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대라소리 >
임견미의 패퇴 소식은 개경 전역에 퍼졌다.
백성은 삼삼오오 모여서 이를 떠들었다. 엄숙해야 할 궁중에서도 말이 새어 나왔다. 도당 역시 술렁였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연합군의 결성과 북진 소식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던 이인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어처구니가 없군. 오합지졸을 모아둔 연합군이 이렇게 잘 돌아가다니.”
“그러게 말입니다. 심지어 최영 장군이 선봉에 섰어요. 거참 신통방통합니다.”
“···자네 지금 강 건너 불구경하나?”
“그럴 리가요. 그 어떤 때보다 심각하게 이 상황을 관망하고 있습니다.”
“관망? 죽고 싶나?”
“이건 심대한 위기가 분명합니다.”
하륜은 눈알을 굴린다.
이인임은 눈을 부라렸다.
“험험. 솔직하게 여쭙지요. 연합군이 개경에 당도하면 막아낼 수 있습니까?”
“농성전?”
“예.”
“어렵지.”
“도망칠까요?”
“천도?”
“예.”
“미쳤나?”
“꼭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마시고 진지하게 고려해보십시오.”
“천도하면 어찌 되겠나? 그건 파국이야.”
“파국이긴 하지요. 역적을 피해서 주상께서 몸을 피하신 거니까요.”
“그래. 역적을 피해서...어?”
이인임의 눈이 커졌다.
하륜은 빙그레 웃었다.
“여기서 더 좋은 수를 하나 얹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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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어 대승을 거둔 연합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최영은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자네 공이 제일 커.”
“그렇지요.”
“하하하. 이 사람아. 이럴 때는 ‘아닙니다. 소직은 한 게 없습니다. 모두 장군의 덕입니다.’ 이런 겸양의 말이라도 하는 걸세.”
“이렇게 어깨에 힘주고 콧대를 세워야 연합군의 장수들이 배가 아프지요.”
“응? 큭. 그렇군. 인제 보니 자네가 나보다 병법이 더 뛰어난데?”
“그럴 수도 있지요.”
“뭐? 하하하. 이런.”
왕선이 웃으면서 농을 던졌고 최영은 기분 좋게 다 받았다.
그랬다. 그만큼 왕선의 활약은 눈부셨다.
연합군이 조직된 이후에도 승전이란 승전은 모두 왕선이 일궈냈다.
명실상부 최고 공신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심지어 왕선은 왕족이다. 몰락한 왕족이지만 단번에 왕적을 회복하여 군호를 하사받을 정도의 공을 세웠지 않은가? 만일 이대로 개경을 함락하면 왕선의 위치가 어디까지 올라갈지는 가늠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그럴까?
요즘 왕선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마냥 곱지만은 않다.
단지 시기심이나 경계심만이 담긴 건 아니었다.
그랬다. 전투는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선봉으로 나서서 적과 싸울 기회는 열려 있다. 그런데 종반으로 치닫는 현 상황에서 개경 진군의 선봉은 당연히 왕선이 될 터. 이를 막아내고자 하는 심리가 강하게 담겨 있는 거다.
그러나 지금까지 수수방관하던 처지였는지라 인제 와서 슬쩍 숟가락을 올리는 건 영 염치가 없다. 이에 그들은 나름의 이유를 만들어 냈다. 명분은 아주 간단한 거였다.
선봉이든 뭐든 지금 연합군의 기세가 이렇게 하늘을 찌를 수 있는 건 장수들이 총집결했기 때문이라는 거다.
공을 세울 기회를 탐하지 않고 우직하게 군영을 지킨 무장이 있었기에 지금의 결과가 도출되었다는 거다.
왕선은 볼을 긁적이면서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아직 공을 세울 기회는 충분합니다.”
이는 왕선이 선봉을 서지 않겠다는 말이다.
비아냥대던 조민수가 곧장 태세를 바꿨다.
“주상께서 연합군의 개경 입성만을 기다리고 계실 거야. 서둘러야 하네.”
귀신도 놀랄 수준이로다.
왕선은 고소를 삼켰다.
“예. 주상께서 간절하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니 서둘러야지요.”
“내 말이 바로 그 말일세. 지금 한가하게 논의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최영 장군. 즉시 진격 명령을 내리십시오.”
“···그래. 조 장군이 선봉에 서겠나?”
