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개경, 바람이 분다 >
명덕태후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 있다.
-아무리 왕실의 계보에서 멀어졌다고 하더라도 왕족이거늘. 권신의 당여라니. 참담하구나.
이미 이인임을 통해서 명덕태후의 심리 상태를 짐작하고 있는 왕선이다.
노골적으로 보이는 박대.
충분히 예상했던 바다. 해서, 굴하지 않고 가진 최고의 예를 꺼냈다.
“이 나라 고려 왕실의 최고 어른이신 태후마마를 뵙게 되었사옵니다.”
참으로 극진한 예.
명덕태후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무한한 영광이옵니다. 마마.”
“어서 오게.”
“소인은 항상 마마를 뵙고 싶었사옵니다.”
“이 사람을? 왜?”
“무릇 왕실의 힘이 강해야 나라가 바로 서지 않사옵니까? 이토록 굳건하신 모습을 늘 그리워했사옵니다.”
지금 태후전 곳곳에는 이인임의 사람이 심어진 상태다.
그런데도 왕선은 거침없다.
그 모습을 본 명덕태후의 눈에 이채가 띄었다.
왕선은 곧장 말을 이었다.
“소인 역시 태조 대왕의 피가 흐르지 않사옵니까?”
-어쩌면 이인임의 사람이 아닐 수 있다.
짧은 대화. 그러나 명덕태후는 작은 희망을 품었다.
“자네의 말이 참으로 옳네. 그래. 오늘 나와 많은 대화를 나눠보지.”
왕선은 빙그레 웃었다.
“소인의 왕적을 살려주신다고 들었사옵니다.”
“뭐?”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사옵니다.”
명덕태후는 말문이 막혔다.
“조금 전에 태후마마께서도 소인의 몸에 태조 대왕의 피가 흐름을 인정하셨사옵니다. 하면, 응당 왕적이 회복되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소인 평생 이날만 기다렸사옵니다.”
“허.”
“왜 그러십니까? 분명 그렇게 들었는데 소인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옵니까?”
“······.”
“하면, 일의 진척 여부를 확인하러 종종 들리겠사옵니다. 마마?”
...결국, 이게 목적이었구나. 해서, 극진한 예를 취하는 척 한 거야.
명덕태후의 얼굴은 시뻘게졌다.
왕선은 빙글거리면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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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후전을 나선 왕선은 싱글벙글.
명덕태후의 표정만 보더라도 이인임이 어찌 생각할지 훤했다.
“이보시오.”
옥쟁반에 옥이 구르면 이런 소리가 날까?
왕선은 고개를 돌렸다.
“누구시오?”
“...도당의 재상이라는 자가 도당에서는 참으로 보기 힘들구려.”
“음. 말만 재상이라서요. 한데, 귀공은 누구시오?”
“대사성이외다.”
왕선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포은 정몽주를 이렇게 만나다니.
“아.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왕선이라고 합니다.”
“내 일찍이 그대를 높게 보고 만나보려고 했소.”
“송구합니다. 인연이 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만났으니 참으로 좋군요.”
“그래요. 나도 그리 생각하오.”
“하하. 그렇습니까?”
“그때 당신을 만났더라면 내 생각이 이인임의 귀에 모두 들어갔을 테니까.”
...아. 잠시 잊었다. 지금 정몽주와 굉장히 불편한 사이라는 걸.
왕선은 어색하게 웃었다.
“비록 결과가 이렇게 되었으나 명심하시오. 내 당신을 절대 용서치 않을 거요.”
그 말을 끝으로 찬바람을 펄펄 날리면서 등을 돌린다.
왕선을 그를 잡고 싶었으나 참았다.
...아직 때가 아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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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무슨 말을 나누던가?”
“왕적 회복을 요구했사옵니다.”
“뭐? 하하하. 먼저 요구했다고?”
“예. 태후마마께서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이인임은 박장대소했다.
“하하하. 그래. 그래야지. 그런 건 왕실 최고 어른에게 말해야지 어디 가서 말하겠나. 하하하. 왕선. 이놈 정말 물건이군.”
마지막 문을 왕선이 무사히 넘었다.
“왕선에게 배치된 인원이 몇 명이지?”
“20명입니다.”
“절반으로 줄여.”
“그리하겠습니다.”
비로소 왕선은 이인임의 의심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10명은 이인임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주의할 인물을 감시하는 최소한의 인원이었으니까.
“아. 태후전을 나서다가 대사성을 만났습니다.”
“대사성?”
“예.”
“둘이 무슨 말을 하던가?”
“대사성이 일방적으로 역정을 냈습니다.”
“어? 정몽주가?”
이인임은 눈을 껌뻑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몽주가 화를 냈다?
그를 화나게 하는 사람은 자신이 유일한 줄 알았는데?
이거 참으로 기가 막혔다.
“왕선 이놈. 더 마음에 드는군.”
