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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33화 (33/187)

< 33화 개경, 바람이 분다(2) >

거세게 요동치는 눈.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손.

당대 최고의 명장 최영의 모습이다.

누가 감히 최영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만큼 최영에게 내려진 충격의 강도는 거셌다.

왕선은 턱을 비스듬히 치켜들면서 말했다.

“최영 장군의 고려는 대체 누구의 고려입니까?”

“······.”

“최영 장군께서 충성을 바친 고려는 왕씨 고려가 아니라 이씨 고려였습니다.”

당신의 그 머뭇거림이 이씨 고려의 종식 이후 정말 이씨에게 이 땅을 내주는 거고.

...나는 당신도 고려 멸망에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

당신은 그냥 혼자 멋있는 척한 사람이라고.

“왕가의 상징께서 혈서를 내리셨고, 고려의 주인께서 옥새를 찍으셨습니다. 선택하시지요. 왕씨 고려입니까? 이씨의 고려입니까?”

참담함이 가득한 최영의 안색.

“또 회피하는 겁니까?”

“이인임 이후 고려의 조정은?”

“군왕께서 알아서 하실 문제입니다. 신하는 신하의 길을 가는 게 합당하고요.”

최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옳다고 여긴 길이 군왕에게 누가 된 것이다.

이제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

“거사는?”

마침내 그의 입에서 제대로 된 말이 나왔다.

왕선은 지그시 쳐다보면서 한 글자씩 딱딱 끊었다.

“이틀 뒤로 하겠습니다.”

의사를 물어본 게 아니다.

통보였다.

“이틀이면 인근의 사병이 딱 맞춰서 당도할 수 있는 시간이군.”

“예.”

“처음부터 이를 고려한 건가?”

“글쎄요. 그런데 그게 중요합니까? 인제 와서?”

“그건 아니지.”

“그러면 완벽히 하십시오. 소직은 물러가겠습니다.”

“하나만 더 묻겠네. 북진을 운운한 건 진심이었나?”

“물론입니다. 그런데 그 전에 정예군도 만들고 군량도 확보해야지 않겠습니까? 그 시작점이 바로 이틀 뒤가 될 겁니다.”

“···알겠네.”

최영가 대화를 마친 왕선은 평소처럼 태연하게 대문을 열고 길거리로 나왔다.

여전히 이인임의 감시가 있다. 전처럼 살벌한 수준은 아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오늘 최영을 만난 건 이인임의 귀에 들어간다. 이틀 뒤가 거사지만, 절대 방심할 수 없다.

그러니 곧장 이인임을 만나러 가야 한다. 평소대로.

“자리를 비우셨다고 했나?”

“예.”

“이런 낭패가 있나.”

이인임의 잔심부름을 담당하는 집사는 담담하게 물었다.

“기다리시겠습니까?”

“혹시 어디 가셨는지는 모르고?”

“예.”

진짜일까?

왕선은 집사를 슬쩍 쳐다봤다.

-인생은 편안하게.

매번 느끼지만 이 사람의 인생관은 확실했다.

살벌한 정국에서 이인임의 사람으로 일하는데 별다른 긴장감도 안 느껴졌다.

-편안하게 살려면 줄을 잘 서야지.

하긴. 누가 뭐라고 해도 작금의 고려에서 이인임에게 줄을 대는 게 가장 확실하긴 하다. 어쨌거나 개경에 와서 느끼는 거지만 참 희한한 사람이 많다.

일전에 길 가다가 시비 건 미친놈도 그렇고.

“차 한잔 내주겠나?”

“알겠습니다.”

집사는 뜨거운 차를 금방 가져왔다.

“고맙네.”

“하면, 편히 기다리십시오.”

“아. 그러지 말고 말 상대나 좀 해주게.”

“소인이요?”

“적적해서 그렇다네. 너무 오래 귀찮게 하지 않을 거니까 시간을 좀 내주게. 이 차를 마실 동안 수시중께서 오시지 않으면 돌아가겠네.”

“음. 알겠습니다.”

-자고로 내일이 보장된 사람과는 척을 지는 게 아니지.

역시. 확고한 사람이다.

왕선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한데, 어쩌다가 수시중 어른을 모시게 됐나?”

“특별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살다 보니 작은 인연이 닿게 되었지요.”

“작은 인연?”

“뭐.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크지요.”

-내 인생 최고의 인연이었지.

자세한 내용을 말하고 싶지 않은 듯하다. 더 묻지 않기로 했다.

어물쩍 말을 돌렸다. 한참 동안 대화가 이어졌다.

“그나저나 수시중께서 많이 늦으시는군.”

“더 기다리시겠습니까?”

“아닐세. 너무 오래 자리를 지키는 것도 결례라면 결례니까.”

“탁월하십니다.”

“하하. 자네도 내가 불편했나 보군.”

