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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23화 (23/187)

< 23화 도당의 논의 >

도당은 난리가 났다.

3천 명의 왜구가 전라도를 공격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탓이다.

...그러나 큰 위기감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개경 지척이 아니라 머나먼 전라도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당신들 녹봉은 뭐하러 받나?”

나지막한 목소리가 도당을 울린다.

다른 건 몰라도 내용이 무척 거슬린다. 감히 누가 이런 말을 한다는 말인가?

재상들은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민망한 듯 헛웃음을 지었다.

시선이 향한 곳에 가라앉은 눈을 한 이인임이 있기 때문이다.

“잘됐군.”

“예?”

“전라도가 어지러우면 나라 살림도 어려워져.”

“······.”

“그래. 이참에 자네들 녹봉이나 대폭 삭감하지.”

“···시중 어른.”

“왜 그러나? 어차피 녹봉 따위는 안 받아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지 않나? 다들 그 정도는 다 챙겨놓고 도당에서 떠들고 있는 거 아닌가. 평소 쥐꼬리만 한 녹봉이라고 떠들지?”

“그, 그것이 아니라···.”

“왜? 막상 쥐꼬리 줄이겠다니까 아깝나?”

재상들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이인임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말했다.

“대체 재상은 뭐하러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군.”

끝없는 질책.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다 나가게.”

“시, 시중 어른.”

“내가 볼 때 도당에는 딱 3명만 있으면 충분해. 무장을 대표하는 최영 장군, 사대부를 대표하는 대사성 그리고 나.”

“소생은 빼주시지요.”

정몽주다.

“자네는 좀 가만히 있기라도 하게. 초 치지 말고.”

“소생은 수시중과 한배를 탈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자네가 왜구 몰아낼 건가?”

“군사나 내주십시오. 소생이 죽는 한이 있어도 나가서 싸울 거니까.”

“사병도 없으면서 왜 나서나?”

이인임은 고개를 틀었다.

시선이 향한 곳은 최영이 있다.

“최영 장군. 방책이 있소?”

관망하던 최영은 너스레를 떨었다.

“3천 명이라면 전라도가 자력으로 막아낼 수 없소. 반드시 원군을 보내야 하오.”

“해서, 방책을 물었습니다.”

“음. 가서 싸워야지요.”

“그 말씀은?”

“내가 직접 가리다.”

“과연 장군이시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오.”

최영은 시선을 돌려서 재상들을 못마땅한 듯 쏘아봤다.

“고려의 재상이라면.”

“명언입니다. 재상의 자격이 없는 사람을 걸러내면 될 거 같군요.”

“수시중의 말대로 3명만 있어도 되지 않겠소?”

“장군. 소생은 빼주십시오.”

정몽주가 끼어들었다.

“대사성. 대의를 위해서 사사로운 감정은 좀 넣어두게.”

“장군께서도 왜 이러십니까? 좋습니다. 소생에게 집정 대신을 주십시오. 하면, 수락하지요.”

“내가 죽으면 하게.”

이번에는 이인임.

정몽주는 가볍게 응수했다.

“하루라도 빨리 그 날이 오길 바랍니다.”

덧붙였다.

“간절히.”

“고약한 인사 같으니라고.”

“수시중은 지독하지요.”

세 사람의 대화가 점입가경이다.

그제야 재상들은 앞다퉈 나섰다.

“험험. 소직도 사병을 내놓겠습니다.”

“험험. 소직도요.”

“하하. 군량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인임이 조소를 날렸다.

“이번 일은 최영 장군이 맡았네만.”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까칠한 최영과 논의하라니.

재상들은 불편함을 애써 숨긴 채 최영을 쳐다봤다.

“한심한 작자들.”

최영도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상들이 다급하게 뒤를 따르자 최영이 호통을 쳤다.

그들을 서슬 퍼런 눈으로 노려보다가 도당을 나서니 이인임이 기다리고 있다.

“장군.”

“나를 기다리셨소?”

“설마 대사성을 기다리겠소?”

“그건 그렇군. 왜 기다렸소?”

“전주 목사 왕선 말이외다.”

실은 최영이 자청한 이유에는 왕선을 만나볼 생각도 있다.

...일전의 만남이 아직도 선하게 떠오른다.

...북진. 미친놈의 북진. 그걸 다시 듣고 싶다.

이 속내를 이인임이 들여다봤을까? 해서, 갑자기 왕선을 거론하는 걸까?

잠시 멈칫했으나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왜 그러오?”

“혹시 왕선이 막아낼 수 있을까 해서요.”

이인임이 왕선을 이토록 높게 평가하나?

...아니다. 다른 의도가 있을 거다.

최영은 진중한 어조로 답했다.

“전주의 군사는 5백. 왜구는 3천. 이건 어렵소.”

