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잘못된 만남 >
사실 그랬다.
이인임을 몰아내고 멀쩡해진 조정에서 아웅다웅 힘 싸움을 하는 것보다는 독자적으로 세력을 키워내는 거 유리하다. 왜? 이대로 가면 조정의 주도권을 장악할 사람은 정해졌으니까.
결국, 이인임의 이번 한 수는 미약하기 이를 데 없던 연합군의 결속을 완벽하게 분쇄한 거다.
날이 밝자 조민수는 전격적으로 철군을 시작했다.
그건 시작이었다. 눈치를 보던 나머지 장수들도 서둘러서 철군을 시작했다.
철군의 명분? 역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거점에 똬리를 틀 거다.
자신의 ‘영지’를 가꾸고 힘을 키울 생각에 바쁜 ‘영주’가 된 것이다.
영지를 가진 영주가 될 수 있는 명분? 만악의 근원 이인임을 제압하려면 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만악의 근원을 뿌리 뽑으려면 힘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두 가지 명분은 모순되었으나, 누구도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왜? 이제 이 나라는 명분과 토론이 아니라 실리와 힘이 지배하는 군웅할거의 시대로 접어들게 될 것이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연합군의 주둔지는 눈에 띄게 초라해졌다.
노장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하늘이시여. 정녕 이 나라 고려를 버리시는 겁니까?”
피를 토하듯 통곡했다.
...이 지경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왕선은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왕 목사.”
이성계가 말을 걸었다.
참 희한했다. 첫 만남은 그렇게 무시하더니 언제부터 살갑게 군다.
“전주로 돌아갈 생각인가?”
“그래야지요.”
“음.”
“왜 그러십니까?”
“주상께서 어명을 내리셔서 왕 목사를 지목하셨네. 물론 사실은 아니겠지만.”
“그래서요?”
“원한다면 동북면이 왕 목사의 울타리가 되어줄 수도 있네만.”
“그 말씀은?”
“어떤가. 나와 함께 가지 않겠나?”
“말씀은 감사하지만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 몸을 지킬 정도는 됩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가? 아쉽군.”
이성계는 의외로 쉽게 수긍했다.
“아. 전주에는 내 가문의 사람이 많이 있네.”
이문정을 이르는 말이다.
왕선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아주 잘 알지요.”
“필요하면 그들의 도움을 청하게. 내 이름을 대면 될 것이야.”
“하하하. 그렇습니까?”
“···부끄럽지만 내가 전주 이씨의 가주일세.”
“하하하. 그러시군요.”
“···작게라도 자네에게 힘이 될 것일세.”
“허하하. 그러겠습니다. 응당 그래야지요.”
생각만 해도 웃겼다.
왜? 이문정은 이미 손바닥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궁예의 마력에 제압당한 이문정이 동북면에 사람을 보내지도 못할 정도다.
이성계의 눈썹이 살짝 꿈틀인다.
-웃는 게 기분 나쁘군.
기분 나쁘라고 한 거 맞다.
왕선은 더 크게 웃어줬다.
“···다음에 다시 보지.”
“살펴 가십시오.”
이성계의 마지막 속내를 곱씹었다.
-전주에 있는 이 선생이 네 일거수일투족을 내게 모두 알릴 것이다.
굳이 그런 걸 원하면 그렇게 해줘야겠지?
이성계는 철떡 같이 믿을 거고.
답답하던 속이 시원하게 뚫리는 것만 같다.
“왕 목사.”
최영이다.
왕선은 복잡한 심사를 감췄다.
“자네 말대로 하륜을 내쳤어야 했네. 그렇게 주상을 옹립했다면 됐을 건데.”
하륜이 왔을 때 왕선이 대단한 선견지명을 가지고 내치길 주장한 게 아니었다.
당연히 관심법으로 그의 속을 들여다봤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지요.”
“나를 원망하나?”
“아니라면 거짓입니다. 순식간에 보위를 탐하는 역적이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 보면 어쩔 수 없다.
최영에게 어명의 뿌리치라는 건 죽으라는 것과 같을 수도 있으니까.
아무리 매우 급한 상황이었다고 하더라도 세밀하게 방도를 찾았어야 했다.
“하지만 장군께서도 역적의 수괴가 되셨으니 어찌 탓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할 생각인가?”
