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숙청의 칼을 쥐다 >
개경의 심장부 도당의 분위기는 숨 쉬는 것도 버거울 만큼 스산했다.
재상들은 눈치만 살피면서 입을 열지 못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요.“
오늘 처음으로 도당에서 울린 말이다. 그것은 이인임의 입에서 나온 퇴청 명령이다. 재상들은 어색하게 웃었다.
오늘 아무런 안건을 논의하지 않았다.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눈치만 봤을 뿐이다. 그런데 집정 대신이 물러가라고 한다. 하면, 물러가야 한다.
한, 두 명이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사람도 뒤를 따랐다. 수십 명의 움직임이 있었으나 부산스러움 따위는 전혀 없었다.
“지금 뭐 하는 것이오?”
질책이 가득 담긴 목소리.
정몽주다.
“나라의 녹을 먹는 재상들이 도당에서 시간만 보내다가 물러가다니요.”
재상들은 불편한 시선으로 정몽주를 쳐다봤다.
그러나 누구도 입을 떼지는 않았다.
“중요한 현안이 올라왔소. 이를 논의해야 하오. 다시 앉으시오.”
정몽주의 말은 힘이 잔뜩 실려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재상들은 죽을 맛이다.
하지만 누구도 다시 착석하는 사람이 없다. 어색한 시선으로 도당의 상석을 쳐다볼 뿐이다. 그 자리에는 당연히 이인임이 있다.
“모두 물러가라고 했네.”
두 번째 퇴청 명령.
재상들은 더 고민하지 않았다.
“허. 모두 앉으세요!”
정몽주가 외쳤으나 누구도 따르지 않았다.
그랬다. 지금 이인임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거다.
고려의 도당을 좌지우지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보이는 거다.
포은 정몽주에게.
“대사성.”
나지막한 목소리.
최영이었다.
“과했네.”
“최영 장군.”
“나라의 내우외환이 끊이지 않아. 산적한 과제가 한둘이 아니라는 말일세. 그런데 사대부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도당은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고 있어.”
최영은 그 말을 끝으로 도당을 나갔다.
이인임과 정몽주만 남았다.
“하. 대사성.”
“······.”
“장난도 적당히 쳐야지.”
“하. 장난이라고요?”
이인임이 매섭게 노려봤다.
“내가 도당에 사대부를 대표하는 자네를 남겨둔 건 두 가지 이유가 있어. 첫째 균형을 이루고자 한 것이네.”
“균형이 아니라 기울어진 고려겠지요. 지금 수시중의 전횡으로 나라가 거덜 나고 백성이 도탄에 빠졌어요.”
“그래. 두 번째는 바로 그거야.”
“허. 또 무슨 궤변을 펼치는 겁니까?”
“왕좌지재를 완성 시키려고.”
이인임은 탄식하듯 말했다.
“자네는 설익었어. 나와 최영 장군이 없는 고려를 자네가 이끌어야 할 건데 겨우 그 정도 경륜으로 어찌 나라를 이끌어 가려고 하는가? 해서, 자네에게 가르침을 내리고자 도당에 남겨둔 것이네. 한데,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참으로 실망스럽군.”
“정치는 정략이 아니라 정도를 표방해야 하는 법. 나는 권신의 정략을 배울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설익었다는 것이네.”
“수시중은 틀렸습니다. 정도가 정략을 이기기 때문이지요.”
“답답하군. 자네 정말 죽고 싶나? 내가 언제까지 자네의 치기 어린 행동을 봐줄 거로 생각하나?”
정몽주는 굳은 얼굴로 이인임의 눈을 노려봤다.
“죽이면 죽으면 됩니다.”
“뭐?”
“수시중이 움켜쥔 권력이 얼마나 하찮은지, 천하제일이라고 자부하는 정략이 가소롭다는 걸 보여드릴까요?”
“뭐?”
“죽이세요. 죽어 드릴 테니.”
“뭐? 하. 내가 못 할 거라고 보나?”
“해서 말하지 않습니까. 죽이라고요.”
“하. 대사성.”
“이게 꿈입니다. 당신이 나를 죽이는 게.”
“뭐?”
