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가락, 옴마니 반메홈 >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그런데 기세만 하늘을 찔렀다.
마천목이 크게 활약했다. 총진군하여 임진강을 넘으면 되는데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본격적으로 득실을 계산하기 시작한 거다.
맹주는 최영이고, 발의자는 왕선이다. 큰 공을 세운 마천목도 왕선의 의제.
그리고 왕선과 최영은 이미 뜻이 통하는 사이가 분명하다.
얼마 전의 거사부터 오늘까지 두 사람은 합이 참 잘 맞다.
만일 이대로 개경을 점령한다면 고려의 권력이 거머쥘 사람은 뻔하게 된다.
무장들로는 썩 달가운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섣불리 임진강을 넘는 게 머뭇거려지는 거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실소를 머금으면서 사람들을 쳐다봤다. 언제부터 왕선의 군막에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갔다.
혹시라도 모를 내일을 대비해서 미리 선을 대려는 사람들이었다.
부드럽게 웃으면서 사람들을 맞이하던 왕선은 임진강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고려 제일의 명장이 몰려 있는 연합군의 기세가 멈춘 이유를 오늘 알게 되었습니다.”
“오. 왕 목사의 식견이 궁금하구려.”
“악적과 싸워야 할 장수들이 모두 이곳에 몰려 있습니다. 논의할 시간도 부족할 건데 매일 이곳에서 한담이나 나누고 있으니 뭐가 제대로 되겠습니까. 덕분에 임진강은 천험의 요새가 되어버렸습니다.”
말과 함께 분위기는 화기 애매해졌다.
대놓고 질책하는 왕선의 말.
불편한 표정을 하던 사람들은 결국 하나둘씩 물러났다.
멀뚱히 쳐다보던 마천목이 물었다.
“형님. 탈이 없겠습니까?”
“저들이 여기 몰려오면서 탈이 난 거야.”
“음.”
“왜 그러나. 혹시 아쉽나?”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이토록 큰 명분을 들고 일어난 연합군인데, 막상 와서 보니까 생각과는 너무 다릅니다. 전주에서 함께 싸운 의병의 의기보다 부족한 거 같습니다.”
최근 마천목은 큰 실망을 하고 있었다.
임견미를 물리치면 당장이라도 북진할 줄 알았던 연합군이 내부에서 정치질만 한 결과였다. 어디 가서 말하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다가 이제야 입 밖으로 꺼낸 거다.
왕선은 그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도 이건 성장통이다. 난세는 의기만으로 살 수 없다. 추악한 정치는 반드시 따른다. 마천목이 이조차 감당하지 못한다면 낙향하는 게 옳다. 그래도 그냥 둘 수는 없으니 다독이는 말을 꺼내려고 했는데 한발 늦었다.
“자네 말이 옳아.”
굵직한 목소리.
최영이었다.
“장, 장군. 소인이 실언했습니다.”
“실언은 무슨 구구절절 맞는 말인데. 왕 목사. 좋은 의제를 뒀어?”
“일전에 장군께 크게 혼나고 많이 성장했지요.”
“하하. 이럴 줄 알았으면 더 혼을 내야 했는데.”
“그랬으면 고려 최고의 명장이 되어 있을 겁니다. 어쩌시겠습니까? 오늘이라도 가르침을 내리시겠습니까?”
두 사람의 농을 듣는 마천목은 안절부절.
최영은 사람 좋은 미소를 하면서 말했다.
“출정해야지.”
“방책이 있으시군요.”
“방책이랄 건 없네. 얼마 전 본 자네 군사들의 기세가 남달라서.”
“선봉을 맡아달라는 거군요.”
“가능하겠나?”
“가야죠. 이인임과 하륜은 연합군의 내분을 염두에 두고 움직일 겁니다. 서두르지 않으면 되레 당합니다.”
“내 생각도 같네.”
“자고로 선봉이 열심히 싸워도 뒷심이 부족하면 허사입니다.”
“본진은 내가 책임지겠네.”
“좋습니다.”
최영의 표정은 밝아졌다.
“역시. 자네야말로 이 나라의 진정한 동량일세.”
“저 왕족입니다?”
“이인임의 목을 치고 자네의 왕적부터 회복해야겠네.”
“감사합니다.”
최영은 곧장 회의를 소집했다.
“이제 임진강을 넘어야 하네.”
