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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28화 (28/187)

< 28화 개경 >

“참으로 고생했네.”

“전주 목사로서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왜구를 격멸하는 건 당연히 할 일이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닐세.”

연신 칭찬을 아끼지 않는 최영.

이대로 있으면 얼굴에 금이라도 칠할 기세다.

왕선은 싱긋 웃으면서 무언가를 내밀었다.

“차린 게 보잘것없습니다. 일단 드시지요.”

“정말 보잘것없군.”

“하하하.”

왕선이 내온 건 냉수 한 그릇이었다.

일전에 최영의 사가를 방문했을 때 대접받은 걸 그대로 내온 거다.

“일전에 마음이 많이 상했나 봐?”

“하하하. 아닙니다. 그때 소직이 많은 걸 느꼈지요.”

“가르침을 얻었다고 하니 다행이군.”

“항상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해서, 오늘도 가르침을 따라야지요.”

“그런가?”

“장군께서 먼저 시원하게 드십시오.”

“다 마시면?”

“소직은 장군께서 왜구 격퇴만 생각하고 전주에 오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눈치가 백 단일세?”

“난세가 아닙니까. 눈치가 빨라야지요.”

최영은 냉수를 들이켰다.

왕선이 힐끗 보니 이번에도 절반 정도 없어졌다.

“개경으로 오게.”

“개경이요?”

“개경으로 와서 나를 거들게.”

“장군. 소직은 전주에서 할 일이 많습니다.”

“이만하면 됐어.”

“예?”

“이 정도면 자네 능력이 충분히 증명됐어. 걱정하지 말게.”

“아.”

왕선은 당황했다.

돌아가는 사정을 보니까 훤하다.

최영은 왕선이 전주 목사로서 능력을 입증하고자 한다고 생각하는 거다.

“자네에게 재상의 자리를 내주더라도 반대할 사람은 없을 걸세. 내가 장담하지.”

“장군.”

“나는 말과 능력이 다른 사람을 경멸해. 하지만, 자네는 말을 내뱉을 만한 최소한의 능력을 보인 거야. 바로 이 최영에게 말이야.”

말?

...최영의 눈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그래. 맞아. 자네는 미칠 자격이 충분해.”

역시.

“북진. 그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입에 담을 만했어.”

북진. 그것이 최영을 이토록 열광케 만든 거다.

“만일 능력도 부족한 인사가 북진을 입에 담았다면 나를 희롱한다고 생각했을 거야.”

“만일 그랬다면요?”

“단칼에 죽였을 거야. 이 시대 고려에서 북진은 감히 함부로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

“정략적으로 이 나라의 국시를 이용하는 게 아닌가.”

...정략적으로 이용한 거 맞다.

물론 왕선은 입 밖으로 꺼낼 용기는 없다. 그랬다가는 진짜 최영의 칼에 죽을 수도 있으니까.

“다시 말하지. 개경에 와서 나를 거들게.”

“아.”

최영은 왕선의 고민 따위는 전혀 관심이 없다.

“뭔가? 왜 뜸을 들이지?”

“아. 그것이 아니라.”

“자네처럼 전도유망한 젊은이가 개경에서 새 바람을 일으켜야지.”

“아.”

“새바람. 그래. 새바람이지. 광기가 가득한 새바람. 개경에서 요동으로 향하는 바람.”

좋다. 그래. 북진이든 남진이든 다 좋다.

애초 먼저 말을 꺼낸 건 사실이니까.

그런데 지금 이 꼴로 무슨 북진인가.

“장군. 미친 바람이 북으로 올라가려면 조정은 멀쩡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네를 개경으로 부르는 것이네.”

“예?”

“내가 있는 힘껏 지원해 줄 테니 어디 마음대로 해봐.”

왕선이 최영의 눈을 지그시 쳐다볼 때

“실은 수시중도 자네를 마음에 들어서 하더군. 나와 수시중이 거들면 자네는 도당의 핵심이 될 거야. 하하하. 좋군. 좋아.”

최영의 웃음.

왕선도 따라 웃었으나 속은 복잡하고 머릿속은 빠르게 돌아갔다.

결국, 최영은 이인임을 제거할 생각이 없다.

참 웃긴다. 나라를 거덜 내는 권신을 그대로 두고 대체 무슨 북진을 거론하는 걸까?

진짜 북진을 꿈이 아닌 현실로 이루고 싶다면 수십 년을 내다보고 일을 도모해야 하거늘.

“내 죽기 전에 미친놈 소리 한번 들어보려고.”

당신 진짜로 미쳐서 요동에 칼 밀어 넣는 사람이야.

진짜 미친 거지.

왕선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북진을 하려면 이대로는 곤란합니다만.”

