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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41화 (41/187)

< 41화 삼봉 정도전 >

정도전은 거칠게 팔을 뿌리쳤다.

왕선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보시오. 도와준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하는 게 도리 같은데.”

“고맙소.”

정도전은 발걸음을 옮기더니 적당한 곳에 자리 잡고 앉았다.

왕선은 더 말을 섞고 싶지 않아서 등을 돌렸다.

“말세야. 말세. 나라 꼴은 이 지경인데 부모 잘 만난 한량이 술이나 퍼먹고 있으니.”

왕선의 이마에 힘줄이 치솟았다.

“이보시오. 나한테 한 말이오?”

“알면 됐소.”

“허.”

“또 보지 맙시다.”

“하. 이보시오.”

“마음 같아서는 당신을 여기 앉혀놓고 세상의 이치에 대해서 일러주고 싶은데 나는 굉장하게 바쁜 사람이라서. 당신으로서는 이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을 기회를 놓쳐서 굉장히 아쉽겠지만, 나로서는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지 않은 거라고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한다오. 뭐. 그렇다고 통탄해할 필요는 없소. 또 만날 수도 있으니까. 물론, 나는 사양하겠소. 다음에는 아는 체도 하지 마시구려. 간절하게 부탁드리오? 그러면 술 맛있게 잘 드시구려.”

그렇게 정도전은 자리를 떠났다.

왕선은 입을 벌리고 눈만 껌뻑였다.

“주공.”

“아, 아. 전 선생.”

전녹생이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다.

왕선은 황급히 정신을 똑바로 잡았다.

“혹시라도 삼봉 정도전을 만날 수 있을까 해서 거닐고 있었소. 겸사겸사 백성들도 살피고.”

“하하. 이런. 그렇게 기대가 크십니까?”

“험험.”

“삼봉도 무척 좋아할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포은 정몽주는 알아도 삼봉 정도전은 모르지요. 하지만, 소생은 그의 진가를 알고 있습니다. 또, 삼봉도 자신을 알아주는 주공을 만나면 견마지로를 다할 겁니다.”

전녹생은 부드럽게 웃었다.

“삼봉이 전주를 돌아보면서 많은 걸 느끼게 될 겁니다. 자연스레 제 자리를 찾을 것이니 그에게 시간을 주시지요.”

왕선은 멋쩍게 웃었다.

“내가 괜히 설레발을 쳤소.”

“하하. 아닙니다. 실은 아까 서찰이 왔습니다. 오늘 밤 주막에서 보기로 했습니다. 아. 송구합니다. 그 인사가 워낙 술을 좋아하는지라 관청이 아니라 주막을 장소로 했습니다.”

“험험. 알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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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정의 사가를 나온 정도전은 당혹스러웠다.

전주 목사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얻고자 안면이 있는 이문정을 찾았다.

그런데 이문정은 알고 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꼬장꼬장하다고 느낄 정도로 고집스러운 모습과 정기로 가득하던 눈빛은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보다 못한 이백유가 정도전에게 양해를 구하자 별 소득 없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백성은 웃고 있다.

그런데 전주 최고의 명문이라고 할 수 있는 전주 이씨는 왕선에 대한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적개심이 가득하다.

“양측이 크게 충돌해서 그런가?”

전주에 도착한 뒤 수소문을 해보니 전주 관청과 전주 유력가의 힘 싸움이 있었다고 한다. 결과는 전주 관청의 압승이었고, 유력가들의 토지를 몰수당했다고 한다.

그런 사정을 고려할 때 전주 이씨가 왕선에 대해서 좋게 평가할 수 없긴 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쉽게 이해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왕선에 대해서 쌍욕을 했다면 이렇게까지 고민하지는 않았을 거다.

어느새 전녹생과 약조한 주막에 당도했다.

꽤 늦은 시간이었는데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이 보인다.

전주의 풍족함을 또 볼 수 있구나.

이 시간까지 주막에서 술을 팔아주는 사람이 있다니.

정도전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렸다.

보아하니 아직 전녹생은 도착하지 않았다.

그래. 이리된 거 저 사람과 술잔을 기울이면서 전주 목사에 대해서 들어보자.

태연하게 걸어서 적당하게 거리를 띄우고 앉았다.

부드럽게 웃으면서 먼저 자리한 사람을 쳐다봤다가 표정이 썩었다.

정도전의 실물을 영접할 생각에 들떠 있던 왕선의 마음에 거센 풍랑이 일었다.

인기척이 들리기에 고개를 들었는데

-또 이 새끼야?

재수 없는 낯짝이 보인 거다.