최영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조민수가 득달같이 물어댔다.
“소장이 대승을 거두겠습니다.”
“방심하지 말게. 여전히 임견미는 만만한 상대가 아닐세.”
“하하하. 장군. 소장이 이제 알았습니다. 임견미의 명성은 과장된 겁니다.”
“조 장군.”
“보십시오. 돌발 상황에 제대로 대처도 못 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단지 늘어서고 있는 대군의 기세에도 오금이 지려서 도망만 치고 있습니다. 소장이 그런 졸장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까?”
임견미를 평가절하한다. 그러니까 왕선의 공을 깔아뭉개는 거다.
최영의 미간이 찌푸려졌으나 왕선이 슬쩍 눈으로 만류했다.
지금 이런 문제로 드잡이질하는 건 소모적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장수들은 아쉬움이 가득한 눈으로 입맛만 다셨다.
그들은 최영이 조민수를 호통치고 선봉을 교체하길 바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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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수는 의기양양하게 선봉에 섰다.
거만한 모습을 잔뜩 보였으나 그 역시 무수한 전장을 거치면서 승전을 거둔 장수다. 쉽게 상대를 경시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상황을 분석했는데 임견미는 제대로 싸우기조차 어려운 상태다. 조민수의 입가에는 미소가 잔뜩 걸렸다.
“이번 선봉 쉽게 가져갈 수 있겠어.”
이대로 임견미를 밀어내고 곧장 개경으로 진군한다.
과정에서 몇 번의 전투가 더 발생하겠지만, 개경의 성곽에 가장 먼저 도달했다는 건 그간의 방관을 모조리 상쇄할 엄청난 공을 가지게 된다.
그건 이인임 이후 개경의 권력 구도를 결정하는 데 아주 중요한 잣대로 작용할 것이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조민수는 능히 해낼 자신이 있었다.
“장군. 임견미의 군세가 집결하고 있습니다.”
“변동 사항이 있나?”
“파악된 바로는 없습니다.”
“그러면 됐다. 더 끌 필요가 없다. 곧장 총진군한다.”
“알겠습니다!”
조민수의 사병은 총력을 다해서 공격했다.
연이은 패배로 사기가 저하된 임견미의 군사는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고 퇴각을 거듭했다.
“하하하! 더 추격하라! 이대로 도성까지 진군한다!”
“예! 장군!”
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임견미는 반항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퇴각만 거듭했다. 조민수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돌격 명령을 내렸다. 거칠 것이 없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장군! 조만간 임견미의 목을 벨 수 있습니다!”
부관의 말에 웃으며 전방을 주시하던 조민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 멀찍이서 자욱한 연기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 아닌가?
급기야 도주하던 임견미의 군사도 전열을 재정비하고 있다.
조민수의 볼이 씰룩였다.
“원군?”
갑자기 원군이라니.
“장, 장군.”
당황한 부관들.
그러나 조민수 역시 전장이라면 이골이 난 무장이다.
칼을 휘두르면서 거칠게 외쳤다.
“겁먹지 마라. 어차피 승기는 우리에게 있다.”
부관들이 동요하면 군의 기세는 땅에 떨어진다.
조민수의 판단은 적절했다.
단호한 외침에 부관들은 어느새 정신을 차린 듯 병사들을 통제했다.
조민수는 흡족하게 웃었다.
“이대로 공세의 고삐를 더 당겨!”
그런데 원군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다.
“더 강하게 밀어붙여!”
“알겠습니...!!!”
답하던 부관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장, 장군! 저, 저길 보십시오!”
조민수가 미간을 찌푸리며 부관이 가리킨 곳을 쳐다봤다.
“!!!”
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수시중 이인임]
이인임이다. 이인임이 직접 온 거다.
생각하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조민수의 안색은 급격하게 굳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뒤덮였다.
연합군의 주적이 눈앞에 있음에도 감히 달려가 목을 벨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당황한 거다.
그랬다. 이인임이 직접 나섰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아주 간단하다. 개경의 주력군이 모두 달려 나왔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조민수의 전력으로는 절대 감당할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와아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
엄청난 함성이 사방에서 들렸다.
“!!!”
원군의 수가 수천에 이르렀다.
“장, 장군! 퇴각해야 합니다!”
퇴각?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퇴각할 곳이 없다. 이인임의 군세가 짜임새 있게 사방을 포위한 상태가 아닌가?
