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명분 그리고 개소리 >
이인임은 쓰게 웃었다.
“이거 꼴이 우습게 됐군.”
하륜은 입맛을 다셨다.
“이성계가 그때 개입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니까 내 말이 그거야.”
이인임이 죽을 듯 노려봤다.
“자네 하는 일이 그건데 이성계가 2천 기병을 이끌고 개경까지 오는 걸 모르다니. 이 정도면 직무유기 아닌가?”
“유구무언입니다.”
“일 끝나고 진지하게 대화 좀 하지.”
하륜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결과만 같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정말 결과가 같을까?”
“예?”
“내가 조민수의 목을 벤 채로 기세 좋게 주상의 어명을 꺼내서 연합군을 와해시켰다면 모든 건 원래대로 돌아가게 될 거야. 연합군을 발의한 왕선과 맹주 최영의 목도 가질 수 있고.”
이인임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런데 지금 그런가? 아니야. 보라고. 꼴이 아주 우습게 됐어. 연합군의 수뇌부는 내가 궁지에 몰려서 궁여지책으로 어명을 꺼냈다고 생각하겠지. 힘으로 감당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거라고. 힘이 부족하다? 누가? 내 힘이? 아니지. 개경의 힘이 부족한 거지.”
하륜의 안색이 굳어졌다.
“개경의 힘. 그건 고려 중앙 권력을 의미하는 거야. 각지에서 벌떼처럼 일어나 저 무리를 감당하지 못한 미약한 고려 중앙 권력. 자. 묻겠네. 과연 이후의 상황이 어찌 될까?”
이인임은 고소를 삼키면서 말했다.
“그래도 어쩌겠나? 일단 가야지.”
“소생이 실수했습니다.”
“그러니까 자네가 어명 전해.”
“예, 예? 소생이요?”
“벌이야.”
하륜은 우거지상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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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은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넋을 놓고 있었다.
아무리 이인임을 타도하기 위해 조직된 연합군이지만 군왕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는데 공격할 수는 없다. 그건 최소한의 명분을 저버리는 미친 짓이기 때문이다.
이 참담한 현실이 이인임의 계책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그때 전방에서 추적추적 걸어오는 사람이 보인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그의 입가가 시원하게 올라갔다.
“이 나라 고려를 위해서 불철주야 여기까지 달려온 여러분을 보니 감회가 새롭군요. 소생 하륜이라고 합니다.”
하륜은 우렁차게 외쳤다.
“고려의 장수들은 예를 취하라!”
“!!!”
“어명이니라!”
습도가 거세게 올라갔다.
숨쉬기도 뻑뻑할 정도였다.
노기를 참지 못한 최영이 나서려고 할 때 하륜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과인은 역적 최영의 목을 원하노라. 라고 주상께서 하교하셨지요.”
장수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하륜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어쩌겠습니까? 여기서 더 해볼까요?”
지금 하륜은 적절한 타협책을 제시한 거다.
이대로 어명을 내세워 장수들의 굴복시키는 게 최고의 상책이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적당하게 분위기를 조성하고 내부를 흔드는 게 좋다.
이성계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장군.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안 됩니다. 하륜을 내치고 진군해야 합니다.”
왕선이다.
이성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어명을 전하는 사자를 내친다?”
“어명을 전하는 사자의 형식을 취한 이인임의 수작질입니다. 이를 모르시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어명은 어명이지. 사자는 사자고.”
“지금은 전시입니다. 평시와 모든 걸 같을 수는 없습니다.”
“평시와 전시는 다르지. 그러나 어명을 대하는 장수의 충심만은 같아야지. 안 그런가?”
...당신하고 제일 안 어울리는 말이야.
왕선이 다시 나서려고 하자 최영의 손을 내저었다.
“이성계의 말이 맞아. 일단 안으로 들어가지.”
“장, 장군. 내쳐야 합니다.”
“들어나 보겠네. 그다음에 내치는 게 좋다.”
왕선은 다시 만류했다.
“이인임이 연합군을 분열시킬 책략을 준비한 겁니다. 결과는 걷잡을 수 없습니다.”
“···따르게.”
최영은 하륜을 죽일 듯 노려보더니 등을 돌렸다.
왕선은 한탄했다.
그리고 마천목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했다.
“창을 손에서 놓지 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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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수선한 분위기.
모든 장수와 하륜이 군막으로 들어오자 최영은 대갈성을 날렸다.
“네 이놈!”
