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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34화 (34/187)

< 34화 격문 >

뒤쫓는 사람은 없다. 마천목이 모두 막아낸 게 분명하다.

개경을 벗어난 왕선은 겨우 숨을 돌렸다.

“허.”

대체 어디서 틀려먹은 건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집사가 하륜이었다는 걸 몰랐다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말 그대로 완벽하게 짜둔 거사였지 않은가.

...그리고 약재를 받은 내관은 몇 번이나 속을 확인했다. 절대 입을 열 인사가 아니었다. 대체 어디서 틀려먹은 건가?

“제기랄.”

머리를 세차게 저었다.

이건 나중에 생각할 문제다.

지금 중요한 건 마천목이 무사히 나타나는 거다.

-----

이인임이 태후전을 갔을 무렵 하륜은 뒤처리를 진행했다.

“생각할수록 아쉽군.”

진심이었다.

하륜은 왕선이 이인임의 뒤를 이어가길 바랐으니까.

자신은 어디까지는 옆을 지키는 이인자로 만족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인임 조차 속인 이번 계책을 보고 아쉬움은 더 짙어졌다.

이 정도의 심계를 가진 사람은 정말로 보기 드물 거니까.

지금 생각하면 정말 절묘했다.

그리고 아찔했다. 어쩌면 그간의 공덕이 송두리째 무너질 뻔한 거다.

*****

“수시중 어른 계신가?”

하륜은 평소처럼 웃으면서 말했다.

“어쩐 일로 오셨다고 전할까요?”

“아. 최영 장군을 보고 와서.”

왕선과 적당하게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약재? 왕선이 약재를 주더라고?”

“예, 예.”

“비밀로 해달라고 하면서?”

“예, 예.”

하륜은 눈을 찡그렸다.

“정확하게 확인하겠네. 태후 마마께서 일단 약재를 받으셨다는 게 아닌가?”

“그렇습니다.”

“다음에 왕선이 찾아왔을 때 집어 던지셨고?”

“예.”

내관은 눈치를 살폈다.

“혹시 소인이 실수한 것이 있습니까?”

“음. 그걸 지금부터 파악해봐야지.”

내관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하륜이라는 인사는 매사 대충 넘어가는 경우가 없다.

일의 선후를 정확하게 파악한 다음에 공과를 말했다.

지금처럼 딱히 잘못한 게 없는 상황인데도 그런다.

“태후전의 물품을 잘 기록해두겠지?”

“그렇지 않아도 장부를 챙겨왔습니다.”

“이리 주게.”

한참 들여다본 하륜의 고개가 갸웃했다.

“이상한데?”

“예?”

“보라고. 종이는 사용했는데 지필묵은 없어.”

“음.”

하륜의 눈이 가늘어졌다.

“평소와 달랐던 점을 말하게.”

“그, 그러고 보니 마마께서 손을 다치셨습니다.”

“손?”

“예. 의관이 다녀가긴 했는데.”

“태후께서 손을 왜 다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오른손? 왼손? 어디를 다쳤나?”

“오, 오른손입니다.”

“하나 더 묻지. 태후께 단검이 있나?”

“있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하륜은 그 즉시 장부를 덮었다.

내관은 영문을 몰랐으나 분위기상 일단 자라목을 했다.

“자네 죄가 없다고 생각하지?”

“예, 예?”

“내가 말해주지. 자네가 왜 책임이 있는지 알고 있나?”

“······.”

“자네 원래 약재만 받고 비밀로 하려고 했지?”

“아, 아닙니다.”

“아니긴. 이봐. 태후전에 심어둔 사람이 자네뿐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내가 자네를 따로 불러서 재차 물어보니 사실대로 실토했어. 안 그랬다면 일이 고약하게 꼬였을 거야. 아니지. 벌써 꼬이기 시작했군. 잘 알아두게. 만일 여기서 더 틀어지면 자네는 죽어. 반드시.”

“선, 선생. 용서해주십시오.”

“내가 용서해주는 게 아니라 결과가 용서해줄 것이네.”

매섭게 쏘아댄 하륜은 황급히 발을 옮겼다.

아직 정확한 건 아니다. 제대로 확인해야 한다.

그간 왕선의 행적을 보면 태후전을 들리면 반드시 이인임의 사가를 방문했다. 오늘은 태후전, 최영의 사가를 거친 다음에 마지막에 왔다.

하륜은 심장이 요동쳤다.