그러니까 완벽하게 당한 거다. 임견미는 유인작전을 수행한 것이다.
매복을 위한 유인작전.
...아니다. 이건 매복이 아니다. 실로 대범하게 진용을 구축하여 사방에 배치해둔 거다. 조민수는 제 발로 엄청난 크기의 그물에 발을 내민 꼴이었다.
이인임의 군략이 실로 대단했다. 그리고 임견미의 유인 퇴각이 작은 의심도 들지 않고 절박하게 보일 정도로 뛰어난 것이다.
조민수의 눈이 거세게 떨렸다. 그 순간 적군이 돌격을 시작했다.
이를 악물었다. 머릿속은 엄청난 속도로 움직였다.
...지금 물러날 곳은 없다. 버텨야 한다. 최영이 이끄는 본진에서 원군이 올 때까지 무조건 버티는 것만이 살길이다.
“목숨을 걸고 싸워라! 조금만 버티면 원군이 당도할 것이다!”
조민수는 핏발선 눈으로 칼을 빼 들었다.
부관들은 굳은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곧장 군사들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군사들도 창칼을 움켜쥐면서 대열을 갖췄다.
그랬다. 조민수의 사병 역시 정예 강군이다.
상상하지 못한 돌발 상황이었으나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조민수는 온 힘을 다해서 외쳤다.
“돌격!”
사방에서 압박해오는 이인임의 군세를 향해서 조민수의 병사들이 돌격을 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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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임은 여유롭게 웃었다.
“이옥.”
“예. 수시중 어른.”
“혹시 활 실력이 전보다 나아졌나?”
“음. 원하시는 사냥감을 단번에 제압할 수준은 됩니다.”
“좋군.”
“혹시 어떤 사냥감을 원하십니까?”
“조민수가 고생이 많아. 아주 발악하는데 좀 쉬게 해주는 게 어떤가?”
“어렵지 않습니다.”
이옥은 활을 들었다.
미친 듯이 칼을 휘둘러대는 조민수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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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수는 악을 쓰면서 외쳤다.
“조금만 더 힘을 내라!”
그 순간에도 그의 칼은 멈추지 않았다.
그때
-부아아아아아앙!
조민수는 급히 피하며 상대를 확인했다.
“!!!”
임견미다.
조민수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불리한 혼전에서 최악의 상대를 만난 거다.
“조민수. 이제 제대로 해볼까?”
“감히!”
“흥!”
두 맹장의 칼이 어지럽게 어울렸다.
조민수의 칼이 임견미의 목을 향했고, 임견미의 칼이 조민수의 목을 노렸다.
-차아아아아앙!
-차아아아아앙!
그야말로 용호상박.
그러나 조민수는 급했고, 임견미는 여유롭다.
임견미가 비웃으면서 칼을 크게 휘두르자 조민수가 이를 악물면서 피했다. 그때 조민수의 눈에 보이는 게 있다.
...자신을 향해서 활을 겨누고 있는 이옥이었다.
“!!!”
그 순간
-쏴아아아아아아앙!
엄청난 힘이 실린 화살이 날아왔다.
그리고
-부아아아아아아앙!
임견미의 칼도 휘둘러졌다.
“이, 이런!”
조민수는 사색이 됐다.
동시에 이뤄지는 공격을 막아낼 재간이 없다. 순식간에 손이 어지러워졌다.
...죽음이다.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그때
-쏴아아아아아아아앙!
-쏴아아아아아아아앙!
-차아아아앙!
-차아아아앙!
묵직한 병장기 충돌음이 일었다.
조민수는 황급히 눈을 떠서 상황을 확인했다.
임견미의 칼이 멀찍이 물러난 상태. 심지어 칼을 잡은 오른손을 떨면서 왼손으로 감싸고 있다.
...대체 왜?
이옥의 화살은?
조민수의 시선이 움직였다.
“!!!”
화살촉이 박살 난 상태로 바닥에 초라하게 떨어졌다.
그 순간 치열한 전장의 움직임을 멈추게 하는 거대한 울림이 일었다.
-부아아아아아아아앙-!
-부아아아아아아아앙-!
-부아아아아아아아앙-!
소름이 돋을 정도의 장엄한 울림.
바로 대라 소리였다.
< 37화 대라소리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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