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길에서 만난 행인(제목 수정) >
왕선은 이인임의 신임을 받아냈으나 별다른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형님.”
지켜보던 마천목이 답답한 듯 입을 열었다.
“도당에 입성하실 줄 알았는데 대체 어찌 된 겁니까? 아무런 소식이 없지 않습니까.”
“음. 천목아. 그게 좋은 거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내가 도당에 들어간다는 건 새로운 전주 목사가 결정됐다는 뜻이니까.”
“그렇지만 형님께서 전주 목사인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 말도 맞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다. 오는 사람 내치지 않고 잘 만나기만 하면 될 거니까.”
“음. 확실히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긴 하더라고요.”
개경에 연고가 없는 왕선에게 이인임이 적당한 공간을 마련해줬다.
왜구를 격멸한 전주 목사를 이인임이 신뢰하고 집까지 구해줬다?
일련의 상황은 입을 타고 옮겨졌고 말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왕선과 친분을 쌓고자 수시로 찾아오곤 했다.
큰 호의를 가지고 온 사람도 있고, 경계하는 사람도 있었다.
속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으니 걱정도 없었다.
그저 간단하게 응수하면서 얼굴이나 익히면 될 일이다.
물론 그럴 수 없는 상대도 있다.
“최영 장군께서 만나길 청하십니다.”
당연히 최영의 사가로 찾아가야 한다.
왕선은 심호흡 한번 크게 해주고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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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시중이 뭐라고 하던가?”
“잘 이끌어 준다더군요.”
“내 말대로지?”
“예. 그렇습니다. 한데···.”
“왜 그러나?”
왕선은 헛웃음을 지으면서 냉수 그릇을 가리켰다.
“이번에도 냉수만 주십니까?”
최영이 눈을 크게 뜬다.
“이 정도면 산해진미지.”
“...장군.”
“이번에는 특별히 큰 그릇에 준비했네.”
확실히 저번보다 큰 그릇이긴 하다.
그러니까 물 많이 먹으라는 거다.
왕선은 입맛만 다셨다.
“그나저나 일이 잘 풀리는군. 자네의 도당 입성이 머지않았어.”
“급할 게 있습니까? 천천히 가지요.”
“음. 보아하니 속에 있는 말을 다 꺼내지 않은 거 같은데?”
“실은 그렇습니다.”
“뭔가?”
가장 쉬운 길에 대한 욕구가 꺼지지 않는다.
그래서 최영을 한 번만 더 찔러보기로 했다.
“...왜 이렇게 복잡하게 가시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이인임과 함께 가는지 물어보는 거지?”
최영은 냉수를 들이켰다.
“백만 대군이 이 나라를 위협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막아낼 것이네. 나는 백만 대군도 두렵지 않아. 그런데 100명의 재상을 감당하지 못하겠더라고. 그래서 이인임을 지지하는 것이네.”
“수시중을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을 찾으시면 되지요.”
“없네.”
“포은 정몽주는 어떻습니까?”
“그는 훌륭한 사람이지. 왕좌지재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그런데 왜 그는 안 됩니까?”
“훌륭하면 정치 잘 하나?”
왕선은 말문이 막혔다.
지금 눈앞에 있는 최영도 훌륭하다는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이다.
하지만 정치력의 부재를 호소하고 있다.
“그래. 맞아. 이 나라의 내일은 포은 정몽주가 이끌겠지. 그런데 그건 내일이야.”
“······.”
“비록 포은이 이인임을 싫어하지만, 이인임의 도당에서 많은 걸 보고 배울 것이야. 바로 경륜이지. 그렇게 포은은 고려의 내일을 책임질 수 있는 진정한 왕좌지재로 거듭나겠지.”
나름대로 고려를 생각한 구도이긴 한데, 실상은 말만 그럴 듯한 거다.
최영은 두 가지를 보지 못한 거다.
포은 정몽주의 역량과 이인임의 도당이 자행하는 패악.
그 결과 이런 어처구니없는 연립정권이 성립된 거고.
-혹시 아나? 자네가 이인임을 대체할 수 있는 사람으로 빠르게 성장할지.
아이고. 장군님.
왕선은 실소를 머금었다.
이 사람은 너무나도 방관자적 입장에 머물러 있다.
직접 나서서 더 나은 고려로 이끌 생각이 전혀 없다.
...그래도 최영이다. 이 사람이 결단해야 이인임이 정리된다. 그거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희한하군요.”
“무슨 말인가?”
