게 세우려면 기반을 잘 닦아야 하지 않소? 군량이 부족해서 조세를 늘리는 이인임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어찌 유자란 말이오?”

“뭐, 뭐요? 이인임? 지금 말 다 했소?”

“덜 했소. 보면 모르시오?”

“이, 이런.”

“무릇 진정한 애민가는 쌀이 부족할 것이 예상될 시 경작지를 더 확보할 고민을 하는 게 도리오. 이게 정상이오. 보아하니 이해를 못 하는 거 같은데 내가 큰 가르침을 내려주리다.”

어디서 많이 듣던 논리다.

정도전은 말문이 막혔다.

“잘 보시오. 이번에 1할의 조세만 거둔다면 백성들은 환호할 거요. 그리고 느낄 것이오. 황무지를 더 개간해도 관청이나 유력가가 뺏어가지 않는다는 걸 확실하게 안 건지. 옥토에서도 1할을 거두는 관청이 뭐하러 황무지를 뺏어가겠소? 이로 인해서 전주관청은 백성의 신뢰를 얻게 될 것이외다. 이는 약간의 쌀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가치란 말이외다. 무릇 위정자라면 눈앞에 재물보다 백성의 마음을 얻어야 하거늘. 당신은 한참 멀었소. 그래서 책상물림이라는 거요.”

왕선은 숨을 고르고 곧장 말을 이었다.

“아직 이해를 못 한 거 같으니 이렇게 말해주리다. 아주 간단한 지극한 현실이라오. 전주의 모든 옥토가 경작되오. 황무지도. 이건 전체 생산량의 폭발적인 증가를 가져올 거요. 그리고 권문세가의 창고로 빠지는 쌀도 없소. 모두 전주관청에 귀속된다는 말이외다. 이렇게만 해도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조세를 확보할 수 있소. 이제 좀 알겠소? 이게 정치요. 이게 정상이고. 뭐. 알 리가 없지. 맨날 토지 겸병이 틀렸다는 노래만 부르고 대안은 제시 못 하는데. 희한하오? 그런다고 다 해결되오? 참으로 답답하구려. 썩 물러가시오.”

정도전은 입만 벌리고 있었다.

-...이 궁예 놈이 나를 농락해?

검증한다더니 검증은 안 하고 흥분해서 열만 뻗친 거 같다.

왕선은 실소를 머금었다.

그러고 보니 정도전의 속이 좁아터졌다는 역사의 기록을 본 기억이 떠올랐다.

당한 건 절대 잊지 못하고 밤새 끙끙 앓고 반드시 갚아주려고 했다던가?

그리고 아주 많이 덤벙거리고 촐싹거렸다는 기록도 스쳤다.

인제 보니 그건 아주 정확하고 강직한 사서의 붓놀림이다.

왕선은 내친김에 조금 더 조롱해주려고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럴 수가 없었다. 느닷없이 익주(익산)에서 사람이 온 탓이다.

“익주 따위가 전주목에 사람을 보내? 희한하네. 심지어 이런 난세에?”

정도전의 혼잣말. 그리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했다.

전주목에서 사람을 보내면 보냈지 익주에서 보낼 만한 일은 단연코 없다.

원래 전주목은 1속군과 11현이 딸려 있었다. 1속군은 금마군이었는데, 충혜왕 5년(1344) 원 순제의 황후였던 기씨의 외가가 있던 곳이라고 하여 익주(익산)로 승격됐다. 그리고 11현 중 함열현은 현령이 파견(1176)됐고, 용안현도 충숙왕 8년에 승격됐다.

그 외로 낭상현(낭산), 옥야현(익산시 북일동, 오산면), 진안현, 우주현(익산시 왕궁면과 완주군 제내리 일대), 고산현, 운제현, 마령현, 여량현(여산), 이성현이 있다.

그러니까 원래 익주는 전주목에 속한 군현에 불과한 것이다. 아무리 지금 독립된 상태라고 할지라도 전라도의 상징적인 거점인 전주목에 들이댈 수준은 아닌 거다.

“이거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 같은데.”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왕선은 슬쩍 쳐다봤다.

-전주 목사가 얼마나 부실하길래 익주에서 덤빌까?

...하. 진짜 이 인간을 죽일까?

왕선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잠재운 채 관청을 나섰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이 온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수레를 잔뜩 끌고 왔다.

백 보 양보해서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함께 온 병졸들이 수레에 짐을 싣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백성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다. 그러니까 백성을 쌀을 뺏어 수레에 싣고 있는 거였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인가!”

마천목이 대갈성을 질렀다.

그러자 익주의 관리가 아니꼬운 표정으로 쳐다봤다.

“조세 징수하는 중이외다.”

“조세?”

“전주에서 익주목으로 안 보내서 우리가 받으러 왔소.”

...익주목?

왕선의 눈이 가늘어졌다.

관리는 눈치껏 문서를 내밀었다.

“전주를 익주목에 편입시킨다는 내용이오. 확인해보시오.”

참으로 얼토당토않은 말이었다.

“이인임의 계책이군.”

정도전의 말대로다.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의 앞글자를 딴 지역이다. 한데, 익주가 전주를 다스린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결국, 이는 전주를 완전히 고립시키려는 이인임의 수작질이다.

한차례 어명으로 재미를 본 이인임이 툭 던진 수가 분명했다.

만일 성공하면 좋고, 아니어도 그만인 수준의 장난질이었다.

...장난질. 그래. 장난질이다. 관리가 가져온 문서는 교지도 아니고 그냥 붓을 휘갈겨 쓴 것에 불과하니까.

왕선은 싸늘한 눈초리로 공문을 노려봤다.

그리고 찢어서 내던졌다. 찢긴 종이가 사방에 흩날렸다.

대경한 관리가 허둥지둥거린다.

“나는 이 나라 고려의 왕족으로서 주상의 어명을 받아 전주를 통치하고 있다. 한낱 권신의 말을 들을 이유는 없다.”

“이, 이보시오.”

“나는 전주 목사다. 한데, 전주목을 없애고 익주목을 설립한다? 하면, 나는 파직되는 것이지. 이곳 전주는 조정의 관리가 단 한 명도 없다는 말이 된다.”

어차피 군웅할거다. 이 자리에서 확실히 한다.

왕선은 오른손 검지를 치켜들면서 선언했다.

“대표 없이 과세도 없다.”

그 엄중한 태세에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심지어 백성의 쌀을 수탈하는 탐관오리는 말할 필요도 없지.”

검지를 움직여서 관리를 지목했다.

“내쳐라!”

< 42화 대표 없이 과세도 없다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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