그러나 누구도 답하지 않았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는데도 말이다.
왕선은 슬며시 사람들을 살펴봤다.
-선봉을 자임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대장전을 이겼으나 임견미의 군세는 여전하다.
-그가 이끄는 군사와 정면으로 충돌하면 피해가 크다.
-대장전 할 때 그를 죽였어야 해. 쓸데없이 허세만 부리다나 놓쳤어.
-한심하군.
고소를 삼켰다. 역시 본질은 아름답지 않았다.
선봉으로 나설 시 입게 될 피해를 최대한 피하고 싶은 거였다.
사실 그랬다. 이건 일반적인 전투가 아니다. 임진강을 넘어서 개경까지 당도하면 된다. 그리고 안타깝지만, 대다수 사람에게 이는 화급을 다투는 일이 아니었다. 언제라도 이인임만 제압하면 되니까. 그래서 내가 아닌 다른 이가 나설 때까지 먼 산을 쳐다보면서 버티고 있는 거다.
결국, 개경 점령 이후 발생한 주도권 싸움만 염두에 두고 있는 거다.
하긴 국운이 오늘, 내일 할 정도로 망조가 든 나라다. 왕조가 괜히 망하는 게 아니다. 왕실과 조정의 무능이 근본적인 원인이겠지만, 아래서부터 진실한 충의지사의 씨가 마르는 것도 피할 수 없는 현상이 아니겠는가. 이 사람들에게 이미 고려는 과거처럼 맹목적인 충성을 바칠 대상이 아니니까.
참으로 한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어차피 이들은 배경만 잘 깔아주면 된다. 큰 기대도 없다. 압도적인 세력을 보이는 배경만 잘해주면 충분한 거다.
자고로 1천 명이 있는 본진과 1만 명의 있는 본진을 마주한 적의 심리적 압박감은 분명한 차이가 있을 거니까.
“제가 선봉에 서겠습니다.”
모든 이목이 쏠렸다.
“왕 목사. 그래주겠나?”
당신이 시켜놓고는.
왕선은 힘을 준 어조로 말했다.
“물론입니다.”
“필요한 지원은 아끼지 않겠네.”
“어차피 선봉입니다. 적의 예봉을 꺾을 테니 그 즉시 본진이 움직인다면 될 겁니다.”
“자네의 의기가 이토록 높은데 무엇이 어렵겠나?”.”
최영은 유독 의기를 강조했다.
물론,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
이미 의기라는 건 찾아볼 수 없는 곳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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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천목에게 패한 임견미는 섣불리 나서지 않고 임진강을 굳건히 지켰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한 건 연합군이라는 판단이었다.
지금은 명분에 휩싸여서 뭉쳐 있지만, 실리와 충돌하는 건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니까.
예상대로 연합군은 공격하지 않고 전황을 강 건너 불구경하고 있다. 아마도 내부에서 여러 의견이 충돌하고 있을 거다. 남은 건 그들이 자멸하는 걸 기다리는 거다.
마천목이라는 애송이에게 망신을 당한 건 나중에 갚으면 될 일이다.
그런데
“허. 연합군의 선봉이 움직였다고?”
“그렇습니다.”
“전주 목사 왕선이라고 합니다.”
임견미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었다.
부관은 시선을 요리조리 돌렸다. 부디 불벼락이 피해가기만을 바랐다.
그의 바람이 전해졌는지 다행히도 임견미는 이성적인 말을 꺼냈다.
“규모는?”
“1천여 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최영은?”
“적의 본진은 움직임이 없습니다.”
“그러면 성동격서는 아니군. 아군의 방비는?”
“명하신대로 좌군이 가장 선두에서 자리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보아하니 적당한 수작질을 하려고 보낸 게 분명해. 규모가 딱 그래. 섣불리 적의 계책에 넘어가서 움직이지만 않으면 된다. 그러면 제풀에 지친 적의 선봉도 물러갈 거야.”
“알겠습니다.”
얼마 뒤
“큰, 큰일 났습니다!”
다급함이 가득한 목소리.
불안함이 치솟은 임견미는 군막 밖으로 나갔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진 거다.
*****
임견미의 인척 성수항은 좌군을 이끌고 연합군을 방비하는 임무를 맡았지만, 전선이 구축된 이후 제대로 된 전투가 없었다. 무료하다면 무료하고, 편하다면 편한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장군. 적의 선봉입니다!”