미소가 짙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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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선은 수시로 태후전을 찾았다.
명덕태후는 싸늘한 표정으로 왕선을 맞이했다.
“어찌 되어가고 있사옵니까?”
“그건 이 사람이 알아서 할 것이네.”
“음. 그렇사옵니까?”
“물러가게.”
“실은 좋은 약재를 구해왔사옵니다.”
“필요 없네.”
“최상급입니다.”
“허. 필요 없다고 했네.”
“소인의 마음이옵니다. 이를 받으시고 왕적을 살려주십시오.”
“필요 없다는 내 말. 안 들리나?”
왕선은 입맛을 다셨다.
“이보게. 내관.”
“예, 예?”
이인임이 심어둔 내관이다.
하지만 명덕태후와 왕선의 신경전을 보는 게 참으로 불편했다.
너무 아슬아슬한 대치였기 때문이다.
“청이 있네.”
“무엇입니까?”
“어의를 좀 불러주게.”
“예?”
“마마께서 이 약재가 최상급이라는 믿지 않으셔서. 어의가 증명해주면 내 체면이 좀 살지 않겠나?”
“아.”
“음. 내가 무리한 부탁을 한 건가?”
“그것이···.”
“자리를 비우기 어려우면 내가 가지.”
장담하건대 왕선은 나가면 못 들어온다. 태후를 이 정도로 열 받게 했으니까.
최대한 왕선의 편의를 봐주라는 이인임의 명령을 새긴 내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소인이 다녀오겠습니다.”
왕선은 반색한다.
“그래 주겠나?”
“예.”
“네 이놈! 네가 눈에 보이는 게 없구나!”
명덕태후의 불호령.
내관은 괜히 화가 미칠까 봐 황급히 나갔다.
왕선은 적당히 눈치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송구하옵니다. 태후마마.”
“뭐?”
“나중에 이 무례함은 반드시 벌하소서. 하오나 이 순간만은 견뎌내시옵소서.”
노기가 하늘 끝까지 치밀어 올랐던 명덕태후의 눈에 의구심이 치솟았다.
“궁금하신 게 많으실 것이옵니다. 그러나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사옵니다.”
왕선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
“마마. 소인은 고려 왕가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사옵니다.”
명덕태후의 눈이 출렁였다.
그러나 그녀는 모진 풍파에도 왕실 최고 배분을 지켜온 여인이다.
만일, 이인임이라는 희대의 권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고려를 움켜쥐고 있었을 여인이다. 해서, 왕선의 행동이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속내를 들여본 왕선은 밖을 살피면서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소인에게 계책이 있습니다. 최영 장군을 움직여야 합니다. 이를 가능하게 하려면 두 분께서 힘을 내주셔야 합니다.”
명덕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명한 여인이다. 쓸데없는 되물음으로 시간을 뺏지 않는다.
“옥새가 찍힌 마마의 혈서. 내주시겠습니까?”
이왕이면 군왕의 혈서가 더 좋다.
그런데 어린 왕에게 그걸 요구할 수 없다.
옥새면 감지덕지.
물론 이것도 어렵다. 이인임의 눈을 피해서 옥새를 찍어야 하니까.
그때 다시 밖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왕선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소인을 믿으셔야 합니다.”
“어찌 전달하면 되겠나?”
“다음에 오늘 올린 약재 속에 넣어서 소인에게 집어 던져버리시옵소서. 이왕이면 면상에 말이옵니다.”
“이 사람이 답례로 상을 내리는 게 좋지 않나? 거기에 같이 넣어서 말이네.”
“아니옵니다. 그건 이인임의 의심을 사게 될 것이옵니다. 지금처럼 소인을 벌레 취급하시옵소서.”
“알겠네.”
“반드시 준비해주셔야 합니다. 이 나라의 천년대계가 마마의 손에 달렸습니다.”
“마마. 어의가 들었사옵니다.”
왕선은 자세를 고쳐잡았다.
“마마. 최상급이 맞사옵니다.”
“당장 물러가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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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태후전을 방문한 왕선은 엉망이 된 약재 꾸러미를 잔뜩 들고 나왔다.
“괜찮으십니까?”
“됐네. 내가 벌레 취급당하는 게 하루 이틀인가?”
내관은 쓰게 웃었다.
“웬만하면 왕적을 살려주실 만도 한데. 차라리 수시중 어른께 도움을 청하시지요.”
“이 사람아. 하나하나 다 부탁하면 내 꼴이 뭐가 되겠나? 됐네. 내가 알아서 하겠네.”
“알겠습니다.”
왕선은 주변 눈치를 슬쩍 보면서 말했다.
“그래도 내 체면이 있어서.”
“예?”
“오늘 약재로 얻어맞은 건 비밀로 해주겠나?”
“하지만···.”
난감한 표정을 보이는 내관.
왕선은 약재를 그의 손에 건넸다.
“이거 자네 먹게.”
“이, 이건 최상급 약재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자네 먹게.”