-비록 지금은 이렇게 물러가지만 언제라도 다시 기회를 볼 것이다. 그때 왕 목사가 함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건데. 함께 가자고 할까?
왕선은 최대한 예를 갖춰서 말했다.
“언제라도 기회를 볼 겁니다.”
최영의 안색이 밝아졌다.
“해서, 전주의 힘을 최대한 기를 겁니다. 결정적인 시기가 왔을 때 개경을 단번에 낚아챌 수 있게 말입니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거절당한 셈이다.
고민했다. 왕선이 홀로서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기에. 그러나 잡을 수가 없다.
최영의 얼굴에는 진한 아쉬움이 스쳤다.
“그래. 나 역시 철원으로 돌아가서 군세를 키울 생각이네.”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그래야지.”
그렇게 최영도 철군을 시작했다.
전주군도 마천목이 철군 준비를 마무리했다.
“이옥은?”
이성계의 활이 이옥을 겨눈 절체절명의 순간.
마천목이 육탄전을 시도하면서 그의 목숨을 구한 거다.
이후 혼전이 진행되면서 생포할 수 있었다.
눈에 띄지 않게 잡아 가둔다고 했으나 이성계는 뭔가를 아는 눈치긴 했다.
마천목은 입맛을 다셨다.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밥은?”
“희한하게 끼니는 잘 챙겨 먹습니다.”
“다행이군. 굶어 죽을 생각은 없으니까.”
“만나보시겠습니까?”
“지금 만나본다고 바뀔 건 없지. 일단 전주로 데려가지.”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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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공. 참으로 고생하셨습니다.”
“아니외다. 그나저나 전주는 별 탈이 없었소?”
“특이할 문제는 없었습니다.”
전녹생은 빈틈없이 전주를 관리했다.
감탄을 자아낼 정도다.
흡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일전에 말씀하신 정도전 말입니다.”
왕선의 표정이 대번에 바뀌었다.
연합군 결합하기 전에 전녹생에게 정도전을 꾀어내라고 전했다.
“유배형에 처한 사람이라서 거동이 쉽지 않더군요.”
“혹시 거절했소?”
“꾸준하게 서찰을 보냈는데 품은 뜻이 있기에 쉽게 움직일 수 없다고만 했습니다.”
“품은 뜻이라.”
왕선의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설마 정도전이 벌써 이성계를 바라보고 있을까?
그건 정말 곤란한 일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서찰이 다시 왔습니다.”
왕선은 반색했다.
“나라 꼴이 이 지경이 나버려서 유배지를 벗어나게 되었다더군요. 전주에 한 번 들린다고 했습니다.”
“정말이오?”
“예. 지금쯤이면 전주에 당도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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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은 전주성 곳곳을 유심히 살폈다.
정확하게는 백성들의 얼굴을 살핀 거다.
헐벗고 굶주린 건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입가에 미소가 보인다.
태연한 기색으로 걸음을 옮겼으나 속으로는 꽤 놀라는 중이었다.
정도전이 접한 이 나라의 백성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얼굴에 미소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런데 전주의 백성은 다르지 않은가?
“음. 전주 목사 왕선이라.”
사대부 숙청의 일등 공신이 왕선이다.
정도전 본인이 나주로 귀양 간 것도 왕선의 작품이었다.
그를 증오하는 마음이 하늘만큼, 태산만큼 컸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이인임의 눈과 귀를 가릴 계책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비록 거사가 실패로 끝났으나 그 심계가 대단했다.
심지어 반 이인임 연합군까지 발의하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속단하지 않았다. 눈으로 직접 봐야 했다. 그의 생각을 듣고 대화를 나눠봐야 알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게 있다.
그의 통치하에 살아가는 전주 백성의 만족도다.
사실 이건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백성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니까.
그래도 괜찮다. 만일 전주 목사 왕선이 될성싶은 떡잎이라면 백성의 삶은 점차 나아질 거니까. 또 그를 거들게 된다면 정도전 본인이 백성을 다독일 수 있으니까.
...그런데 백성이 웃고 있다. 난생 처음 보는 모습이다.
정도전의 심장이 떨렸다.
...만나고 싶다. 미치도록. 왕선을 만나고 싶었다.
상념에서 벗어났다.
이곳. 전주를 더 돌아보고 싶다.
삼삼오오 모인 백성이 보인다.
그들 곁으로 슬쩍 다가갔다.