다시 찔러보는 거다. 대화의 방향을 틀어보려고.

그런데 최영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보게. 왕선.”

“예.”

“애쓰지 말고 그냥 가지?”

“예?”

“어차피 거절한 권한이 없다는 건 잘 알 건데?”

“······.”

“자네 머리 굴리는 소리가 내 귀에도 들린다는 말일세.”

“...그랬습니까?”

“수시중 이인임이 고려를 갉아먹는다고 생각하나?”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지. 그가 고려를 갉아먹을 수도 있어. 그런데 이인임이 없으면 고려는 무너져.”

“그렇지요.”

“참 태세 전환 빠르군.”

“태세 전환이 빠른 게 아니라 원래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장군께서 지레짐작하신 겁니다.”

최영은 슬쩍 쳐다보더니 냉수 그릇을 들었다.

“일전에 자네가 자리를 일어나는 바람에 하지 못했던 말일세.”

왕선은 속으로 웃었다.

우직한 줄만 알았는데 거짓말도 한다.

그때 최영은 왕선에게 재상직을 내어줄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냥 북진에 꽂힌 상태였으니까.

그래서 그때 그냥 일어났지 않은가.

“일전에 답하지 못한 건 이걸로 하겠네.”

그래도 따지고 들 수는 없다.

관심법을 밝힐 수도 없는 마당에 본인이 그렇다는데 어쩌겠는가.

만만한 인사면 우기기라도 할 건데 상대는 무려 최영이 아닌가.

“그리 알겠습니다.”

“그래. 아쉬워하지 말게.”

“전혀요.”

최영은 냉수를 모두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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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선생.”

“예. 주공. 개경으로 가신다는 소식은 전해 들었습니다.”

“그게 그렇게 되었소.”

“감축드립니다.”

“일이 고약하게 풀려버렸는데 감축은 무슨.”

전녹생은 빙그레 웃었다.

“편히 다녀오십시오.”

“전주. 전 선생만 믿겠소.”

“심려치 마십시오.”

죽 쒀서 개 줄 수는 없다.

그동안 전주에 들인 공이 얼만데.

어쩔 수 없이 전주를 비우게 되었으나 전녹생이라면 공백을 잘 메꿀 것이다.

또, 신임 목사가 오더라도 주도권을 뺏기지 않고 능수능란하게 대처할 거다.

“그런데 표정이 아주 어둡지는 않습니다?”

“뭐. 어차피 한번은 다시 가봐야 했으니까. 그게 당겨졌다고 생각하는 거요.”

어차피 이대로라면 이인임은 무탈하게 집권을 이어갈 거다.

최영은 요동 정벌을 할거고,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할 거고.

아직 전주 목사 왕선의 개입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준이 아니니까.

가만히 지켜보면서 이대로 전주의 힘을 키운다고 한들 뭐하겠는가.

안 그래도 고민이 많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개경을 가보는 게 좋을 수도 있다. 가면 생각지도 못한 수가 생길 수도 있다.

“아. 전주 이씨 이문정 말이외다.”

“잘 관리하겠습니다.”

“역시.”

“아. 천목 말입니다.”

“잘 관리하겠소.”

“과연 주공이십니다.”

왕선과 전녹생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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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를 격퇴한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왕을 만날 일은 없었다.

왕이 정상적인 역할을 한다면 전주 목사 얼굴이라도 보자고 하겠으나 그런 상황이 아니다. 최영이 왕을 알현하면서 전주 목사의 공이 거대했다고 잘 말해주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비록 왕을 만나지는 못했으나 홀대당한 건 아니다.

왕보다 강한 권력을 가진 이인임의 부름을 받았으니까.

“오랜만이군.”

“시중 어른이 부르신다길래 산해진미를 기대했는데 주막이라니.”

이인임이 불러낸 곳은 처음 만난 주막이었다.

“이 정도면 진수성찬이지.”

“하긴. 최영 장군 냉수 그릇보다는 백배 천배 좋습니다.”

“이제야 바른말을 하는군.”

이인임은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인다.

왕선은 그를 슬쩍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소직을 부르셨다고요?”

“최영 장군이 별말 안 하던가?”

“와서 거들라고 하던데요?”

“누구를? 본인을?”

“예. 본인. 최영 장군.”

이인임은 술을 한잔 걸치면서 시원한 미소를 보였다.

-이놈 봐라? 나와 최영 사이에서 줄타기하는데?

...사실대로 말했는데 어째서 이런 결론이 나오는 걸까?

“희한하군.”

“무슨 말씀입니까?”

“최영 장군이 그런 말을 쉽게 할 사람이 아니라서.”

...아. 보아하니 내가 없는 말을 지어냈다고 생각하는구나.