내관은 눈알을 요리조리 굴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조만간 정통 왕족으로 살아가셔야 하는데 험한 일을 당하셨다는 게 알려질 필요는 없지요.”
왕선은 무릎을 '탁' 치면서 말했다.
“자네 정말 탁월하군.”
“과찬이십니다.”
빙그레 웃었다.
“그러면 이만 가보겠네.”
“살펴 가십시오.”
왕선은 등을 돌리면서 가슴 한쪽에 손을 올렸다.
얇은 서찰의 존재가 느껴졌다.
아니, 어지가 느껴졌다. 왕이 쓴 건 아니지만 옥새가 찍혔으니 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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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은 갑작스러운 왕선의 방문에 냉큼 냉수 그릇을 내오게 했다.
“······.”
“들게.”
“오늘도 어김없이 진수성찬이군요.”
“자네라서 이 정도 대접을 해주는 거야.”
“음. 수시중은 탁주에 파전이라도 내줍니다. 괜찮은 주막에서 말입니다.”
“거기에 홀딱 넘어간 건가?”
그러고 보니 최영의 표정이 영 좋지 않다. 정확하게는 은은한 노기가 느껴졌다.
살짝 고민됐다. 중간과정 생략하고 가져온 서찰을 바로 꺼내 들까?
...아니다. 그동안 지켜본 최영은 막연하게 알던 최영이 아니다.
생각 이상으로 이인임과 끈끈한 사이다. 괜히 섣부르게 행동해서 비장의 수를 날려버릴 수는 없다. 일단, 최영의 속내를 모두 꺼낸다.
“말씀에 뼈가 있으시군요.”
“요즘 자네 행보를 보면 안 그럴 수가 없네.”
“사대부를 내친 일을 이르십니까?”
“허. 내가 그걸 뭐라고 하겠나? 그 일은 백번 잘한 일이야.”
“하면, 소직이 딱히 문제 될만한 일을 한 기억이 없습니다만.”
최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눈에 담긴 성질은 분명한 노여움이었다.
“태후마마께 결례를 자주 범한다지?”
“음. 설마 탁주와 파전을 얻어먹고 그런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내가 지금 자네와 농지거리를 한다고 생각하나? 말 똑바로 해.”
어느새 살기도 나온다.
“탁주와 파전을 그만 먹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봐. 왕선.”
“장군께 최고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최영은 냉수 그릇을 들어서 절반 이상을 마셨다.
“얼마 안 남았군.”
“장군께 최고의 가치는 고려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 그릇이 자네가 이승에서 본 마지막 물건 일 수도 있어.”
“이런 분위기 처음 만났을 때 느꼈지요.”
“내가 자네의 능력과 포부를 인정하지만, 최소한의 선이라는 게 있어. 왕실의 최고 어른께 무례하다? 감히?”
“한데, 수시중은 왜 그냥 두십니까?”
최영의 눈매가 서늘해졌다.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였다.
애써 태연한 척 말을 이었다.
“고려의 국시 북진. 장군께서는 심장이 움직이셨을 겁니다.”
“적당히 하라고 했네만?”
“한데, 북진을 명하는 건 군왕이지요. 왜? 고려의 모든 권력은 군왕에게서 나오기 때문이지요.”
“나는 태후마마께 무례를 범한 일을 꾸짖고 있네. 이인임은 이인임이고, 자네는 자네야. 어설프게 넘어가려고 하면 진짜 죽어.”
“그리고 마지막 하나. 현 고려 왕가의 상징은 태후마마이시지요.”
“그 상징을 네놈이 욕보였다고 말하고 있다.”
가뜩이나 이인임이 왕선의 위험성을 경고해서 심사가 어지러웠다.
한데, 재상이 되더니 그야말로 안하무인이다. 용납할 수 없었다.
최영은 남은 냉수를 모두 마셨다.
-탁!
“네 말대로 나의 최고 가치는 고려다. 고려는 북진, 군왕, 왕가로 나누어진다. 그런데 너는 북진을 거들먹거리면서 왕가를 희롱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어. 내가 널 어찌해야겠느냐?”
“보고 들을 때마다 우습다고 생각했습니다. 천하에 장군처럼 기만을 입에 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고려의 국시. 북진하려면 이인임을 척결해야 하고, 고려의 군왕과 왕가는 이인임을 증오하거늘. 장군께서는 이인임과 손을 굳게 맞잡고 있지요. 이처럼 가소로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네 이놈!”
마침내 최영의 노기가 폭발했다.
그 순간 왕선이 품에서 서찰을 꺼냈다.
“어지입니다.”
“뭐라?”
“동시에 태후마마의 혈서이지요.”
“!!!”
왕선은 차가운 눈으로 최영을 쳐다봤다.
“어지라고 했습니다?”
날카롭게 내뱉었다.
“예를 갖추시지요.”
< 32화 개경, 바람이 분다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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