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우리의 미륵이 되어주십시오 >
왜구는 전주성을 향해서 거칠게 진군을 시작했다. 빠르게 포위할 기세였다.
그때 전주성 성벽이 환하게 밝아졌다. 사방에서 연이 휘날렸는데 불을 붙인 거다.
좌평련은 미간을 찌푸렸다.
“저놈들이 무슨 수작질이지?”
곰곰이 생각하던 좌평련은 멈칫했다.
“전주성의 포위를 풀었을 때 경계를 벗어난 고려군이 있나?”
“송, 송구합니다. 미처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뭐라고?!”
“송, 송구합니다.”
좌평련은 버럭버럭 화를 냈다.
“만약 고려군이 외부와 연결했다면?”
“어디와 접할 수 있겠습니까. 인근에 있는 고려군은 아군이 모두 격멸했습니다.”
“이 멍청한 놈아. 등경광을 잠입시킨 걸 파악한 전주 목사다. 그놈이 곧장 개경에 사람을 보냈다면 지금쯤 대군은 아니더라도 일정 수준의 원군이 당도할 가능성도 있어!”
부관의 낯빛은 사색이 됐다.
“빌어먹을. 저건 군사적 행동을 알리는 신호가 분명하다. 아군이 성벽을 공격할 때 적의 원군이 후미를 노릴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야!”
좌평련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애초 성벽을 완벽하게 포위했다면 전주성과 외부가 연락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작전을 펼칠 때 포위가 풀렸다. 만일, 그 틈을 타서 근처에 당도한 원군과 소통했다면?
부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좌평련은 거칠게 외쳤다.
“젠장! 물러난다!”
“알, 알겠습니다!”
그때
“대, 대장님. 적의 원군을 포착했다고 합니다!”
“비, 빌어먹을. 서둘러 물러난다! 양쪽에서 포위당하면 개죽음이야! 일단 익주로 물러나서 싸운다. 어서!”
“알겠습니다!”
좌평련의 빠른 판단으로 왜구는 곧장 회군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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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선은 수백 명의 관민과 숨죽인 채로 매복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좌중을 압도했다.
그 위력이 어찌나 거대한지 이성을 마비시킬 정도였다.
정신이 아찔해질 것만 같다.
“목, 목사 나리.”
“쉿.”
왕선은 이를 악물며 이성을 부여잡았다.
그 역시 이 엄혹한 상황을 여유롭게 즐기는 건 아니었다.
그때 군마의 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긴장감이 내렸다.
왕선은 오른손을 들었다.
그 즉시 모든 관민이 병장기를 고쳐 잡았다.
손에 진땀이 났다. 그러나 짙은 어둠이 세상을 지배하는 밤이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옆 사람에게 보이지 않으니까.
왕선은 매섭게 왜구의 움직임을 노려봤다.
...다가온다.
...다가온다.
...지척이다.
왜구의 대열 대가리가 작전 지형에 들어섰다.
...조금만 더
...어서 빨리 지나가란 말이다.
순식간에 대열의 몸통이 들어섰다.
왕선은 오른손에 힘을 잔뜩 실었다.
그런데
-챙강!
엄숙하기 이를 데 없는 매복대열에 굉장히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왕선의 눈이 곧장 움직였다.
“!!!”
수십 명의 관민이 들고 있던 병장기를 흘린 거다.
왕선의 미간은 와락 찌푸려졌다.
황급히 왜구의 대열로 시선을 돌렸다.
“!!!”
그들의 시선이 매복한 지형을 향하고 있다.
...굉장히 어색한 상황.
...인간의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매복한 왕선과 왜구의 시선이 마주쳤다. 양측 모두 그대로 움직임이 멎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 불합리한 상황은 황당함 그 자체였으니까.
-...저건 뭐야?
왜구들은 헛웃음을 지을 정도다.
그리고
“미륵이시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고려 관민이 들고 있던 농기구와 병장기를 던지고 오열했다.
왕선은 참담했다.