-최영이 한 말을 모두 내게 전한 이유가 뭘까?

...이건 또 뭘까? 그대로 전했다고 의심하는 건가?

도저히 이 능구렁이의 속을 알 수가 없다.

이럴 때는 그냥 내질러 버리는 게 답이다.

“북진.”

“뭐?”

“소직은 북진을 품에 안고 있는 사람입니다.”

“...뭐?”

“최영 장군께서 호의를 품으실 수밖에 없지요.”

이인임의 눈빛이 대번에 변했다.

“자네 미쳤나?”

“아직은 멀쩡합니다.”

“지금 나는 자네와 말장난 하는 게 아닌데?”

“있는 대로 말씀드린 겁니다.”

이대로 있으면 개경에 뼈를 묻어야 한다. 그건 곤란하다.

개경으로 오는 내내 생각했다.

이 난국을 돌파할 방법이 뭐가 있을까?

아니 정확하게 최영을 움직일 방법이 뭐가 있을까?

더 정확하게 이인임과 최영의 사이를 틀어지게 할 방법이 뭐가 있을까?

이 어색한 두 사람의 공존을 끝장낼 방법....이 뭐가 있을까?

방법은 딱 한 가지다. 고려가 최영을 움직이게 하는 거다.

첫째로 고려를 상징하는 단어. 북진.

둘째로 고려를 상징하는 존재. 군왕.

끝으로 고려를 상징하는 가문. 왕씨.

북진은 던졌다. 남은 건 군왕과 왕씨 가문의 최고 어른 명덕 태후를 만나는 거다.

...그러나 이는 이인임이 허락해줘야 한다. 만일 그가 허락하지 않은 만남이 성사되더라도 엄청난 압박과 감시가 진행될 터. 그때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건 만나지 않는 게 더 좋다. 이인임의 의심만 심해질 거니까.

그러면 답은 하나다. 전주가 다른 사람의 손에 송두리째 넘어가기 전에 이인임의 마음을 완벽하게 잡아야 한다.

“꺼내봐.”

“예?”

“최영 장군을 북진으로 홀렸다며? 그러면 나는 어떻게 홀릴 거지?”

“······.”

“설마 그 정도 준비도 없이 나를 만나서 그런 말을 내뱉은 건 아니겠지?”

이인임의 눈빛은 굉장히 서늘했다.

...피부가 시릴 정도로.

왕선은 어깨를 좁히면서 몸을 내밀었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직이 군부의 수장이 되겠습니다.”

“뭐?”

“10년 내로. 최영 장군의 모든 걸 가지겠습니다.”

“이봐.”

“수시중 어른의 이 불안한 동거를 소직이 끝내겠다는 겁니다.”

최영을 흔들고자 북진을 꺼냈다.

왜? 그는 북진을 갈망하니까?

이인임을 흔들고자 무소불위의 권력을 꺼낸다.

왜? 그는 최영과의 연립 정권을 불안해하니까.

그런데 지금 왕선이 최영의 힘을 10년 내로 가져오겠다고 한 거다.

이인임의 공고한 권력을 위해서.

왕선이 수장으로 있을 군부는 이인임의 수족이 될 거니까.

한참 동안 아무런 말이 없다.

여전히 불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왕선은 돌아가는 사정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고개를 들어서 이인임의 눈이라도 볼 수 있다면 속내를 읽을 수 있으나 지금으로서는 어렵다.

“한잔할까?”

웃음이 묻어 있는 목소리.

왕선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이인임의 눈과 마주쳤다.

“북진?”

“예.”

“전폭적으로 지원하지. 최영 장군과 합을 잘 맞춰봐.”

반드시 군부를 장악하라는 말이다.

그래서 자신의 손바닥에 올려보란 말이다.

이인임이 술병을 내밀었다.

왕선은 공손하게 술잔을 들었다.

“그리하겠습니다.”

“아. 그런데 북진하려면 먼저 처리해야 하는 게 있다는 거 알지?”

북진은 최영의 눈과 귀를 홀릴 수단에 불과하다.

당장이라도 압록강을 건너려고 하는 일이 발생하면 억제할 명분이 필요하다는 거다.

왜? 이인임은 북진을 꿈꾸지 않으니까.

“물론입니다.”

바로 당신 죽이는 거지.

왕선은 빙그레 웃었다.

“남방의 왜구가 이토록 기승인데 북진은 조금 미뤄야지요.”

“하하하. 그래. 나는 자네가 팔도 도통사가 되어 압록강을 건너는 걸 보고 싶군.”

당연히 빈말이다.

담긴 뜻은 하루라도 빨리 군부를 장악하라는 말이다.

“반드시 이뤄내겠습니다.”

< 28화 개경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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