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왕선이 문제네 >
“캬. 기가 막히는군.”
정도전은 연신 술잔을 들이켰다.
“포은. 자네는 왜 안 먹나?”
“하하. 이 사람아. 술이라도 한번 권해보게.”
“응? 내가 권하지 않았나?”
정몽주는 옅게 웃으면서 술병을 들었다.
“한잔 더 받게.”
“얼마든지.”
정도전은 히죽이면서 술잔을 내밀었다.
“참으로 경치가 좋군. 나는 자네와 박연폭포에서 술을 걸치는 순간이 제일 좋으이.”
“원. 사람. 싱거운 말하기는.”
“자네는 안 그런가?”
“이 사람아. 포은 정몽주와 술 먹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고려 땅에 어디 있나? 오라고 하면 벌떼처럼 달려올 것이네.”
“있긴 하지.”
정몽주가 술병을 거두자 정도전이 받아서 내밀었다.
“자네도 한잔해야지.”
“이제 챙겨주나?”
“너무 바빴네. 자네가 이해하게.”
농을 주고받았다.
술을 다 따른 정도전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인임을 말하는 건가?”
“아무렴.”
“그 인사의 마지막도 얼마 남지 않았어.”
“삼봉. 속단하지 말게. 이인임은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간신은 군왕의 권능을 빌리고 권신은 군왕의 권능을 탐하지. 그러나 둘 다 공통점이 있네. 군왕의 정사를 막을 명분이 없다는 걸세. 비록 군왕께서 친정할 수 없는 보령이라고 하더라도 태후께서 계시네. 우리가 이를 잘 만들어 내기만 한다면 이인임은 단번에 몰락할 거야.”
“나 역시 그리되길 바라네.”
정몽주의 얼굴에는 그늘이 가득하다.
정도전은 술을 마시면서 정몽주를 유심히 쳐다봤다.
“포은. 혼자 속앓이 하지 말고 털어놓게. 내게 말 못 할 게 어디 있나.”
“자네가 말한 명분. 그걸 이인임도 가지고 있지 않나. 선왕의 유지라는 절대적인 명분.”
“해서?”
“더 힘을 실어낼 수 있으면 좋을 거 같아서.”
“이를테면 최영 장군?”
“그러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아서게. 이인임의 권력을 지탱하는 가장 거대한 축이 최영 장군일세.”
“···그렇긴 하지.”
“최영 장군은 고려의 국호가 유지하는 것만 관심 있어. 자네와 나처럼 이 나라 백성까지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말이네. 내가 생각을 해봤네.”
“자네 생각이 진리지.”
“실없는 소리 하지 말고 들어보게.”
정도전은 입맛을 다셨다.
정몽주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다.
“전주 목사 왕선을 포섭할까 하네.”
“왕선? 전주 목사? 왕족 출신의? 그런데 이인임의 당여라는 거 같던데?”
“최영 장군과도 격의 없는 사이라고 하더군.”
“그러면 이인임의 당여네.”
“하하. 그게 또 그렇게 되나?”
“그나저나 그 사람을 설득할 자신은 있고?”
“일단 만나봐야지.”
“...자네가 직접?”
“그래야지.”
“내가 가겠네.”
“그건 반대일세.”
“왜?”
“몰라서 묻나?”
“끙.”
“중요한 아군이 될 수도 있는 사람과 원수가 되는 일은 막아야지. 안 그런가?”
“거. 사람. 고약하게도 말하는군.”
입맛을 다시는 정도전.
정몽주는 빙그레 웃었다.
“술이나 들게.”
“그래. 그러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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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천목은 진땀을 흘렸다.
“송구합니다. 포은 선생.”
“아닐세. 미리 약조하고 오지 않은 내 탓이지.”
“송구합니다.”
“하하. 다음에 다시 찾아오겠네. 말이나 전해주게.”
“예. 살펴 가십시오.”
정몽주는 옅게 웃으면서 등을 돌렸다.
그 뒷모습이 참으로 고결하다.
마천목은 입맛을 다시더니 슬그머니 안채로 들어갔다.
“형님. 포은 선생께서 가셨습니다.”
“그래? 다른 말은 없고?”
“예. 다음에 다시 찾겠다고만 했습니다.”
마천목은 한숨을 쉬면서 말을 이었다.
“형님. 다른 인사는 다 만나면서 왜 포은 선생을 피하십니까?”