“네 이놈? 허. 언제부터 어명을 전하는 사자를 그리 대하는 법도가 생겼답니까? 역적 최영 장군?”
“당장 그 입을 닥치지 못하겠나!”
“주상께서 역적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면, 역적이지요. 설마 주상의 권위보다 더 큰 거라도 가지고 있습니까?”
하륜은 깜빡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다. 가지고 있군요. 역적 최영은 왕선을 추대하고자 했습니다. 나머지 분들도 마찬가지.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반란에 동조한 역도입니다.”
매섭게 장수들을 노려보다가 싱긋 웃었다.
“하지만 주상께서 하해와 같은 성은을 내리셨습니다. 지금이라도 사병을 물린다면 죄를 사해주신다고 하셨지요.”
이건 이인임의 계책이다.
확실하다. 이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어쨌거나 옥새가 찍힌 교지다. 그 권위는 가볍게 넘길 수가 없다.
“아. 기어이 반란의 끝을 보고자 한다면 그리하세요.”
이게 본론이다.
이인임이 단지 군왕의 권위만을 준비하지 않았을 거니까.
하륜은 시원하게 내질렀다.
“미리 말합니다. 만일 반군이 진군한다면 주상께서는 천도를 단행하실 겁니다.”
“!!!”
“500년 도읍이었던 개경을 불사 지르고 평양부(서경)로 가시고자 하셨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역도와 싸우시겠노라 천명하셨지요. 소생의 말을 새겨들으세요.”
하륜의 말은 상상을 초월하는 충격을 선사했다.
장수들의 표정은 미동조차 없을 정도로 굳어졌다.
“아. 노파심에 전해드립니다. 천도를 막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이미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하륜은 콧잔등을 만지작거렸다.
“아. 노파심이 많아서 또 전합니다. 평안부까지 공격해오면 더 북으로 옮길 겁니다.”
분위기는 점입가경.
“아. 노파심이 멈추지 않는군요. 소생이 걱정이 많은 성격이라서요. 음. 천도의 길은 무척이나 험하지요. 주상의 옥체가 심히 걱정됩니다.”
...주상의 옥체가 걱정된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왕을 해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누구도 이 참담한 겁박에 대갈성을 지르지 못했다.
해맑게 웃던 하륜의 입가에는 비릿한 미소가 감돌았다.
“이런. 그게 여러분들이 원하던 수가 되겠군요. 금상이 어찌 되는 거. 통탄할 일입니다. 선왕에 이어서 금상까지. 어쨌든 그래도 좋겠습니다? 원하던 족보에도 없는 종자를 군왕으로 모시고 말입니다. 감축드립니다?”
조롱이 이어졌다.
“아. 그래도 고려의 국호는 유지되겠군요? 어쨌거나 태조 대왕의 혈통이니 말입니다. 뭐. 비록 반푼이지만 말입니다? 하하. 감축드립니다? 역도의 수괴 여러분?”
하륜은 왕선을 쳐다보면서 비웃었다.
“천세 천세 천천세?”
한껏 조롱했다.
그 말을 끝으로 하륜은 물러났다.
군막 안의 분위기는 백만대군이 패해서 전멸당한 마냥 침울했다.
실로 스산했다.
모두 시선을 돌렸으나 곁 눈길로 최영와 왕선을 흘겼다.
왕선의 손가락은 미세하게 떨렸다.
...설마 이런 방법으로 연합군의 북진을 차단할 줄은 몰랐다.
이를 악물었다. 자책했다.
...시간을 너무 끌었다. 무리해서라도 총돌격을 감행하게끔 해야 했다.
이인임에게 시간을 너무 많이 준 거다.
참담했다. 최악의 상황이다.
놓치지 않고 사람들을 살폈다.
밖에서 마천목이 대기하고 있다. 말귀가 어둡지 않으니 전주의 군세를 준비시켜뒀을 거다.
만일, 이자들이 자신을 억류하려 한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탈출한다.
“···최영 장군. 정말 왕선을 추대하려고 했습니까?”
조민수다.
그가 하륜의 말을 믿은 건 아니다. 그런데도 이런 말을 꺼낸 이유는 뻔하다.
...명분. 이 판을 엎을 명분이 필요한 거다.
이대로 북진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해졌으니까.
“나를 모르는가! 조 장군!”
“하지만 어명이 내려졌습니다!”
“그건 이인임의 계책이야!”
“장군! 어명을 누가 판단할 수 있습니까? 해서, 거역해야 한다는 겁니까?”