“당신의 권력은 책상물림 서생 하나 뜻대로 못하고, 당신의 정략은 내 신념을 넘지 못합니다. 이게 정도입니다. 모든 걸 이기는 정도. 알겠습니까?”
정몽주는 냉기를 풀풀 풍기면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뱉듯 말했다.
“고려의 모든 권력은 군왕의 손에 올릴 겁니다. 더럽고 추악한 정략이 지배하는 정치판은 올곧은 정도가 완전히 쓸어버릴 겁니다. 반드시 장담하겠습니다. 당신이 죽기 전에 내가 만들 겁니다. 당신이 죽은 다음에 바로잡는 건 이 나라 고려의 심대한 오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정몽주는 거칠게 등을 돌렸다.
이인임의 굳은 안색이 조금씩 풀어졌다.
“거. 성질머리하고는.”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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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선은 실소를 머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대부의 행동은 이해할 수가 없다.
...군왕의 친정이라니.
이건 정말로 미쳐도 제대로 미친 거다.
작금의 고려 군왕이 가진 권위로 그게 가당키나 한가?
명분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다. 명백하게 이인임이 압도적인 우위에 있는 정국이다.
동쪽으로 가도 이인임, 서쪽으로 가도 이인임이 있는 세상이다.
그런데 사대부들이 들고일어났다.
우회하여 이인임의 측근을 겨냥한 게 아니라 이인임을 그대로 찍었다.
“탄핵? 귀양?”
...이건 진짜 미친 거다.
불현듯 스치는 말이 있다.
[포은 정몽주는 아직 멀었네.]
일전에 들은 최영의 말.
이제야 이해가 갔다.
...정몽주의 능력을 떠나서 500년 거목을 책임질 정치적 경륜이 부족하다는 말이 참으로 크게 와닿았다.
그래. 최영의 말대로다.
만일 정몽주가 정략의 ‘정’ 자만 알아도 이따위 말 같지도 않은 했을 리는 없다.
탄핵은 멀쩡한 세상이나 권력의 비호를 받아야만 효과를 낼 수 있거늘.
속으로 정몽주와 사대부를 실컷 욕하고 있을 때다.
“일찍 왔군.”
이인임이다.
왕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셨습니까?”
“앉지.”
“예.”
“술은?”
“주모에게 말해뒀습니다. 이제 내올 겁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막의 주모는 술상을 내왔다.
왕선은 이인임에게 술을 따랐다.
“심려가 크시겠습니다.”
“누가? 내가?”
“...예.”
이인임은 조소를 날렸다.
“철부지 몇 명이 설친다고 뭐가 바뀌나?”
“······.”
“어처구니가 없을 뿐일세.”
그랬다.
이인임에게 작금의 사태는 말 그대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에 불과했다.
고려를 움직이는 거인의 발목에 작은 생채기조차 내지 못한 거다.
“음. 그러고 보니 표정이 좀 좋아 보이기도 합니다.”
“아. 무서운 말을 듣고 왔거든.”
“무서운 말이요?”
“말이 그렇다는 것이네. 조금 놀라긴 했지만 무서울 리가 있나.”
“당연히 그러시겠지요. 한데, 이제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이인임은 술을 한잔 들이키면서 말했다.
“호랑이는 왜 맨날 당할까?”
“예?”
“민담에 나오는 호랑이 말이야. 그 강한 힘을 가지고도 매번 당해. 어린애들의 꾀에도 당하지 않나.”
“그거야 짐승에 불과하니까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 짐승 따위에 불과해서 그런 거야. 조금만 움직이면 배불리 먹을 수 있는데 말이야.”
“······.”
“나는 호랑이 민담을 들을 때마다 느낀 게 있네.”
“궁금하군요.”
“대화만큼 불필요한 건 없다는 거지.”
이인임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아무래도 이참에 사대부를 몽땅 쓸어버릴 생각이 분명하다.
이건 곤란하다. 가뜩이나 기울어진 운동장인데 사대부까지 쓸려나가면 누가 이인임의 폭주를 막겠는가.
왕선은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모조리 숙청할 명분이 부족하지 않습니까?”
“명분?”
“예.”