이제 마지막으로 확인할 게 있다.

...개경을 벗어나는 최영의 사람이 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하륜은 모든 정보원을 움직였다.

...그리고 결과는 예상대로다. 은밀하게 성을 벗어나는 사람이 있다. 만일, 하륜이 촉각을 곤두세워서 알아보지 않았다면 절대 몰랐을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너무 절묘하다.

하륜은 한참 동안 고민했다.

결론을 내렸다.

...왕선을 겁박해본다. 그러면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 거다. 만일 진실이라면 그때 최영을 잡는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이인임에게는 진실이라고 말한다. 만일, 기우였다면 책임을 지면 될 일이다.

...그리고 왕선의 반응을 보고 확신했다.

진짜다.

그러면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이인임과 왕선이 대화를 나눌 동안 하륜은 부관에게 눈짓했다.

[최영을 잡아.]

부관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

“호정 선생.”

하륜의 상념이 끝났다.

“어찌 됐나?”

“송구합니다. 놓쳤습니다.”

“···마천목도?”

“어찌나 기세가 강하던지 붙잡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크게 다쳤으니 살아남기 쉽지 않을 겁니다.”

“음. 그래? 그러면 이리하지.”

“예?”

“시중 어른께서 태후전을 가셨네.”

“예, 예.”

“돌아오시면 자네가 직접 보고해.”

자고로 불편한 보고는 피해야 하는 법이다.

“걱정하지 말게. 왕선을 놓쳤으나 그 인사가 어디로 가겠나? 가봤자 전주야. 만일 거길 안 갔으면 더 할 수 있는 게 없지. 이렇게 잘 설명해 드리게. 그러면 적당하게 문책당하고 말 거야.”

“호, 호정 선생.”

“사실 내가 최영 장군을 잡으려고 병력을 빼지 않았다면 왕선과 마천목 모두 잡긴 잡았을 거야. 이 말도 빼지 말고 꼭 하게. 괜찮으니까. 일단 자네부터 살아야지.”

하륜은 부관의 어깨를 토닥였다.

“고생하게.”

부관의 낯빛은 시커멓게 보일 정도로 어두워졌다.

얼마 뒤 흉흉한 기세를 보이는 이인임이 돌아왔다.

하륜은 서둘러서 다가갔다.

“최영은?”

“송구합니다. 도주했습니다.”

“아쉽군. 잡아야 했는데.”

왕선도 놓쳤으나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중요한 건 막강한 무력을 가진 최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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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척.

왕선은 황급히 몸을 숨겼다.

누굴까? 이인임의 병사들일까?

아니었다.

“천, 천목아!”

피칠갑을 한 마천목이었다.

“형님. 무사하십니까?”

“아무렴. 무사하지. 네 덕에 나는 무사하지. 어디 다친 데는 없느냐?”

“멀쩡합니다.”

그렇지 않았다.

마천목의 몸은 크고 작은 상처가 잔뜩 있다.

“어, 어디 가서 몸이라도 추스르자.”

“아닙니다. 형님. 속히 전주로 가야 합니다.”

“천목아. 그러다가 네가 잘못되면 나는 어찌 살라고.”

마천목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이 아니면 벗어나기 힘들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이인임이 최영 장군을 덮쳤습니다. 만일, 그 일이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잡혔을 겁니다. 이걸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상황이 말끔하게 파악됐다.

“그래. 알겠다.”

“소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왕선은 만류하려고 했으나 그냥 뒀다.

그의 속내가 읽혔기 때문이다.

-내 주인은 내가 지킨다.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리하게. 나의 수문장.”

마천목은 창을 고쳐잡고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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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아침에 세상이 변했다.

전주 목사 왕선과 최영이 거사를 도모하다가 역습을 당했다. 두 사람은 개경을 벗어나는데, 성공했으나 앞날이 요원했다.

최영이 가졌던 권한은 온전히 이인임의 손에 넘어갔다. 양분된 권력이 한군데 집중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피부에 감길 정도로 변한 게 있었다.

과거 이인임이 노련한 정치력으로 정국을 주도했다면, 이제는 아니었다. 철저하게 압도적인 힘으로 사방을 옥죄운 것이다.

그랬다. 잔혹한 공안정국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얼마 뒤 한 장의 격문이 고려 전역을 흔들었다.