조민수가 고함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뭐하자는 건가?”
“애초 장군을 믿고 연합군에 결합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수백 년 이어진 가문의 명예가 곤두박질치게 생겼다는 말입니다! 역도라니. 역도라니요!”
아니다. 그게 아니다.
지금 조민수는 최선을 다해서 명분을 만드는 거다.
그리고 그의 말에 동조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최영의 안색은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정말 아니라면 왕선의 목을 베어 주상께 바치는 건 어떻습니까?”
드디어 올 게 왔다.
왕선은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 이렇게 가만히 있는 건 죽여달라고 목을 내미는 것과 같다.
고개를 뒤틀면서 조민수를 쳐다봤다.
“우습군요.”
“뭐라?”
“거. 그냥 연합군을 빠져나갈 명분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좋을 건데 말입니다?”
“뭐, 뭐라? 하. 어명을 두고 그따위 막말을 내뱉다니. 이제야 네놈의 본색이 나오는구나! 참으로 가소롭도다. 누가 네놈 따위를 보위에 올린다더냐!”
“어명이라. 이대로 진군하여 이인임을 치워도 도당에 따뜻한 자리를 마련하지 못해서 고민이 많았는데 때마침 어명이 내려졌습니다.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겠습니다?”
신랄한 욕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왕선이 적나라하게 속내를 들춰내자 조민수의 안색이 시뻘게졌다.
“그런데 어명이라면 목숨이라도 내놓을 충의지사처럼 행동합니다? 하. 지나가던 개가 웃을 겁니다.”
한껏 조롱한 왕선은 조민수의 답변도 듣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최영 장군.”
“······.”
“이대로 진군을 명하십시오. 적의 수작질에 언제까지 당할 수는 없습니다.”
왕선이 간곡하게 말했으나 최영은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머릿속은 백지장처럼 아무것도 없다.
왕선은 고소를 삼켰다.
“내일 총진군을 할 것이네.”
드디어 최영의 입이 열렸다.
공기는 삭막해졌다.
“그러나 판단에 맡기겠네. 내일 이 자리에서 다시 보지.”
왕선은 허탈하게 웃었다.
만일 그들을 제대로 움켜쥐고자 했다면 지금 바로 공격을 감행했어야 한다. 상처가 가득한 연합군 맹주로서의 권위는 오늘 밤이 지나면 없어질 것이니까.
결국, 최영은 양비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니까 연합군을 뜨고자 하는 장수들에게 확실한 명분을 준 거다.
그들은 군왕을 공격할 수 없다는 명분과 최영을 제압하지 못했다는 현실을 꺼내 들면서 빠르게 연합군을 이탈할 것이다.
이탈. 그것은 아주 간단한 이치로 이어진다.
어명을 거역한 장수들이 거점으로 회군한다?
한 마디로 개판 나버린 거다.
군막에서 나온 왕선은 쓰게 웃으면서 밤하늘을 쳐다봤다. 무수한 별이 보였다.
앞으로 전개될 고려의 정국도 저와 같을 것이다. 각지에서 별이 떠오를 것이다.
그야말로 군웅할거의 시대가 개막된 거다.
결국, 이렇게 됐다. 가장 하책으로 준비한 것이 현실로 다가온 거다.
그래도 다행이다. 하책을 대비해서 전주를 잘 다듬었으니까.
...본판은 진작에 시작된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까 아니다. 지금부터가 진짜 본판이다.
치열한 각축전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전주를 동북면 보다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자네 생각이 많아 보이는군.”
묵직한 목소리.
이성계다.
왕선은 뒤돌아보지 않고 답했다.
“···장군께서 말리지 않으셨어야 합니다. 그랬으면 지금쯤 개경의 밤하늘을 보고 있었을 겁니다.”
이성계는 왕선의 옆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연합군의 기조가 군왕의 올곧은 보필인데, 어명을 거역할 수는 없지.”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그런 말씀을 하는 거 보니까 장군도 어지간하군요.”
뭐였을까?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왕선의 입은 거침없다.
처음 이성계를 대면했을 때 버벅거리던 모습은 없었다.
“그래. 그래도 이기면 그만이지. 안 그런가?”
왕선은 고개를 돌렸다.
이성계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묘하게 웃었다.
“예. 이기면 됩니다.”
“그렇지. 이기면 된다네.”
“예. 반드시 그리할 겁니다.”
< 39화 명분 그리고 개소리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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