“예끼. 이 사람아. 그렇게 하면 농사를 망쳐.”
“아이고. 어르신. 그래서 찾아왔습니다.”
“험험. 맨입으로?”
“그럴 리가요. 시원한 탁주 한 사발 준비했습니다.”
“이 사람아. 원래 탁주부터 내밀고 말을 걸어야지. 그게 순리야.”
“이놈이 배움이 짧아서 그렇습니다. 다음부터는 제대로 하겠습니다.”
“그래. 하나씩 배우는 거지. 어디 보자. 밭이 척박하다고 했지?”
“예. 예. 작물은 안 자라고 잡초와 벌레만 생깁니다. 이러다가 폭삭 망하게 생겼어요.”
“잘 들어. 한 번만 말할 거야. 척박한 밭에는 먼저 녹두를 뿌리고 갈아.”
“그런 다음에는요?”
“일단 한잔 마시고. 캬. 좋구먼. 자자. 녹두가 무성해지잖아? 그때 갈아엎어. 그리만 해도 잡초? 없어. 벌레? 접근도 못 해.”
“정말 그렇게만 해도 충분합니까?”
“예끼. 이 사람아. 이건 관청에서 낸 농사직설에 수록된 내용이야.”
농사직설?
정도전을 고개를 갸웃했으나 금세 끄덕였다.
아무래도 전주관청에서 권농서를 만든 모양이다.
...그런데 저 노인이 글자를 알고 있다는 말인가?
“오. 한데, 어르신께서 글을 아십니까?”
적절한 물음.
정도전의 귀를 기울였다.
“이 사람아. 내가 농사직설 만들 때 참가했어. 모르나?”
“이런! 이놈이 미처 몰랐습니다.”
“험험. 한잔 따라봐.”
“예. 예.”
“전주의 늙은이라면 농사직설 만들 때 모두 한마디씩 거들었지. 그런데 나만큼 많이 떠든 사람은 없을 거야.”
“그럼요. 그럼요.”
너무 놀랐다.
백성의 목소리를 듣고 권농서를 편찬했다는 말이 아닌가?
많은 왕조에서 그렇게 하긴 했으나 다분히 형식적이었다.
해서, 권농서는 실정과 맞지 않은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데 전주의 농사직설은 철저하게 농민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권농서라고 했다.
이때 관리의 역할은 그들의 말을 받아쓰는 것밖에 없었다고 한다.
감탄, 또 감탄했다.
“저수지 축조가 끝나지?”
“예. 조만간 땅을 배분한다고 합니다.”
“자네도 참가했나?”
“물론 입지요. 이왕이면 옥토를 받아야지요.”
“그래. 꼭 옥토를 받아서 부자 되게.”
“아이고. 감사합니다. 어르신도 부자 되십시오.”
그러고 보니 전주성의 백성들은 부자되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정도전은 이 모습도 생소했다.
“뭐. 나는 축조에 참여 못 해서 황무지나 받겠지만.”
“아이고. 어르신. 어르신은 농사 안 지어도 될 겁니다. 농법을 물어보는 사람들이 어디 그냥 오겠습니까?”
“탁주만 먹고 살라고?”
“하하. 땅을 받아서 농사가 잘 지어지면 어르신의 은혜를 어떻게 잊겠습니까?”
“험험. 한잔 따라봐.”
정도전의 몸은 경직됐다.
...땅을 배분한다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타들어 가는 것만 같다.
너무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현기증이 날 정도다.
잠시, 잠시라도 앉아서 몸을 챙겨야 할 거 같다.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그의 눈에 인적이 드문 곳이 보인다.
겨우 걸었다. 좀 앉고 싶다. 다리 힘이 살짝 풀렸다.
그때
“괜찮은가?”
부축하는 사람이 있다.
정도전은 옅게 웃으면서 이 고마운 사람을 바라봤다.
...미간이 와락 찌푸려졌다.
-어? 이 새끼는 그때 팔자 좋게 술 처먹던 새끼잖아?
왕선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어? 이 인간은 그때 시비 걸던 병신이잖아?
아니 그런데 도와준 사람한테 욕지거리?
-아예 전국적으로 싸돌아다니면서 술 퍼먹나 보군. 말세야. 말세.
왕선의 볼이 거침없이 씰룩였다.
< 40화 잘못된 만남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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