-이런. 내가 말실수를 했구나.

집사는 방긋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요? 소인은 선생과 대화를 나누는 게 무척 즐겁습니다.”

-인생은 편안하게.

...아무리 속을 들여봐도 무서울 정도로 같은 생각만 하고 있다. 어찌 보면 신념의 강자가 같기도 하다.

“그러면 수시중께 내가 왔다 갔다고 전해주겠나?”

“알겠습니다. 한데, 무슨 용무로 방문했다고 전할까요?”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하지.

기가 막힐 정도로 처세에 연연하는 사람이다.

왕선은 이 사람을 더는 경시할 수 없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 집사의 편안한 삶을 응원하고자 가볍게 입을 열었다.

“아. 최영 장군을 만나고 왔다고 하면 아실 거네.”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지요.”

“그러면 가보겠네. 고생하게.”

“살펴 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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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감시하던 사람이 모두 물러났습니다.”

“확실하지?”

“예.”

왕선은 의관을 갈무리하고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형님. 어디로 모실까요?”

“포은 선생을 만나야겠어.”

“훌륭하십니다.”

“가다가 낌새가 이상하면 신호를 줘. 곧장 주막으로 행로를 바꿔야 하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서 가자.”

“예.”

최영의 거사가 성공하면 포은 정몽주가 여론을 움직여야 한다.

전광석화처럼 일이 진행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밤 정몽주를 만나서 사정을 말해야 했다. 정말 하루가 길다고 느껴졌다.

사가를 막 벗어났을 때였다.

“어디를 그렇게 급히 가십니까?”

익숙한 목소리.

고개를 돌려보니 아는 사람이다.

왕선은 의아한 어조로 물었다.

“아니.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인가?”

집사는 빙그레 웃었다.

“선생과 나눈 대화가 너무 즐거워서 찾아왔지요.”

“하하. 그런가? 그런데 이를 어찌한다. 오늘은 내가 좀 바쁜데.”

“괜찮습니다. 선생을 덜 바쁘게 해드릴 거니까요.”

“응? 그게 무슨 말인가?”

“자고로 인생은 편안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자면 줄을 잘 잡아야지요.”

“어?”

“한데, 선생께서 참으로 고단한 길을 가시길래 어찌 지켜만 볼 수 있겠습니까?”

이쯤 되자 왕선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왜 힘들게 사는지 이해할 수 없군.

...여전히 개소리다. 그냥 물어보는 게 현명하다.

“자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말 그대로입니다.”

“집사.”

“참으로 아쉽습니다. 당신과는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저편에서 번뜩이는 뭔가가 보였다.

...창과 칼이었다.

하륜의 뒤로 군사들이 빼곡하게 나타난 거다.

“애석하군. 자네와 이렇게 만나다니.”

군사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이인임이다.

왕선의 등에서 식은땀이 장대비처럼 내렸다.

...일이 틀어진 거다.

“이거 놀랐습니다. 불과 하루도 지나지 않은 일을 어찌 아셨을까요?”

“모를 뻔했지. 나는 너를 믿었으니까.”

맞다. 이인임의 말대로다.

수차례 그를 만나면서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확신했지만, 의심했고, 확신하면서도 의심했다.

더는 이인임이 걸림돌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고 일을 도모했다. 그런데 이리됐다.

“그런데 내 장자방이 자네를 믿지 않더군.”

“장자방?”

이인임의 장자방이라면?

“아. 정식으로 소개하지.”

이인임의 손이 집사를 가리켰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집사가 빙그레 웃으면서 나섰다.

“소생 하륜입니다.”

하, 하륜?

집사가 하륜이었다고?

“하륜이 아니었다면 골치 아픈 일이 생겼어.”

“수상한 냄새를 풀풀 풍기는데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상상도 못 했다.

집사가 하륜일 줄은. 그리고 대계를 파악해낼 줄은. 심지어 단 하루 만에.

“내관에게 약재를 주고 입막음을 했길래 유심히 살펴봤지요. 그리고 최영 장군이 사병을 집결시킨다는 소식을 알아냈고요. 참으로 애석합니다.”

“그러게 말일세. 가만히 있었으면 부귀영화를 누렸을 건데.”

이인임과 하륜은 좌중을 신경 쓰지 않고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나 왕선은 듣고만 있을 생각이 없다. 이대로 시간을 끄는 건 불리할 뿐이다. 얼마나 더 많은 군사가 몰려올 줄 가늠할 수가 없다. 그때 왕선의 속내를 비웃듯 이인임의 목소리가 울렸다.

“하나 묻지. 나를 배신한 이유는?”

“고려를 위해서라고 하지요.”

“개소리 집어치우고.”

“겸사겸사 나도 살고요.”

“이해할 수 없군. 내 옆에 있으면 넌 멀쩡했을 건데.”

