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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25화 (25/187)

< 25화 작전 그리고 작전 >

미륵을 참칭하여 관민의 사기를 최고조로 끌어 올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당장 왜구를 격멸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평생 창칼을 들고 전장을 누빈 정예군을 상대로 농기구만 만지던 농민이 덤벼드는 건 실로 어리석은 짓이다.

하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관민이 일심단결하여 전주성을 굳건히 지켜냈다.

있는 힘껏 악을 쓰면서 전주성을 사수하는 것이 원래 전세였다면, 지금은 상대적으로 여유롭다. 그러다 보니 왜구는 전주성을 우회하여 노략질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왜구의 발목을 전주성에서 잡아챈 것이다.

충분한 성과였다.

그런데도 아쉬움이 크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청야전술이라도 해보는 건데.”

“임피, 김제, 부안, 익주가 이렇게 허망하게 점령당할 줄은 몰랐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왜구가 장악한 군현은 최대 곡창 지역으로 손꼽히는 지역이다. 보급에 문제가 있을 리는 없다. 그러니까 지금 청야전술은 제 살을 갉아 먹는 짓에 불과하다.

“관민의 사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한 번의 공세도 막아내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처럼 튼튼하게 막아내지 않습니까. 이대로라면 원군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습니다.”

마천목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원군이 오긴 온다. 다만, 언제 올지 가늠할 수 없다는 거다.

철통같은 왜구의 진영을 뚫고 전주성에 소식을 전할 방법이 없기에 깜깜히 모르는 상태인 거다.

“원군보다 중요한 건 지휘관. 누가 대군을 이끌고 오는지에 따라서 결과는 완전히 바뀔 거야.”

“최영 장군이 오시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건데.”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최악을 염두에 두고 전장에 임해야겠지.”

“형님께서 생각하시는 최악은 어떤 겁니까?”

왕선은 성 밖 왜구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원군이 늦거나 오지 않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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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죽지세의 진군이 전주성에서 막혔다.

왜장 좌평련은 답답한 듯 연신 고함을 질러댔다.

“한시라도 빨리 전주성을 장악해야 한다. 한데, 왜 이렇게 속도를 내지 못하는 거야!”

“송구합니다. 한데, 고려군의 저항이 매섭습니다.”

“하. 그래 봤자. 관군 500명과 농사나 짓던 놈들이 덤비는 상황이야.”

틀린 말은 아니다.

부관들 역시 전주성을 어렵지 않게 함락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으니까.

“대장님. 고려군이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이대로 가면 원군이 도착할 겁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야. 물론 어차피 오합지졸이 분명할 적의 원군이 두려운 건 아니지만 굳이 피할 수 있는 전투를 할 필요는 없어.”

“음. 해서 작전을 짜는 게 어떻습니까?”

“작전?”

“음. 전주성의 고려군도 원군을 기다리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적의 원군이 온 것처럼 소란을 피우는 겁니다. 하면, 전주성의 고려군이 냉큼 달려 나오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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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적군의 움직임이 이상합니다.”

마천목의 말대로 흉흉한 살기를 뿜어대던 왜구가 우왕좌왕한다.

급기야 성의 포위를 황급하게 풀고 물러난다.

“형님. 혹시 원군이 온 게 아니겠습니까?”

“원군?”

“예. 원군이 분명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왜구가 물러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음.”

“형님. 지금이라도 성문을 열고 공세를 펼치는 건 어떻습니까?”

“음.”

왕선은 머뭇거린다.

마천목은 의아한 듯 물었다.

“혹시 게름 찍 한 부분이라도 있습니까?”

께름칙하긴 하다.

마천목의 말이 틀려서 그런 게 아니라 상황이 너무 절묘해서 그랬다.

평소 관심법으로 돌아가는 사정을 정확하게 파악한 뒤 움직이던 왕선이다.

그래서 불확실한 상황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천목아. 왜구의 함정일 가능성은 없을까?”

“음.”

“만일 그렇다면 큰 낭패를 볼 거야. 반대로 정말 원군이 당도한 거라면 반드시 사람을 보낼 거야. 그러지 못하더라도 하루만 지나면 정확한 내막을 알게 되겠지.”

“음.”

마천목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형님. 이렇게 하시죠.”

“좋은 방도가 있느냐?”

“소제가 관군을 이끌고 나가겠습니다.”

“천목아.”

“정말 왜구의 작전이라면 아군이 성문을 열고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뭔가 생각이 있는 거 같다.

왕선은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마천목은 마른침을 넘기면서 생각한 바를 모두 말했다.

왕선은 몇 번을 생각했다. 그리고 결정했다.

“천목아.”

“예.”

“...미륵장사는 한 번의 패배로도 망할 거야. 알지?”

“잘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네가 이끌고 갈 관군은 전주성의 유일한 정예군이다. 즉, 실패할 경우 전주성은 순식간에 와해 될 거야. 아무리 미륵을 팔아대도 왜구조차 막아내지 않는 미륵이 무슨 신뢰를 얻을 수 있겠느냐.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반드시 성공하겠습니다.”