-이 새끼는 또 술 처먹네?

왕선의 볼이 격하게 떨렸다.

목울대에서 험한 말이 거세게 치밀었다. 입 밖으로 내뱉는 것만 남았다.

그러나

“뭐요?”

상대가 한발 빨랐다.

왕선의 미간이 와락 일그러졌다.

“당신은 뭐요?”

“또 당신이오?”

“하. 이보시오. 내가 먼저 왔소. 한데, 당신이 늦게 온 주제에 거기 앉은 거고.”

“됐고. 왜 계속 따라다니는 거요?”

왕선은 평정심이 끊어질 것 같은 빡침을 느꼈다.

스치듯 두 번 만났다. 이 자리가 세 번째다.

...그러나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인사다.

-하. 진짜 팔자 좋은 놈이네? 개경 찍고 전주 찍고 술이나 처먹고? 다음에는 어디를 찍을까? 왜국은 안 가냐? 에라 술주정뱅이 놈아.

“내 말 안 들리시오?”

“됐소. 당신과 말 섞는 건 너무 시간 낭비외다. 썩 물러가시오.”

“왜 나를 쫓아다니는지 이유나 말 하시오.”

“이보시오. 내가 왜 당신을 쫓아다닌다는 거요?”

“그걸 지금 내가 묻고 있는 거요. 왜 따라다니는 거요?”

“하. 내가 당신을 왜 따라다닌다는 거요?”

“그러니까 지금 묻고 있는 거요. 왜 따라 다니시오?”

...뭐 이런 인간이 있어?

왕선은 말문이 막혔다.

“음. 보아하니 일부러 쫓아다닌 건 아닌 것 같구려.”

정도전은 혀를 차면서 말했다.

“이 어려운 시국에 술이나 퍼먹으니까 정신 못 차리고 아무나 뒤 따라다니는 거요.”

“당신 미쳤소?”

“미치지 않고는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긴 하오.”

정도전은 한탄하면서 술잔을 낚아챘다.

왕선의 헛웃음을 지었다.

“그거 내 술잔이외다.”

“거. 보니까 돈도 많은 거 같은데 각박하게 굴지 마시구려. 시절이 수상할수록 돕고 살아야지.”

“내가 당신 도왔다가 험한 말을 들었는데?”

“거. 속 좁기는.”

속을 다스려야 한다.

“옴마니 반메홈.”

“석가의 잡소리.”

“옴마니 반메홈.”

“석가의 잡소리.”

말을 할수록 말리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관심법으로 상대의 속을 들여다보는 왕선이다.

해서, 항상 여유롭게 대화를 끌어갔다. 그런데 유독 이 사람은 아니다.

정신없을 정도로 몰아치는 화법이 정말 감당하기 어렵다.

“오래 안 있을 거니까 빡빡하게 굴지 마시구려.”

정도전은 대놓고 궁둥이를 옮겼다.

왕선은 자연스레 옆으로 밀려났다.

“그런데 맨날 술이나 퍼먹으면 양심에 가책이 느껴지지는 않소?”

“그게 당신이 할 말이오?”

“보시구려. 이인임이 어명을 휘둘러서 연합군을 해산시켰지 않소? 나는 이걸 보면서 참 가소롭더라고.”

갑자기 진지해진다.

왕선은 황당했으나 들어보기로 했다.

“왜 가소롭냐고 물었소?”

“내가 언제?”

“내가 말해주리다.”

들어보기로 한 마음이 금세 식어가고 있다.

“권신의 횡포를 끝장낸다는 명분으로 일어난 연합군이 어명을 거역할 수 있을까? 당연히 거역할 수 있지. 아주 간단하오. 저번처럼 거창하게 연합군이 아니라 개경에서 칼을 들고 일어났다고 가정해보시오. 갑자기 이인임이 어명 들고 와서 꿇어라! 이렇게 하면 전하! 이러면서 대가리 박겠소? 안 박지. 왜? 거기서 박으면 진짜 역적 되는 거고 이인임을 죽이면 구국의 명신이 되는 건데. 제정신이 박혔으면 절대 안 박지. 그런데 왜 연합군은 대가리를 박았을까?”

정도전은 기분 좋게 술잔을 기울였다.

“주판 굴려보니까 싸워도 별 볼 일 없거든. 계속 그 생각만 한 거요. 그런데 이인임이 딱 명분을 만들어 준거라오. ‘올 테면 와봐. 미친 듯이 도주해줄 테니까. 여차하면 왕을 죽일 수도 있고.’ 캬. 기가 막히지 않소? 천하에 이처럼 완벽한 명분이 어디 있겠소? 대가리 굴리던 연합군 장수들은 무릎을 '탁' 치면서 물러난 거요. 게다가 이인임이 큰 선물도 좋지 않소? 아시오? 뭐. 당연히 모르...”