“내가 살고, 고려가 살려면 당신의 정권을 하루라도 빨리 끝내야 하거든요.”

입을 움직이면서 쉬지 않고 눈알도 돌렸다.

군사들의 시선을 꾸준히 살핀 거다.

“천목아.”

마천목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

“우리가 왔던 방향으로는 군사가 아직 없다. 거기가 살길이다.”

“형님. 여기가 소제의 장판교가 되겠군요.”

장비가 조조의 대군을 막아낸 것처럼 자신도 반드시 그리하겠다는 말.

“천목아.”

마천목은 답하지 않고 창을 고쳐잡았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본 이인임이 조소를 날렸다.

“마지막 작별인사 같아서 그냥 지켜본 것이네. 더 기다려야 할까?”

왕선은 싱긋 웃었다.

“웃어?”

“음. 수시중 어른?”

왕선은 손바닥을 펼쳐서 내밀었다.

“혹시 뭐가 보이시나요?”

“유언 하나 거창하군. 자네 손바닥에 가려서 아무것도 안 보여.”

“예. 이게 당신 앞날입니다.”

그 말과 함께 마천목의 창이 휘둘러졌다.

“형님!”

“천목! 반드시 살아야 한다!”

“먼저 피하십시오!”

왕선은 곧장 몸을 피했다.

등 뒤로 마천목의 외침과 병장기 충돌음이 크게 울렸다.

하지만 돌아보지 않고 이를 악물고 달렸다.

괜히 남아 있는 건 마천목에게 짐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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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태후전의 문이 박살 났음에도 명덕태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태후마마?”

날이 시퍼렇게 선 칼을 든 이인임이 조소를 날렸다.

명덕태후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온몸을 공포가 잠식했다.

“수, 수시중.”

“이 사람이 참으로 섭섭하게 했었나 봅니다?”

“나, 나는 모르는 일이오.”

“이 사람이 여기까지 왔습니다.”

“정말로 모르는 일이오.”

“이 사람이 여기까지 왔다고 했습니다.”

“수, 수시중.”

“설마 아무런 증거도 없이 왔겠습니까?”

“증, 증거라니요? 나는 정말 모르는 일이오.”

이인임이 싸늘하게 노려보면서 왼손 검지를 제 머리로 향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게 증거라는 거지요.”

이인임은 칼을 휘둘러서 명덕태후의 턱을 겨눴다.

“수, 수시중.”

“마마? 최영이 맹약을 깼어요. 그 최영이 말입니다. 대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어지는 왕선에게 전했다. 어떤 증거도 없다. 그러나 이인임의 추론은 증거가 필요 없다.

“먹을 식량을 적당하게 배분해서 나눴지요. 그런데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권한을 탐낸다? 정말 기가 막힙니다.”

“오해가 있소. 수시중. 오해가 있소.”

“이 사람이 그동안 정치한다는 핑계로 참 물렁물렁하게 살았나 봅니다?”

명덕태후는 바들바들 떨었다.

“정, 정말 오해를 한 거요.”

“묻지요. 주상도 개입했습니까?”

“수시중. 정말 오해를 하신 거요.”

“주상도 개입했군요. 폐위를 준비하지요.”

명덕태후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 군왕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왕실 안에서의 일이다.

막강한 권한을 가진 이인임이라고 할지라도 신하에 불과하다.

그런데 폐위라니.

만일 그리된다면 고려 왕실의 권위는 헤어나올 수 없는 구렁에 빠지게 된다.

“···주상은 모릅니다.”

“처결을 내리지요.”

이인임이 칼을 움직였다.

명덕태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굶어 죽지 않을 밥 정도는 내리겠습니다. 앞으로 숨만 쉬고 사세요. 이 나라에 마마가 살아 있다는 걸 내가 다시 깨닫는 날은 태후전이 개경에서 사라지게 될 겁니다. 알겠습니까?”

“...명심하겠소.”

이인임은 거칠게 칼을 내던지고 밖으로 나섰다.

명덕태후는 얼굴에는 한스러운 눈물만 흘렀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오열하는 소리만큼은 내고 싶지 않은 거다. 두려움이 내는 소리만은 삼키고 싶었다.

이 나라 고려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서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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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은 허탈하게 웃었다.

“이 최영이 이렇게 개경을 벗어나는 일이 생기다니.”

대체 어디서 뭐가 잘못된 건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칼을 들고 모조리 도륙하고 싶다.

그러나 최영은 필부의 만용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다.

사병이 미처 당도하기도 전에 공격해온 수백 명의 적은 홀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제아무리 최영이라고 할지라도 죽는다.

...한스럽지만 일단 피해야 한다.

그렇게 최영도 개경을 벗어났다.

바야흐로 개경의 정국의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안갯속으로 들어갔다.

< 33화 개경, 바람이 분다(2)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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