“음. 장군이라면 가능하오?”

“상황을 봐야지요.”

“음. 불가능하다고는 안 하는군요?”

“나를 모르시오?”

“이런. 내가 실언했군요.”

이인임은 옅게 웃으면서 말했다.

“어쨌거나 장계를 보면 왕선이 초기 대처는 잘 했소.”

“그건 그렇소. 시기와 규모가 달랐으나 그걸 맞춰내는 건 사람의 일이 아니니까.”

“해서 말입니다.”

“말 하시오.”

“왕선이 큰 공을 세우면 개경으로 불러오려고 하오.”

“...개경이라고 했소?”

이인임은 최영의 눈을 지그시 쳐다봤다.

“탐탁지 않아 보입니다?”

“내가 그럴 이유가 어디 있겠소.”

“하면, 왕선을 데려오시겠소?”

“그리하겠소이다.”

“예. 무운을 빌겠소.”

“나 최영이오.”

“하하. 또 실언했군요. 만찬을 준비하고 있겠소.”

“승전한 뒤에 봅시다.”

“예. 그러지요.”

그 말과 함께 두 사람은 동시에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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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선은 자책했다.

...등경광을 살려서 다른 수를 찾았어야 했다.

섣불리 죽이는 바람에 적의 공세 시기와 규모가 달라진 거다.

...씨발. 별거지 같지도 않은 놈 하나 죽였다고 일이 틀어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형님.”

경직된 안색의 마천목이다.

전주목에 배치된 500명의 관군은 제법 훈련 정도가 괜찮다.

그러나 새롭게 개편한 500명의 사병은 아니다. 3000명의 적을 상대하는 전장이다. 탈탈 털어도 1000명인데 그중 절반이 엉망이다.

절망적인 상황을 보고 받은 왕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구는?”

“이 속도라면 내일쯤 전주성을 포위할 겁니다.”

“솔직하게 묻지. 요격하면 내칠 수 있나?”

“죄송합니다.”

“필패?”

“소제의 생각은 그렇습니다.”

임피, 김제, 부안, 익주에서 싸우다 도주한 패잔병의 말에 의하면 이번 왜구는 상당한 정예군이었다. 원래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 그랬다. 아무래도 제대로 기획하여 전주성을 도모할 병력이 분명했다. 한 마디로 전라도의 쌀을 모조리 털어가겠다는 의도다.

마천목이 겁을 먹고 한 말이 아닌 거다.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한 거다.

자고로 필부의 용맹보다 무서운 건 없다. 그러니까 마천목은 지금 잘 하는 것이다.

“생각해둔 방책은?”

“성문을 굳건히 지키면서 원군을 기다리는 게 합당합니다.”

“음.”

“지금은 그게 유일합니다. 수적 열세를 극복할 수 있는 건 농성전이 가장 좋지 않습니까.”

“그래. 그러면 전주성은 지킬 수 있지.”

“···형님.”

“전주성이 고립될 동안 인근은 아비규환이 될 거야. 전주 목사가 전주성만 지키는 게 역할은 아니지 않나?”

“···그렇지만 마땅한 방책이 없습니다.”

“성내의 상황은?”

“...흉흉합니다.”

마천목은 쓰게 웃으면서 말했다.

“최근에는 문수도량(文殊道場)이라는 행사도 열리고 있습니다.”

“문수도량?”

“전주가 풍수지리상 일본의 맥이 된다는 논리로 액막이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구가 물러난다는 말이 퍼졌습니다.”

“허.”

“어떤 무당이 떠든 말이었는데, 백성의 입을 타고 번졌고, 인근 사찰의 승려들도 함께 법회를 열 정도입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당장 해산시켜.”

“그러나 백성이 위안을 그렇게라도 찾고 있습니다.”

“하. 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 관민이 일치단결해서 왜구를 막아야...”

왕선은 말을 끌더니 무서운 눈으로 마천목을 쳐다봤다.

“형, 형님. 죄송합니다. 당장 명을 따르...”

“백성이 위안을 찾고 있다고?”

“예? 예.”

“얼마나?”

“예?”

“문수도량에 참가한 백성의 상태를 묻는 거야.”

“아. 당장이라도 왜구가 물러날 것이라는 확신을 하고 있습니다.”

“확실하지?”

“예. 맞습니다.”

“지원해.”

“예?”

“문수도량. 최대 규모로 지원하라고.”

“형, 형님.”

“전주성 모든 백성이 모일 정도로 크게 열어.”

“왜 그러십니까?”

“어서!”

“알, 알겠습니다.”

마천목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황급히 움직였다.

왕선은 이를 악물었다.

...이판사판 공사판이다.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이다.

이럴 때가 아니다 서둘러서 준비에 나섰다.

< 23화 도당의 논의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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