대경한 성수항은 황급히 칼을 들고 군막을 나섰다.
“선봉장은?”
“왕선이라고 합니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의 의제가 임견미를 이겼다고는 하지만 일신의 무위와 전투는 다르다. 고작 약관에 불과한 자들이니 제대로 된 경험도 없을 거다.
만일, 이성계나 정지가 왔으면 정말 어려운 싸움이 됐을 거다.
...아니지. 필패였을 것이다.
“보아하니 일천에 불과한 규모다. 이 자리를 고수하라. 그러면 적은 물러날 거야.”
적당한 명령이었다.
그런데 멀찍이서 희한한 광경이 펼쳐졌다.
성수항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눈에 힘을 줬다.
“···자네 지금 나와 같은 걸 보고 있나?”
“···예. 장군. 적장이 혼자 걸어오고 있습니다.”
“미쳤군.”
“어찌할까요?”
“보아하니 사신 흉내라도 내는 거 같은데 죽일 수는 없지.”
“그냥 둘까요?”
“뭐라고 하는지 들어나 보지.”
왕선은 편안한 미소를 지으면서 걸음을 옮겼다.
“사신의 예로 받아주게나.”
“미친놈.”
“그냥 돌아갈까?”
“들어와라.”
성수항은 군막으로 들어갔다.
왕선은 빙긋 웃으면서 따랐다.
“항복이라도 하러 온 것이냐?”
“그렇다기보다는 협상이라고 하지.”
“협상?”
“그렇다. 만일 지금이라도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그게 협상인가? 헛소리지.”
“그러면 결렬?”
“미친놈이군.”
“돌아가지.”
“누가 보내 준다고 했나?”
위협하는 성수항의 눈을 지그시 쳐다보면서 말했다.
“어차피 싸우기 싫지 않나?”
“뭐?”
“여기서 나를 죽이면 최영 장군이 선봉에 설 건데?”
“뭐, 뭐라?”
“선수끼리 이러지 말자고. 여기서 버티는 게 네 목적이잖아.”
잠시 왕선을 쳐다보던 성수항은 묘하게 웃었다.
“이거 생각보다 말이 통하는걸? 그런데 이럴 거면 연합군은 왜 발의한 건가?”
“안 그랬으면?”
“하긴. 살아남기 힘들었겠군.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왕선은 편안하게 웃었다.
“싸우긴 싸워야 하겠지만, 최대한 늦춰보자고.”
“나쁘지 않지.”
“그래도 적당하게 시늉은 해야겠지?”
“나도 그러는 게 좋지.”
“또 보자고.”
“얼마든지.”
성수항은 간사하게 웃었다.
왕선도 적당하게 화답하면서 물러갔다.
그 이후 전주군과 성수항군은 싸울 듯 말 듯 기 싸움을 펼쳤는데, 창칼이 난무하는 교전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전주의 병사들이 노래를 불렀다.
“개경에 천하의 쌍놈이 있다네. 옴마니 반메홈.”
“하늘이 미쳐서 내린 놈이라고 느껴질 만큼 쌍놈이라지. 옴마니 반메홈.”
전주 병사들의 구성진 가락과 후렴으로 따라붙은 주문은 의외로 잘 어울렸다. 지속적인 신경전만 오가던 찰나에 가락이나 불러대는 전주군을 성수항의 병사들은 희한하게 쳐다봤다.
“그런데 더 병신이 있더라고. 옴마니 반메홈.”
“쌍놈도 부족해서 병신이 있다고? 옴마니 반메홈.”
옴마니 반메홈.
그것은 묘하게 중독성이 있었다. 언제부터 성수항의 병사들도 그 말만은 알 듯 모를 듯 따라 할 정도였다. 실로 대단한 마력이었다.
“얼마나 병신인고 하니!”
주문을 외쳤는데
“옴마니 반메홈.”
성수항 진영에서도 울렸다.
나지막하게 따라 하던 병사가 수백이 넘어가면서 생긴 현상이었다.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흥이 느껴질 정도였다.
전주의 병사들은 더 신명 나게 불러댔다.
“제 식솔이 먹을 것도 병신에게 다 갖다 바친다더라고!”
“옴마니 반메홈.”
분위가 좋다. 계속 이어졌다.
