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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24화 (24/187)

< 24화 내가! 미륵이니라! >

전주 관청이 주관하는 문수도량에는 수천 명의 백성이 운집했다.

지척에 이른 왜구가 물러나기만을 바라는 기도가 끝을 보이지 않고 이어졌다.

“주공께서 시키셨다고?”

“예. 선생.”

“이유는 모르고?”

“예.”

전녹생은 이해할 수 없었다.

평소 냉철한 성격의 왕선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명령을 내리다니.

그때였다.

“불국정토가 위험하도다!”

우렁찬 외침이 들렸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쏠렸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천목과 전녹생은 입을 쫙 벌릴 정도였다.

그곳에는 황금색 법복을 입은 왕선이 근엄한 표정으로 서 있다.

...생존의 열망이 넘치던 문수도량 행사장에는 어색함이 감돌았다.

좌중을 돌아보던 왕선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내가 문수도량을 연 것은 불국정토를 위협하는 마군이를 물리치기 위한 거다.”

왕선의 오른손 검지가 굿하던 무당에게 향했다.

“한데, 너희는 민심을 현혹하여 제 잇속을 챙기고 있구나.”

“목, 목사 나리.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오늘 밤 전주성을 도주하려고 했지?”

“!!!”

“그래. 함께 온 땡중들도 공범이군. 참으로 간사한 무리가 아닐 수 없다.”

“억, 억울합니다. 소인들은 백성들의 위로하고자 열심히 굿하고 불경을 외쳤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정말 억울해 보였다.

그래서일까? 백성들의 분위기도 묘하다. 그러니까 왕선을 이상한 눈으로 본 거다.

그 순간 왕선이 일갈했다.

“갈!”

“!!!”

왕선의 검지가 군중 속에 있던 몇 명을 지목했다.

“천목! 당장 끌어내!”

“알, 알겠습니다.”

일단 시키는 대로 한 마천목.

왕선은 노기를 날리면서 외쳤다.

“이놈들도 공범이다.”

“!!!”

“참으로 추악한 무리가 아닐 수 없도다.”

“어, 어찌 이토록 장담하십니까? 소인들은 억울합니다.”

왕선이 무당을 지그시 쳐다보면서 근엄하게 일렀다.

“관심법.”

“...예?”

...관심법이라니. 어처구니가 없다.

...이거 아무래도 전주 목사가 미친 게 분명했다.

분위기는 급격하게 무당 쪽으로 쏠렸다.

백성들은 냉소적인 표정으로 왕선을 쳐다봤다.

...심지어 마천목과 전녹생도 한걸음 움직여서 무당 쪽으로 이동했을 정도다.

...저 인간들이?

그러나 왕선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산보하듯 백성을 향해서 움직였다. 그리고 검지도 움직였다.

“자네는 노모와 딸이 있군. 아내와 아들 셋은 작년에 왜구에게 죽었어. 참으로 애석하도다.”

“어, 어찌···.”

“나는 다 알고 있느니라.”

왕선은 침통한 표정으로 그의 손을 어루만졌다.

“허. 너는 홀로 남았구나. 일가족이 모두 죽었어.”

그렇게 시작했다.

차례로 사람들을 돌아보면서 말을 이었다.

“어릴 때 산속에서 놀다가 길을 잃은 적이 있었지? 어머니가 걱정할까 봐 산짐승에게 쫓겨서 숨었다고 했고.”

“허. 고아로구나. 참으로 고생이 많았어. 하지만, 잘 자라주었어.”

“이런. 네가 죽으면 집안의 대가 끊기게 될 것인데, 참으로 기특하구나.”

“···너는 혼자 남으셨구려. 마음고생이 참으로 컸도다.”

“허. 향리가 집에 있는 모든 식량을 갈취했구나. 왜구를 물리치고 내가 직접 그들을 꾸짖겠다.”

“누가 감히 네 딸을 욕보이려고 했는가.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 내가 처리해주겠으니.”

“이 사람아. 지금이라도 이웃집에 가서 사과하게. 실은 너무 배가 고파서 쌀을 조금 훔쳤다고. 다 이해할 것이야.”

“아들과 싸웠구려.”

······

왕선은 한참 동안 말을 이었다.

모두 경악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왕선의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충격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모두의 마음을 덮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관심법이니라. 너희는 지금 관심법을 보고 있는 것이니라.”

민심은 술렁였다.

...그러나 왕선은 전주 목사다. 마음을 먹으면 백성의 일상을 알 수도 있다.

물론 이 많은 사람의 신상을 외우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관심법이라는 걸 믿기보다는 왕선이 천재적으로 똑똑하다고 믿는 게 현실적이다.

그때 충격적인 일이 발생했다.

“미륵이시여!”

모든 사람이 시선이 이동했다.

그곳에는 정갈한 순백색 복장을 한 이문정이 있다.

이문정이 누구던가.

한때 전주를 대표하던 유학자다.

백성이 굿을 하면 괴력난신이라며 대갈성을 날릴 정도로 꼿꼿한 인사였다.

...그런데 그가 왕선에게 절하며 미륵이라고 한다.

백성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미륵이시여!”

이문정은 피를 토할 듯 외쳤다.

*****

“뭐, 뭐라고 했소?”

“궁예는 미륵의 현신이지.”

“뭐, 뭐요?”

“그러니까 내가 미륵이라고.”

“이, 이보시오.”