...훈련조차 제대로 되지 못한 관민이다. 아무리 훌륭한 작전을 입안했더라도 막상 마주한 적의 강군 앞에서는 전의를 잃어버렸다. 말 그대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미친놈들이네?
왜구들은 히죽거리면서 칼을 천천히 움직였다.
“미륵이시여!”
“왜구를 물리쳐주소서!”
관민들은 여전히 미륵 타령이다.
“옴마니 반메홈!”
“옴마니 반메홈!”
“옴마니 반메홈!”
급기야 주문을 외친다.
그런데
-뭐, 뭐야? 무, 무슨 상황이야?
왕선은 참담함을 걷어냈다. 들고 있던 무기를 던지고 저 난리를 치는 관민을 이끌고 싸우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지금 수백 명의 관민이 외치는 주문은 기괴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왜구의 당혹감이 커지고 있다. 그러면 지금 할 수 있는 행동을 해야 한다.
혹시나 해서 대동한 역관에게 눈짓했다.
그리고
“나는 미륵이니라!”
외쳤다.
역관이 악을 쓰면서 따랐다.
“私は 弥勒だ”
-...미친놈들이었군.
왜구는 비웃었다. 씨알도 안 먹힌 거다.
급기야 황급히 도주하던 그들은 여유를 되찾았다. 고작 이 정도가 고려군이 준비한 매복이라면 이렇게 물러날 이유가 없으니까. 부관 한 명이 히죽거리면서 다가왔다.
“미친놈들. 뭐. 미륵? 큭큭.”
왕선의 심장이 벌렁였다.
그러나 물러날 수 없다.
...등 뒤에는 여전히 오열하는 관민이 있으니까.
“옴마니 반메홈.”
“옴마니 반메홈.”
...저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미륵의 권능만을 바라고 있다.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묘하게 거슬리는군.
왜구의 부관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외쳤다.
“더럽게 시끄럽네!”
젠장!
왕선은 들고 있던 칼을 뽑았다. 일단 버텨야 한다. 아직 이게 끝이 아니다. 버틴다.
왜구가 칼을 들고 달려올 때였다.
-퍼어어어억!
그의 정수리에 낫이 박혔다.
왕선이 황급히 돌아봤다.
농민 한 명이 부들부들 떨면서 외쳤다.
“미, 미륵이시여. 소인이 마군이를 죽였습니다!”
...진짜 잘했어.
그 순간 저 멀리서 거대한 함성이 들렸다.
“와아아아아아아!”
관민과 왜구의 시선이 쏠렸다.
“!!!”
수백 개의 횃불이 운집했다.
왕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전녹생이다! 전주성에 남아 있던 그가 위장 작전을 잘 수행해낸 거다.
“적, 적의 원군이다!”
그리고 왜구의 선두에서 병장기 충돌음이 들렸다.
“적, 적이다!”
기겁한 왜구는 다급하게 움직였다.
왕선과 관민을 신경 쓰지 않고 최대한 빠르게 물러났다.
왕선이 이끄는 오합지졸은 빼고, 횃불을 든 적과 선두를 공격하는 적군은 육안으로 보더라도 천명은 넘는다. 이렇게 포위된 채로 싸우면 궤멸적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순식간에 왜구는 퇴각했다. 그야말로 정예군이었다.
“형님!”
“천목!”
그랬다. 선두를 공격한 고려군은 바로 마천목이었다.
왕선은 정신을 똑바로 부여잡았다.
“천목! 당장 추격해! 한 명이라도 더 죽여!”
거칠게 명령을 내렸다.
“당장!”
“알겠습니다!”
마천목은 관군을 이끌고 곧장 추격에 나섰다.
그리고 왕선은 이를 갈면서 뒤를 돌아봤다.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로 오열하는 관민이 보였다.
매섭게 그들을 노려보면서 거친 발걸음으로 이동했다.
“미륵이시여! 왜구가 물러났습니다!”
“과연 미륵이십니다!”
관민은 여전히 미륵 타령.
왕선의 걸음이 멈췄다.