“그걸 왜 갖다 바쳤을까?”
성수항의 병사들은 궁금했다.
“병신의 졸개가 쌀을 뺏어갈 때 오열하면서 막았는데 두들겨 맞았지! 옴마니 반메홈!”
“그래서 절름발이 되었다네! 옴마니 반메홈.”
“안타깝구나! 옴마니 반메홈!”
“그 절름발이 이름이 개경에 서는 최덕진이라네! 병신중의 상 병신이지! 옴마니 반메홈!”
“병신이 또 있을까? 옴마니 반메홈!”
“쌍놈이 쌀을 뺏을 때 빌다가 왼손을 다쳤어! 개경에 사는 박수일이라고! 옴마니 반메홈!”
“아들도 다리를 다치고 노모는 거동도 못했다네! 이 병신은 개경의 최일수! 옴마니 반메홈!”
가락이 이어질수록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그러니까 전주군의 분위기는 갈수록 흥이 넘쳤는데, 성수항군이 그랬다.
“다 뺏겼는데 왜 갖다 바쳤다고 할까? 옴마니 반메홈!”
“병신들이 쌍놈을 위해서 창칼을 들고 싸우고 있으니까! 옴마니 반메홈!”
“병신 중의 상 병신이 다 모였구나!”
“어디에?”
“바로 여기에!”
“그러면 쌍놈은?”
“그놈은 성가 놈의 아들 모 수항이라고 한다네! 옴마니 반메홈!”
“아! 임견미 인척 놈?!”
그랬다. 바로 그랬다.
지금 전주의 병사들이 가락으로 만들어서 부르는 사연은 자신들의 일이었다.
쌀을 뺏기고 다리가 분질러지고 손을 다치고.
그렇게 악독했던 놈을 위해서 지금 싸우고 있다.
...병사들의 표정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그 순간
“너희의 창칼이 향해질 곳은 내 심장이 아니지 않은가!”
태산 같은 무게가 담긴 외침.
왕선이었다.
그리고 오른손 검지를 움직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황당함을 숨기지 못한 성수항을 가리켰다.
“너희 부모의 원수!”
병사들의 심장을 두들겼다.
“너희 자식들의 원수!”
병사들의 심장에 불을 질렀다.
“바로 저놈이다!”
병사들의 시선이 움직였다.
“분연히 들떠 일어서라!"
쐐기를 박았다.
“그리하여 너희가 잃은 건 사병 군적이고, 얻을 건 토지문서다! 그 세상을 불국정토라고 부른다. 이를 너희에게 주고자 한다. 받아주겠나?”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않았으나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승낙이다.
하여, 왕선은 온힘을 다해서 외쳤다.
“사지를 찢어라!”
마침내 병사들의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
성수항은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몸을 뒤로 빼기 시작했다.
그 순간
-차아아아앙!
-퍼어어어엉!
성수항의 사지에 창칼이 꽂혔다.
왕선이 손을 내저으면서 나섰다.
“약조하겠다.”
“무엇을 약조하십니까?”
“전주를 불국정토로 만들겠노라고.”
“전주는 멉니다.”
“불국정토로 가고자 한다면 그 정도의 수고는 감내하라.”
“소인들이 어리석었습니다.”
왕선은 빙그레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나는 너희의 미륵이 되고자 한다. 허락해주겠나?”
병사들이 통곡하듯 답했다.
“허락하겠습니다.”
그리고 병사들이 일제히 외쳤다.
“우리의 미륵이 되어주십시오!”
왕선이 화답하듯 외쳤다.
“전군!”
그런데
“옴마니 반메홈!”
왕선은 움찔하면서 외쳤다.
“진...!!!”
“옴마니 반메홈.”
“옴마니 반메홈.”
분위기는 이미 주문이 지배했다.
왕선은 싱긋 웃었다.
이렇게 저들의 속이 풀릴 수 있다면 얼마든지 외치도록 해줄 생각이다.
*****
임견미는 온몸을 떨면서 외쳤다.
“적, 적을 막아라!”
그런데 저 멀리서 거대한 함성이 들렸다.
...연합군의 본진이 움직인 거다.
임견미의 안색은 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그의 귀로 괴이한 외침이 들렸다.
“옴마니 반메홈.”
“옴마니 반메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 36화 가락, 옴마니 반메홈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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