왕선은 싸늘한 눈으로 이문정을 노려봤다.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 안 그러면 전주 이씨는 멸문지화를 면치 못할 거야.”

“!!!”

“약조하지. 이번만 잘 넘기면 전주 이씨를 건드리지 않을 것이야.”

“그, 그러나 나는 괴력 난신을 부정하는 유학자요.”

왕선은 거칠게 이문정의 멱살을 잡았다.

“미쳤어?”

“!!!”

“지금 왜구가 지천에 깔렸어. 이대로라면 전주성이 참화에 휩싸이게 된다고. 그런데 지금 그깟 같잖은 신념을 꺼내?”

“!!!”

“네 세 치 혀만 움직이면 살길이 열린다고. 수천, 수만의 백성이 살길. 정말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겠나?”

“!!!”

왕선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리고 당신. 내 정체 알잖아?”

이문정의 눈이 철렁였다.

“당신이 지껄이는 유학에서 괴력 난신을 믿지 말라고 했다고? 그런데 지금 눈앞에 버젓이 있잖아. 궁예의 현신이.”

“!!!”

“눈으로 보이는 걸 부정하는 건 대체 뭐지? 서책에 적힌 글이 현실보다 정확해?”

이문정의 턱이 덜덜 떨렸다.

...도저히 인정하긴 싫지만 왕선의 말이 옳다.

이 사람은 사람의 속을 들여다보는 관심법을 한다.

괴력 난신이 눈앞에 버젓이 있다.

궁예의 현신이 눈앞에 있는 거다.

그 순간 이문정을 지탱해온 유학의 진리가 처참하게 무너졌다.

됐다.

왕선의 입꼬리가 진하게 올라갔다.

“다시 묻지. 내가 누구인가?”

“···궁예의 현신이시오.”

...아씨. 이 양반이 진짜. 정신 못 차리지?

“···그러니까 궁예가 뭐냐고 물었다.”

“···미륵이시외다.”

그제야 이문정의 멱살을 잡았던 왕선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왕선은 이문정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말했다.

“잘해보자고. 미래의 전주 이씨 가주 나리?”

*****

이문정은 이를 악물고 외쳤다.

그의 눈에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미륵이시여. 불국정토를 구원하소서.”

“너는 어째서 나를 미륵이라고 부르는가?”

...너무나도 고통스럽다.

이문정은 절규하듯 외쳤다.

“난세를 끝장내고 중생을 구원하고자 미륵께서 하생하셨거늘 어찌 모르겠습니까?”

“너는 참으로 옳다.”

...이 순간이 지나가길 바랐다.

이문정은 오열했다.

“미륵이시여.”

“너는 참된 눈을 가졌다. 미륵의 권능으로 그간 자행한 죄를 사하노라.”

백성들이여. 나를 보지 말지어다.

...부디.

이문정은 온 힘을 짜내어서 외쳤다.

“미륵이시여.”

전주 이씨의 좌장 이문정이 미륵을 외쳤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문정이다. 비록 위조문서의 비리로 민심을 잃은 사람이지만 그가 평생 쌓은 권위가 사라진 건 아니다. 또, 그는 왕선과 척을 진 사람이 아닌가?

...백성들의 마음은 거세게 움직였다.

바로 그때 왕선은 합장하면서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옴마니 반메홈.”

다시 말했다.

“옴마니 반메홈.”

낮은 어조였으나 참으로 묵직했다.

“옴마니 반메홈.”

홀로 말했으나 수백 명을 압도했다.

“옴마니 반메홈.”

감히 항거할 수 없는 마력이 새어 나왔다.

“옴마니 반메홈.”

그것은 사람들의 눈과 귀를 매혹했다.

“옴마니 반메홈.”

두려움으로 떨던 사람들의 마음이 안정됐다.

“옴마니 반메홈.”

절망의 구렁텅이에 한 줄기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왕선은 차분하게 이어갔다.

“옴마니 반메홈.”

합장을 따라 하는 사람이 생겼다.

“옴마니 반메홈.”

그리고

“옴마니 반메홈.”

“옴마니 반메홈.”

“옴마니 반메홈.”

“옴마니 반메홈.”

수천 명이 함께했다.

웅성거림이 점차 커졌다.

모든 사람이 오직 ‘옴마니 반메홈’만을 입에 담았다.

누구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거대한 힘이었고, 압도적인 기세였다.

그들을 지켜보던 왕선은 양손을 펼쳐서 하늘을 향해서 뻗었다.

그 순간 좌중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오직 왕선의 목소리만 묵직하게 울렸다.

“내가!”

왕선의 시선이 태양과 마주쳤다. 참으로 눈부시다.

그 순간 우렁차게 외쳤다.

“미륵이니라!”

미륵이 왜 미륵이겠어? 중생을 구원하니까 미륵이다.

오늘 미륵의 이름으로 이들을 구원해 낼 것이다.

...그래. 이대로 간다.

그 순간

“와아아아아!”

“미륵이시여!”

“미륵께서 오셨다!”

“불국정토가 이곳이다!”

미륵님이 보우하시었기에 저들은 초인적인 결기를 낼 것이다.

절망은 이제 끝이다.

이곳은 승리에 대한 확신만이 있었다.

왕선은 근엄하게 눈을 감았다.

이들을 살리기 위해서 백번이라도 기꺼이 미륵이 되겠다.

민심을 현혹하는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골백번을 죽더라도 미륵이 될 것이다.

이것이 왕선의 길이다.

< 24화 내가! 미륵이니라!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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