“피할 만 하니까.”
“예?”
정몽주.
만나보고 싶다. 만나서 그를 품고 싶다.
그러나 참아야 한다.
지금부터 시작할 일은 필승을 자신할 수 없는 일이다.
만일 실패했을 때 고려의 균형을 잡아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 유일한 사람이 바로 정몽주다.
해서 만나지 않았다.
괜히 정몽주까지 휘말릴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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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임의 눈에 이채가 띄었다.
“정몽주가 그냥 돌아갔다고?”
“예.”
“왕선은?”
“집에 있었다고 합니다.”
“일부러 안 만난 건가?”
“정황상 그렇습니다.”
“허. 정말 볼수록 기가 막힌 놈이군.”
이인임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안 그렇소? 최영 장군.”
“영악한 놈이지요.”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제법 빛을 영롱하게 냅니다. 그려.”
최영은 옅게 웃었다.
“내가 봐도 그렇소. 이제 막 약관을 벗어난 풋내기에 불과한 줄 알았는데.”
“하하. 내 말이 그 말이오. 다른 사람은 다 만나는데 포은 정몽주만 피했다? 이건 분명하게 선언한 거지요. 어디에 줄을 대고 있는지 말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외다. 왕족인 데다가 전주에서 큰 공도 세웠고 자격은 충분하오.”
“최영 장군. 왜 그렇게 서두릅니까?”
“도당에 걸맞은 인재가 나왔소. 한시라도 빨리 경험을 쌓게 하는 게 좋지 않겠소?”
“음. 아직 여물지 않았어요.”
“포은 정몽주를 내치면서 모든 게 증명됐다고 보오.”
최영이 재차 권한다.
이인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직 일러요.”
“충분하오.”
“최영 장군. 나는 군부의 일에 관여하지 않소만?”
“...수시중.”
“내치는 내게 맡기기로 했던 거 같소만?”
“내가 그걸 지키지 않았다면 벌써 이성계는 개경을 활보하고 다닐 거요.”
“예. 맞습니다. 그게 우리의 맹약이지요.”
맹약. 그래. 맹약이다.
최영은 이를 부정할 인사가 아니다.
“...대체 인사를 미루는 이유가 뭐요?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보다 수시중의 적극적이었던 문제였소.”
“그랬지요.”
“신임 전주 목사 인사도 미뤄졌다고 들었소.
”그렇게 되었소.“
“설마 전주로 다시 내려보낼 생각인 거요?”
이인임은 최영을 지그시 쳐다봤다.
왕선이 전주를 품으려는 걸 전혀 모르는 눈치다.
하긴. 알면 이렇게 나올 수가 없지.
“왕선은 왕족이오.”
“알고 있소.”
“그래서 그럽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태후마마께서 금상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걸 잘 알 것이오. 그런데 명망 있는 왕족이 등장했다? 태후마마의 심장에 불을 지피는 거지요. 몰락한 왕족? 계보에서 멀어진 왕족? 최영 장군. 작금의 고려에서 그건 의미가 없소. 왕선의 족보 가장 위에 태조 대왕께서 계시는 것만으로 모든 게 정리가 된다는 말이외다.”
최영은 말문이 막혔다.
이인임의 말대로다. 왕선이 급부상하게 된다? 왕족이?
확고하지 않은 금상의 왕좌가 더 흔들리게 된다.
이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다.
“장군과 내가 용상을 지키고 있는 지금은 별다른 수가 없을 거요. 한데, 우리가 천년만년 사는 건 아니오. 당장 내일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늙은이들이라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노리는 사람은 많습니다. 언제라도 움직임이 있을 거란 말입니다.”
이인임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실은 나는 왕선이 정몽주를 내친 것보다 정몽주가 왕선을 찾아간 사실을 더 주목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도당은 나와 장군 그리고 포은. 이렇게 세 축으로 움직이고 있소. 우리는 이 구도에 만족하지만, 포은도 그렇던가요?”
“······.”
“약간의 상상력을 넣어보겠소이다. 만일 포은이 태후마마와 손을 잡았다면?”
“······.”
“상상이지요. 그러나 정치는 상상력이 만드는 거요.”
최영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장군. 이래도 왕선을 도당에 부르는 게 급하오?”
“...내 생각이 짧았소.”
“나 역시 장군과 미리 이 문제를 상의하지 못했습니다.”
이인임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최영도 뒤따라 고개를 숙인다.