“자네 개경에서 사대부 물이 좀 들었군. 명분 타령하는 걸 보니까.”
“여기저기 주워들은 게 많습니다.”
“그래? 그러면 자네가 한번 해보게.”
“예?”
“그 명분에 거스르지 않게 일을 해보란 말이네. 자네 손에 칼을 쥐여줄 테니까.”
“소생이 말입니까?”
“그래. 잘 한번 만져봐. 솜씨를 한번 보지.”
“수시중 어른.”
“기대하네. 명분을 잘 지키면서 명분을 무시했을 나와 결과가 같아야 할 거야.”
결국, 모조리 숙청하라는 말이다.
최악이다.
괜히 나섰다가 골치 아픈 일을 맡은 거다.
이러면 사대부와 척을 지게 된다.
포은 정몽주? 더 말해 뭐하겠는가.
그런데
“결과를 보고 도당에 올려주겠네.”
...이러면 말이 달라진다.
도당에 진출한다는 건 군왕과 태후를 만날 가능성이 커지는 거다.
저울대를 잘 가늠해본다.
...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거부할 권한은 없다. 그냥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괜찮은 조건까지 걸렸다.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해보겠나?”
“거절할 수 없는 조건입니다.”
“거절할 수 없는 조건?”
“거절할 수 없는 명령이기도 하고요.”
“큭. 자네는 아주 솔직하군.”
“이참에 잘 솎아내보겠습니다.”
“잠시.”
이인임은 히죽거렸다.
“솎아낸다?”
“그걸 원하시는 거 아닙니까?”
“자네 참 영악해? 나를 슬쩍 떠봐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 알아내려고 하다니.”
“이거 수시중 어른의 생각을 엿보려고 했는데 아쉽게 됐군요.”
“수작 부리지 말고 결과로 말하게.”
“성심껏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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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선은 상소를 올리거나 연좌에 참여한 사대부의 명단을 유심히 살폈다.
“어디 보자. 정도전이 화살받이네?”
그러면 몸통은 정몽주인가?
“음. 정몽주는 안 보이는군. 꽁꽁 숨었나 본데.”
뭐.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답은 정해져 있으니까. 어차피 이인임이 원하는 대로 판을 돌려야 한다.
이번 일로 사대부와 척을 질 가능성이 아주 크다. 아무리 도당에 진출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손해가 제법 크다. 그러면 또 다른 실리를 찾는 게 옳다.
그의 눈이 한 사람의 이름으로 향했다.
[정도전]
이건 뭐. 이 사람이 주된 목적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만일, 이 사람을 얻을 수 있다면 사대부를 다 적으로 돌려도 나쁘지 않을 거 같다.
그래도 엄청나게 남는 장사다.
냉큼 이인임에게로 달려갔다.
“국문도 안 한다?”
“굳이 할 필요도 없지요.”
“이유는?”
“절차를 요구하는 무리를 국문에 처하면 됩니다. 왜? 어명에 항거한 행위를 한 거니까요. 이 나라 고려에 어명보다 상위에 있는 명분이 있습니까?”
이인임의 눈썹이 살짝 움찔했다.
-이놈. 볼수록 나를 놀라게 하는군. 대단해.
왕선은 빙그레 웃었다.
당신 머릿속에서 나온 거야.
“정도전을 전라도로 보내자?”
“물 건너보내기는 그렇고. 최대한 멀리 보내는 걸 고려해본 겁니다.”
이건 왕선의 생각이었다.
정도전을 전라도로 보내야 잡아먹기가 좋으니까.
이인임의 답을 기다렸다.
“나쁘지 않군.”
됐다.
“나머지는?”
“사실 별 의미가 있겠습니까? 삭탈관직하거나 적당한 곳으로 내치면 될 것 같습니다.”
“정몽주가 난리 치겠군.”
“억울하면 어명 받아오겠지요.”
“이 나라에서 어명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지.”
“음. 소직이 알기로는 한 분밖에 없습니다.”
“자네 아부도 제법인데?”
“이 정도는 해야지요.”
이 정도면 능력도 능력이지만, 자신의 사람이라는 게 증명된 거다.
고려 땅에서 포은 정몽주와 척을 진 사람이 갈 곳은 딱 한곳, 자신의 품밖에 없으니까.