[이 나라 고려의 재흥을 이루신 선왕께서 흉악한 역도에 의해서 승하하셨다. 모든 사람이 비통에 젖었다. 또, 일찍이 없던 일로 인해서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데 지금에 이르러 되돌아보니 오직 권신 이인임만이 모든 걸 내다본 듯 움직였다. 이에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역적 홍륜을 사주한 사람이 이인임이며, 선왕의 유지도 위조한 것이라는 것을. 이를 바로 잡으려는 왕실의 종친을 무참히 죽이고, 왕실의 최고 어른을 유폐했다. 이는 신하로서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이 나라 고려는 왕 씨의 나라이지 이 씨의 나라가 아니다. 보라. 한 명의 권신에 의해서 천하에서 가장 오래되고 고매한 이 나라 고려가 조롱당하고 있다. 이 나라 고려가 500년의 거목이 될 수 있었던 건 무수한 충의지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지금이야말로 이 나라 고려에 충신이 있음을 알려야 할 때다. 비로소 들떠 일어설 때다. 분연히 싸워야 할 때다. 그리하여 권신 이인임을 몰아내고 이 나라 고려를 바로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모두 즉시 대군을 이끌고 한데 모이기를 청한다. 강대한 힘을 만들어서 개경으로 진군한다면 어찌 이인임이 감당할 수 있겠는가. 절체절명의 누란에 처한 고려의 운명이 그대들의 손에 달려 있다. 고려의 충의지사여. 단결하라. 그리하여 잃은 것은 오욕의 역사이며, 얻을 것은 천년 고려의 영광이다.]

아무리 이인임이 권신이지만 멀쩡하게 군왕이 존재한다.

한데, 사병을 일으켜서 개경을 점령하자는 창의적인 격문은 놀라움을 넘어서 황당함을 선사했다.

모든 사람의 눈이 격문의 주체를 확인했다.

[전주 목사 왕선]

현 정국에 아주 의미심장한 사람이었으나 너무나도 창의적인 발상에 동참하게 할 정도의 무게를 가지지는 못했다.

드높은 의기는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으나 호응은 낮았다.

이대로 왕선의 격문은 놀라움과 황당함을 선사한 작은 우스갯소리고 묻어질 때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화답하고 나섰다.

“권신의 손에서 개경을 되찾겠노라.”

다름 아닌 최영이었다.

이리되자 분위기는 순식간에 바뀌었다.

반 이인임 연합군의 시작은 압도적이었다. 남경에 집결한 인사들의 면면이 실로 화려했다.

최영, 박위, 정지, 나세, 배극렴, 변안열, 최무선, 이원계, 우인열, 조민수 등 쟁쟁한 무장들이 사병을 이끌고 집결 한 것이다.

당대 최고의 장수들을 총망라한 진용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당장이라도 개경을 장악하여 이인임을 도륙 낼 기세였다.

“여기서 다시 뵙습니다. 장군.”

“그날 난리가 났는데 무사히 잘 빠져 나갔나 보군.”

“죽을 뻔했지요.”

왕선과 최영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나저나 여기까지 생각했었나?”

거사 실패 후 전주로 달아난 왕선이다.

그런데 기다렸다는 듯이 격문을 날려서 ‘반 이인임 연합군’을 조직했다.

최영으로서는 의문이 갈 수밖에 없었다.

“솔직하게 말해주게.”

원래 이게 계획이었다. 그래서 전주에 목숨을 건 거다.

물론, 최영이 이를 알 리는 없다. 또, 알 필요도 없다.

왕선은 탄식하듯 말했다.

“이 길밖에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그런가?”

“어쨌거나 장군 덕에 시작이 좋습니다.”

“내 덕이 아니라 자네가 창의적인 생각을 해낸 거지. 누가 이런 방도를 떠올릴 수 있겠나?”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힘과 권위가 핵심이지요.”

“됐네. 끝이 좋아야지.”

최영의 어조에는 진한 결기가 느껴졌다.

그나저나 왕선은 궁금한 게 있었다.

“장군. 이성계 장군의 소식은 아직입니까?”

“···사람을 여러 차례 보냈는데 마땅한 답이 없더군.”

“희한하군요. 당연히 가장 먼저 달려올 줄 알았는데. 이인임에 대한 적개심이 크지 않습니까.”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는데. 음.”

반 이인임 연합군 격문을 돌리고 수도 없이 생각했다.

이성계를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제대로 된 답을 내리지 못한 채 연합군은 조직됐다.

그런데 그간의 고민이 무색하게 이성계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 34화 격문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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