몇 마디 대화가 더 오가고 최영은 무거운 표정으로 일어났다.
“살펴 가시오.”
“도당에서 봅시다.”
이인임은 최영이 앉아 있던 자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어찌 이리도 쉬울까.
싱긋 웃으면서 찻잔을 들었다.
참으로 흡족했다.
“왕선은 말입니다. 확실한 내 사람이라고 느껴질 때 도당에 올릴 겁니다. 고려를 위한 공이 아니라 나를 위한 공을 세웠을 때 말입니다. 그게 고려를 위한 거지요. 정치는 이렇게 하는 거요. 최영 장군.”
오늘따라 유독 차 맛이 좋다.
“평생 나라의 대문이나 지키시구려. 마당의 과실은 내가 다 차지할 거니까. 아시겠소? 고려의 수문장 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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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은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하. 미친놈이네. 포은 정몽주가 만남을 청했는데 거절해?”
“거절한 게 아니라 자리에 없었네.”
“그걸 말이라고 하나? 내가 알아봤는데 왕선은 집 밖으로 잘 나가지도 않아. 그런데 요상하게도 자네가 딱 찾아간 날에 없었다고? 좋아. 그래. 그렇다고 치자고. 길 가다가 벼락에 맞아 죽는 사람도 있으니까. 정말 개똥 같게도 자네가 간 날만 왕선이라는 놈이 자리를 비웠다고 하자고. 그래. 그렇다고 하자고. 그런데 종놈에게 말을 전달받았을 게 아닌가. 그런데도 며칠이 지나도록 찾아오지도 않는다고? 하.”
“진정하게. 사정이 있을 거야.”
“사정? 대체 무슨 사정이 이렇게 길게 끌어? 벼락 맞을 가능성으로 자리를 비운 작자가 벼락 맞을 가능성만큼 어려운 자네와 만나는 걸 뿌리친다고? 참으로 개똥 같은 일의 연속일세. 기가 막혀서. 자기가 와서 무릎을 꿇고 가르침을 청해도 부족하거늘. 아니, 제가 무슨 제갈량이야? 삼고초려라도 해줘야 해? 유비가 제갈량을 모시는 수준이군. 유비 발톱만큼도 안 될 놈이 말이야. 아. 자네는 제갈량보다 윗줄에 있네. 당연하지. 어쨌든 진짜 미친놈이네.”
...참 두서없는 말의 연속이다.
정도전은 격하게 내뱉었다.
“딱 봐도 견적 잡히는군.”
“무슨 말인가?”
“이인임에게 붙어서 떡고물이나 받아먹으려는 작자야. 자네를 피하는 거지.”
“전주 목사는 최영 장군과도 친분이 있네.”
“이인임이나 최영이나. 대체 무슨 차이가 있나? 내 눈에는 오십보백보일세.”
“삼봉.”
“왕실만 있으면 나라인가? 백성 다 죽어도 왕실만 있으면 끝이냐고.”
정몽주는 더 말리지 않았다.
이 정도로 흥분한 정도전은 그냥 두는 게 답이다.
“차라리 잘 된 거야. 괜히 왕선에게 말해서 말이 새어나가기라도 하면 일만 복잡해져. 이번 일의 가장 중요한 건 보안일세. 기습적으로 이인임을 탄핵해야 하니까.”
정도전은 숨을 크게 내쉬면서 말했다.
“내가 선두에 서겠네.”
“됐네. 내가 하겠네.”
“자네는 사대부의 좌장일세. 함부로 몸을 움직이지 말게. 가장 앞에서 화살을 맞는 건 내 역할일세. 잘 보라고. 내가 모조리 막아낼 테니까. 그 틈에 자네는 적장의 목을 베게. 역사에 남을 시원한 한 수를 날려서.”
“삼봉.”
“괜찮네. 걱정하지 말게. 나 또한 보통 각오가 아닐세. 이번이 마지막이야. 마지막으로 몸을 던져볼 것이야. 고려를 위해서.”
드높은 결심이 담긴 말.
그런데 정몽주의 눈에는 의아함이 가득하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마지막이라니?”
“어?”
“자네 입으로 마지막이라고 했어.”
“아.”
“삼봉.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설마 또 사라지려고?”
“하하. 그만큼 결사적으로 일을 한다는 말이네.”
정도전은 머쓱하게 웃었다.
< 30화 왕선이 문제네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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