“군웅할거.”

“어?”

정도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새끼 술 처먹고 돌아다니면서 귓구멍은 열려 있었나 보네?

왕선은 눈썹을 찡그렸다.

참. 마음에 들지 않는 인사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상당히 놀랐다.

별 시답지 않은 미친놈인 줄 알았는데 식견이 제법이지 않은가.

약간의 흥미가 동했다.

“앞으로의 정국은 어찌 될 거 같소?”

“궁금하시오?”

“술값 내기 싫으면 선선히 떠들어보시오?”

“뭐. 말로 하는 건데 어려운 것도 아니고.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소.”

정도전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500년 거목의 뿌리가 썩어갈 거요.”

“그걸 말이라고 하오? 당연히 썩지.”

“허.”

“거목의 가지들이 싸워대는데 멀쩡할 리가 있소?”

-아니 근데 이 새끼가.

이 인간이 진짜.

왕선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번에는 내가 말해보겠소.”

“들어나 보지요.”

“거목에 거름을 주려는 사람과 나무꾼으로 나뉘게 될 거요.”

“그걸 말이라고 하오? 군웅할거가 개막되면 고려를 유지하려는 사람과 고려를 멸하려는 사람으로 당연히 나뉘오. 기가 막히는군.”

“거. 말을 참 직설적으로 하는구려?”

“답답해서 그럽니다. 답답해서.”

“됐소. 어쨌든 내 결론은 군웅할거는 짧을수록 좋다는 거요. 이 나라를 위해서.”

“아니지. 백성을 위해서요.”

“나라를 위하는 게 백성을 위하는 거요.”

“나라와 백성은 다르오.”

“나라가 있어야 백성이 있지.”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소.”

“나라가 없으면 백성이 아니라 그냥 사람이오.”

“그들이 모여서 나라를 만드는 거요.”

“국경 밖에 있는 이들도 우리 백성이오?”

“그건 아니지.”

“내 말이 그 말이외다. 백성은 이 나라의 테두리에 있어야만 백성이오.”

정도전은 골똘히 생각한다.

슬쩍 왕선을 쳐다봤다.

-아니 근데 어린놈의 새끼가 말대답이나 또박또박 하네? 술자리에서 귀동냥으로 들은 걸 지껄이면서?

왕선의 이마에 힘줄이 선명하게 솟았다.

그때 연륜이 담긴 목소리가 들렸다.

“벌써 와 계셨군요.”

왕선의 고개가 돌아갔다.

“전 선생.”

정도전의 고개가 돌아갔다.

“전 선생.”

...그 순간 왕선과 정도전의 눈이 마주쳤다.

“...전 선생?”

“...전 선생?”

정도전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졌다.

왕선은 걷잡을 수 없는 불안함이 무저갱에서 올라옴을 느꼈다.

“하하. 주공. 소생이 늦었습니다.”

정도전의 눈에는 감히 표현할 수 없는 크기의 현실부정이 자리 잡았다.

-이, 이 인간이 전주 목사 왕선이라고? 이 술주정뱅이가?

그 순간, 이문정의 말이 스쳤다.

[그는 궁예의 현신일세.]

-이제 보니 정말 궁예처럼 생겼네. 궁예의 현신이라는 말이 딱 맞는구나. 그래. 아까 옴마니 반메홈이라고 지껄일 때 알아봤어.

“삼봉. 벌써 와 있었는가?”

왕선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씨발. 이 인간이 삼봉 정도전이라고?

왜? 왜? 왜?

불안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전 선생. 소생은 오늘 깨달았습니다. 세간의 평이 다 거짓말이라는 걸.”

-이런 인간이 무슨. 그래. 전주의 태평성대는 전 선생이 한 것이야. 딱 보니까 그래.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정도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 선생. 본관은 드디어 알게 되었소. 역사의 기록은 모조리 왜곡이라는 걸.”

조선 왕조는 오롯이 이성계의 힘으로 창업된 것이로구나.

정도전의 역할은 참으로 미미했어. 그래. 그랬을 것이야.

-궁예 새끼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역사? 왜곡? 미쳤네. 어디서 술주정이야!

왕선은 매섭게 쏘아봤다.

정도전도 지지 않고 응수했다.

전녹생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참으로 기괴한 대치가 아닐 수 없다.

< 41화 삼봉 정도전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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