이인임은 시원하게 웃었다.
“도당에 출사할 준비하게.”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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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 대대적인 숙청이 단행됐다.
정도전은 전라도 나주로 귀양을 가게 됐고, 그 외 사대부도 삭탈관직이나 귀양이 처하게 됐다.
“삼봉.”
“됐네. 각오했던 일이네.”
“이 사람아.”
“그리고 예상했던 일이기도 하고.”
정몽주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얼마나 원통했으면 이 충실한 인사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까.
정도전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다만 아쉬운 건 이인임이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았다는 거야. 이로써 분명해졌어. 이 나라 고려는 정도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삼봉. 아닐세. 그건 아닐세.”
정도전은 쓰게 웃었다.
애초 이인임을 상대할 때 짜임새 있는 정략을 펼쳤어야 했다.
하지만 정몽주가 너무 고지식하다.
...그리고 자신도 만류하지 않았다. 포은 정몽주가 이 더러운 현실을 인정하길 바랄 뿐이었다. 하여, 그의 생각이 바뀌기를 바랐다.
만일 그리만 된다면 유배에 처한 이 비루한 처지가 천금의 가치와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될 거니까.
“하하하. 그나저나 왕선이라고? 이번 일을 꾸민 작자가?”
“그렇다고 하더군.”
“언젠가 그 인간을 만나면 얼굴에 침을 뱉어줄 것이네.”
정몽주는 아무런 말 없이 듣기만 했다.
한참 동안 독설을 퍼붓던 정도전은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네. 이 더러운 개경에 자네만 남겨둬서.”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허탈하게 웃는 정몽주를 보면서 정도전은 그런 생각을 했다.
왕좌지재라고 불리는 정몽주가 정략을 펼치면 어떤 일이 발생하게 될까?
경천동지를 백번을 할만한 정치적 수가 휘황찬란하게 펼쳐지지 않을까?
생각만 해도 짜릿했다.
그때 포은 정몽주의 옆자리에 서고 싶다.
내가 가고자 하는 길에 정몽주가 함께 있길 바랐다.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뭐. 그나저나 자네 생각이 바뀌길 바라네.”
“...몸조심하게.”
당장 정몽주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 수는 없다.
정도전은 예상했다는 듯 답했다.
“무리하지는 마시게.”
정도전은 익살스럽게 웃으면서 떠났다.
정몽주는 하늘을 쳐다보면서 분루를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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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시중.”
“예. 마마.”
“이번에 재상이 된 왕선이 왕족이라고 들었어요.”
“그렇습니다. 마마.”
명덕태후는 이인임의 눈치를 살피면서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 사람이 왕실의 최고 어른인데 한번 만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인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명덕태후는 황급히 변명하듯 말했다.
“오해 하지 마세요.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닙니다.”
“다른 의도? 그게 뭔지 궁금하군요.”
“수시중이 불편하다면 청을 거두겠습니다.”
이인임은 수염을 만지면서 넌지시 말했다.
“왕실의 최고 어른께서 왕족을 만나시는데 어찌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명덕태후의 안색이 밝아졌다.
“한데, 단지 얼굴만 보시고자 하는 건 아니겠지요?”
명덕태후가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계보를 면밀하게 살펴서 왕족의 위치를 살리는 건 어떨까 합니다. 물론, 주상과 논의해봐야겠지만요.”
분명하게 선을 그은 거다.
이는 왕실의 일이라는 걸.
“하하. 그렇지 않아도 소인이 먼저 청하려고 했습니다.”
...먼저 청하려고 했다?
명덕태후의 눈이 흔들렸다.
그걸 놓치지 않은 이인임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설마 왕선이 최영 장군의 사람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시겠지요?”
명덕태후의 표정이 흔들렸다.
이인임의 미소가 진해졌다.
“그는 내 사람입니다. 마마.”
명덕태후는 심장이 철렁했다.
괜한 말로 이인임의 기세만 올리게 된 거다.
이인임의 당여인 몰락 왕족을 정통 왕족으로 삼게 된 거다.
정신이 아찔했다.
< 31화 숙청의 칼을 쥐다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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