“갑자기 수시중 이야기가 나와서요.”
“...자네가 먼저 꺼냈네.”
왕선은 펄쩍 뛴다.
“무슨 말씀입니까? 소직은 장군의 말씀에 맞장구를 쳤을 뿐입니다.”
“물이나 마시지?”
최영의 눈매가 가늘어지자 왕선은 냉큼 냉수를 들이켰다.
“포은 정몽주에 대해서 관심이 많나 보군. 한번 만나볼 텐가?”
“괜찮습니다. 인연이 된다면 만나겠지요.”
“어차피 개경에 있을 거라면 만날 수밖에 없긴 하지.”
“그러면 그때 만나는 거로 하겠습니다.”
“뜻대로 하게.”
“그러면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어디 가려고?”
왕선은 싱긋 웃었다.
“보고하러 가야지요.”
“고생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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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바쁜 하루가 아닐 수 없다.
최영의 사가를 나온 왕선은 곧장 이인임을 만나고자 걸음을 움직였다.
만남의 장소는 늘 같은 곳이었다.
“그래. 개경 생활은 이제 적응이 되나?”
“촌놈입니다. 번잡한 개경 생활이 쉽게 몸에 익을 수는 없지요.”
“그래도 더 머뭇거릴 수는 없지.”
“머뭇거리다니요?”
“이제 도당에 출사해야지?”
드디어 때가 온 거다.
왕선은 침착함을 유지했다.
“이끌어 주신다면 소직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거는 기대가 크네. 그나저나 신임 전주 목사 말일세.”
오늘 악재가 겹치는 날인가보다.
이인임이 던진 말에 왕선은 멈칫했다.
비록 두 사람만 있지만 주거니 받거니 말이 끊이지 않던 주막이다.
그런데 왕선이 멈칫하면서 대화의 흐름이 끊어졌다.
이인임이 내던지듯 물었다.
“왜 그러나?”
“아, 아닙니다. 혹시 염두에 두신 사람이 있습니까?”
왕선은 짐짓 여유를 부리면서 이인임의 술잔에 술을 부었다.
-하륜을 보내볼까? 이놈 반응도 궁금하군.
누구? 하륜? 이런 씨발.
왕선은 이 순간 최고의 임기응변을 발휘했다.
“송구합니다만, 소직이 천거해도 됩니까?”
“천거? 적당한 인사가 있나?”
이인임은 왕선을 슬쩍 보면서 말했다.
“하긴. 요즘 자네 집에 사람들이 많이 들락거렸지? 혹시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도 있던가? 그게 아니라면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을 받았던가.”
“언감생심.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습니다.”
“일단 말해봐.”
“처조카 사위에 하륜이라는 학사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인임은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를 숨기고자 술잔을 들어서 자연스럽게 가렸다.
-...이놈이 하륜을 견제하는군.
맞아. 하륜 견제해. 다른 의미로 견제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전주 목사 먹으면 전주 뺏길 것 같거든.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미륵 행세를 제대로 내서 전주를 종교 해방구로 만들어버릴 것 그랬다.
“하륜의 재주가 남다르다고 하더군요.”
술잔을 내린 이인임은 옅은 미소를 보였다.
“하륜은 내 곁에 있어야 하네. 그는 내 장자방이거든.”
입과 눈이 미소를 보인다.
그러나 진짜 웃는 건 아니다.
왕선은 몸을 납작 엎드렸다.
“송구합니다. 전주관청이 무능한 인사의 손에 들어가길 원치 않았습니다.”
“술이나 따라봐.”
“예, 예.”
술병의 술이 이동하는 걸 보던 이인임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하륜 말고 천거할 만한 사람은?”
“송구합니다.”
“그러면 더 생각해볼까?”
“그래도 되겠습니까?”
-이놈 봐라? 이제보니 전주를 제 지지기반으로 삼으려는 거군. 하륜을 거론한 것도 내가 보내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그런 거야.
왕선은 곧장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현 고려의 군부는 너무나도 많은 숙장이 있습니다. 소직이 비집고 들어가서 입지를 제대로 다지라면 명확한 기반이 필요합니다.”
참으로 신통방통했다.
어찌 이렇게 속을 잘 알아맞힐까?
이인임은 왕선이 희한했다.
또 마음에 들었다.
이런 사람은 하륜 이외에 처음이다.
“전주를 원합니다.”