그리고
-촤악!
그대로 싸대기를 날렸다.
좌중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 조용해졌다.
모두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미, 미륵이시여.”
“닥쳐.”
“!!!”
왕선은 양손을 뻗어서 그의 멱살을 잡았다.
“미, 미륵이시여.”
“닥쳐!”
“!!!”
“정신 차려. 똑바로 봐. 내가 누구로 보여.”
“미, 미륵이십니다.”
왕선은 손에 힘을 주면서 죽일 듯 노려봤다.
“똑바로 말해! 똑바로 보라고! 내가 누구야!”
“어, 어찌 이러십니까?”
“내가 미륵이야? 아니면 전주 목사야?”
“미, 미륵이 아니십니까?”
“똑바로 보라고 했다.”
왕선의 눈과 마주친 백성은 오금이 지릴 정도였다.
왜구와 부딪혔을 때도 이 정도로 두렵지는 않았다.
“전, 전주 목사 나리십니다.”
“그래. 나는 전주 목사 왕선이야.”
왕선은 내던지듯 멱살을 풀었다.
“잘 들어. 미륵은 도솔천에서 하생하는 게 아니다. 바로 너희가 만드는 거다.”
“!!!”
“미륵? 지랄하지 마.”
“!!!”
“내가 미륵을 참칭한 게 아니라 너희가 나를 미륵으로 만든 거야.”
“!!!”
“미륵? 그딴 건 없어.”
충격에 휩싸인 관민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그러나 미륵이 되고자 한다.”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불국정토. 그게 너희가 미륵을 기다리는 이유 아니야? 일한 만큼 입에 풀칠할 수 있으면 그게 불국정토지. 그걸 만들어주면 미륵이지.”
“!!!”
“내가 그걸 해준다고. 내가 전주 목사로 있는 전주에서. 너희가 먹고살 전주에서. 너희 자식들이 살아갈 전주에서.”
왕선의 어조는 점차 커졌다.
“바로 여기에서! 불국정토를 구현해보겠다고. 너희가 원하는 미륵? 그게 내가 한다고.”
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그래서 너희 입에서 나오게 하겠다. 불국정토도 안 부럽고, 미륵은 기다리지도 않는다는 말. 그 말이 나오게 하겠어.”
관민들의 분위기는 묘해졌다.
“너희가 원하는 세상. 그걸 원하면 당장 움직여.”
왕선은 어조는 다시 거칠어졌다.
“내가 진짜 미륵처럼 이 땅을 불국정토로 만드는 걸 보고 싶으면 주문이나 염불 따위는 그만 외쳐. 그건 땡중들이 외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관민들은 멍하게 왕선만 쳐다봤다.
“창칼을 든 적이 눈앞에 있는데 가진 농기구, 병장기 집어 던지고 병신처럼 질질 짜지 말고. 움직여. 가서 싸워.”
왕선은 내질렀다.
“이 땅은 미륵이 지켜주는 게 아니라 너희가 지키는 거야. 대장경을 만들고, 불경을 외치고 생지랄을 해도 적은 멀쩡해. 오직 너희가 휘두르는 창칼로만 물리칠 수 있어. 알아둬. 미륵은 없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나 너희가 미륵을 만들 수 있다. 선택할 수 있다.”
끝을 맺기로 했다.
오른손을 내밀었다.
“나는 미륵이 되고자 한다. 결심했다. 너희는?”
다시 물었다.
“이 땅을 지킬 준비가 되어 있나?”
그러자 거대한 외침이 울렸다.
“우리의 미륵이 되어주십시오!”
“우리의 미륵이 되어주십시오!”
“우리의 미륵이 되어주십시오!”
왕선은 싱긋 웃으면서 화답했다.
“허락하지.”
오른손을 하늘을 향해서 들었다.
“전군.”
등을 돌리고 힘껏 오른손을 내던졌다.
“진군!”
“우와아아아아아!”
“우와아아아아아!”
< 26화 우리의 미륵이 되어주십시오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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