왕선은 마천목의 어깨를 두들겼다.

“너에게 전주성의 운명이 달려 있다.”

마천목은 강건한 결의를 보이면서 창을 고쳐잡았다.

“무운을 빌겠네.”

그 즉시 마천목과 관군 500명이 전주성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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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대장님. 전주성이 열렸습니다.”

좌평련은 반색했다.

“그래? 얼마나 나왔지?”

“족히 500명은 될 겁니다.”

“오. 그러면 관군이 거의 다 뛰쳐나온 거군.”

“그렇습니다.”

“좋아. 작전 지역까지 끌어내서 일망타진하는 거야.”

“흐흐. 걱정하지 마십시오. 모든 준비가 완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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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 왜구가 황급히 도주합니다.”

마천목은 전황을 유심히 살폈다.

“일단 따라붙는다.”

“알겠습니다.”

관군은 도주하는 왜구의 후미를 맹렬하게 공격했다.

한참을 뒤쫓다 보니 제법 많은 왜구의 목을 벴다. 족히 100명은 제압한 거 같다.

“허겁지겁 도망치는군요. 이대로 원군을 만나면 대승입니다.”

“그래. 허겁지겁 도망치는군.”

마천목은 진한 미소를 지었다.

부관의 말대로 이대로 진군하면 대승을 거둘 수 있을 것만 같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그러나 왕선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적의 작전일 가능성이 크다. 반드시 명심해.]

...갈등이 치민다.

...그리고 피가 끓어 오른다.

닥치는 대로 적의 목을 베고 싶다.

“대장. 이대로 추격하겠습니다.”

부관의 외침.

마천목의 이성은 본능에 잠식되기 시작했다.

그때, 왕선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왜구의 움직임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마천목의 눈이 도주하는 왜구로 향했다.

...참으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줄곧. 마치 쫓아오라는 듯.

냉정하게 상황을 살피면 적의 계책이다.

“대장. 어서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마천목은 이를 악물었다.

“퇴각.”

결국, 이성이 본능을 억누른 거다.

“예?”

“퇴각해서 전주성을 우회한다.”

“알, 알겠습니다.”

그리고

“자네는 백 명을 이끌고 전주성으로 돌아가고.”

“예?”

“어서!”

“알,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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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고, 고려군이 물러났습니다. 아무래도 눈치를 챈 것 같습니다.”

“젠장!”

애꿎은 병사 백 명만 잃었다.

좌평련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성안으로 들어갔어?”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보입니다? 확실하게 말해!”

“예, 예. 성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빌어먹을.”

작전을 입안한 부관은 눈치만 살폈다.

“괜히 고려놈들 사기만 올려줬군.”

“송구합니다. 대장님.”

“더 날뛰기 전에 총공세를 펼친다. 끝을 내야 해. 시간을 더 끌면 개경에서 원군이 올 거야. 그러면 골치 아파져.”

“알겠습니다. 곧장 준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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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선은 크게 심호흡했다.

지금부터가 진검승부다.

처음 의병을 일으켰을 때 상대했던 왜장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역량을 가진 적장이 대군을 이끌고 있다.

...작은 실수라도 하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보게 된다.

백번을 생각했다.

이대로 농성하면서 원군을 기다리는 게 옳지 않을까?

괜한 짓을 해서 걷잡을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내가?

...진짜 ‘왕선’이라면? 천재적 재능을 가졌던 그라면?

...해낼 수 있었을 건...데?

...내가 그의 자리를 차지하는 바람이 이 사달이 난 걸까?

...나 때문에 위기가 도래한 걸까?

헛웃음을 지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진짜 ‘왕선’도 책상물림에 불과하다.

서책에서 읽은 지식으로 수천 명의 창칼이 휘둘러지는 피비린내 나는 전장을 능수능란하게 이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있어도 지금은 없는 거다.

왕선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나는 잘 할 수 있다.

내가 여기까지 끌고 온 거다.

...나는 미륵이니까.

주변을 돌아봤다.

“왜구가 성을 포위하기 전에 서두른다.”

“예, 예. 목사 나리.”

막상 작전을 시행해야 할 때가 되자 관민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가득하다.

이건 곤란하다.

“성 밖으로 나가는 걸 두려워하지 말라. 이건 승리를 위한 발걸음이다.”

이것은 남이 아니라 자신에게 하는 말.

총 책임자부터 헛생각했으니 관민의 기세가 처질 수밖에 없다.

결기를 가득 실은 눈빛으로 외쳤다.

“강물에서 가만히 기다리면 원수의 시체가 떠내려오는 걸 볼 수 있다.”

왕선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는 싸우러 가지만 승패를 알 수 없는 전장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승리가 담보된 곳으로 가는 것이다. 나를 믿어라. 왜구는 반드시 우리가 있는 곳으로 목을 들이밀 것이다. 오직 그것만 생각하라. 우리는 원수의 시체가 떠내려올 강물로 가는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관민의 눈을 쳐다보던 왕선은 등을 돌렸다.

그리고 성문을 열고 빠르게 이동했다.

< 25화 작전 그리고 작전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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