하긴. 도당과 군부에서 제 역할을 해주려면 왕선도 제법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아무런 가문의 후광도 없는 왕선이다. 그러면 전주라는 지역적 기반을 갖추고 있는 게 좋다. 들어보니 짧은 기간 전주에서 제법 힘을 키운 거 같기도 하다.
“신임 전주 목사 물색. 일단 보류하지.”
“감사합니다.”
“자네도 후임자를 물색해봐.”
이건 전권을 준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신임 전주 목사에 왕선의 사람을 꽂아 주겠다는 뜻.
“한잔 받으십시오.”
“좋지.”
이인임을 보낸 뒤 왕선은 취기가 확 올라오는 걸 느꼈다.
“아오.”
음흉한 속내를 숨기고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이고자 술을 제법 마셨더니 이랬다.
“그나저나 복잡하게 흘러가는군.”
전주 목사는 해결했으나 도당 입성이 문제다.
일이 고약하게 흘러갔다.
원래 도당 입성을 늦췄다. 도당의 재상이 되면 전주가 남의 손에 들어가니까.
그런데 오늘 전주를 지켰으나 도당 입성이 늦어지게 됐다.
이인임이 별말은 안 했으나 반드시 그리할 거다.
골치 아프다.
전주를 지켜낼 수 있으면 도당 입성은 빠를수록 좋은데.
그래야 왕도 만나고 태후도 만나서 원대한 포부를 알릴 수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면 좋을 건 하나도 없다.
이인임의 그림자만 짙게 뒤집어쓸 뿐이니까.
고민이 깊어질 때였다.
-터턱
지나치던 행인과 어깨가 부딪쳤다.
“아. 미안하...”
“거. 똑바로 좀 보고 다닙시다.”
“뭐요?”
-아. 바쁜데 이 새끼 뭐야?
왕선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졌다.
“초면에 욕?”
아차차.
너무 황당해서 헛말했다.
“허. 당신 미쳤소? 내가 언제 욕했소? 괜한 사람 잡고 시비 걸지 마시오.”
그러더니 행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당신 술 마셨소?”
“허. 마셨으면?”
“시국이 이리도 수상하거늘. 술이 넘어가오?”
“뭐요?”
“안주는 뭘로 먹었소? 괜찮은 거 먹었소? 맛있었소?”
“하. 이보시오.”
“의관을 보아하니 방귀깨나 뀌는 집안 자제인 거 같은데. 참 태평하오?”
실로 엄청난 파상공세.
왕선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바빠 죽겠는데 별 시답잖은 놈이 시비를 걸어가지고.
“조심합시다? 각박한 세상에?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 시비 걸지 말고? 내가 바쁘고 고상해서 그렇지 한가하고 성격 더러운 인간 만났으면 당신 봉변당하오. 알겠소?”
자기 어깨를 툴툴 털던 행인은 그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왕선은 눈만 껌뻑였다.
...뭐 저런 미친놈이 다 있어? 살다 살다 저런 놈은 처음이다.
눈 감으면 코 베어 가는 개경이라더니.
난세로다. 난세로다.
왕선과 멀어진 행인은 연신 바쁘게 발을 옮겼다.
“말세야. 말세. 젊은 놈이 술이나 퍼먹고 다니고.”
어느새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삼봉.”
“아. 미안하네. 조금 늦었어.”
“이 사람아. 진작에 와 있었네.”
“미안하네. 일이 좀 있어가지고.”
“그래서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나?”
정도전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한량 놈을 만났는데 시비를 걸더라고. 새파랗게 젊은 놈이 말이야. 건방지기가 이를 데 없는 놈이야.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더군.”
“하하. 그랬나? 어떤 사람이었길래.”
“자네가 알 필요는 눈곱만큼도 없을 거야. 자네의 고결한 정신세계에 그런 똥보다 못한 놈을 넣을 수는 없네. 그건 자네를 욕되게 하는 짓이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그럴 수는 없지. 그러니 신경 쓰지 말게. 나도 잊어버릴 거야.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이 분명했거든. 적당하게 살다가 비참하게 죽을 놈이었어. 다시는 볼 일 없을 거야.”
“하하. 삼봉 자네가 그랬다면 그런 거지. 어서 가지.”
정도전은 히죽이면서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하게 한잔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건 어떤가?”
“마음대로 하게.”
“역시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포은 자네밖에 없어.”
“됐네. 이 사람아.”
“어서 가세. 내가 기가 막힌 곳을 알아놨어.”
정몽주는 가장 신뢰하는 벗을 보면서 넉넉한 웃음을 지었다.
< 29화 길에서 만난 행인(제목 수정)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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