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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22화 (22/187)

< 22화 폭풍전야 >

전주의 아침은 활기찼다. 전주 관청의 의욕적인 권농정책이 큰 효과를 낸 거다. 아직 대풍을 겪지 않았음에도 백성의 입에서는 구성진 가락이 연신 나왔다.

오늘은 어제의 아침과 달랐고, 내일은 오늘과 다를 거다.

그랬다. 지금 전주의 백성은 난생처음 꿈이라는 걸 꾸고 있는 거다.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열심히 일하던 사람들의 눈에 황급히 달려오는 파발이 보였다. 아직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그 다급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뭔가 불안했다.

그새 파발은 전주 관청의 지척에 도착했다.

“등경광?”

“예. 목사 나리.”

“알겠네. 일단 가서 좀 쉬게. 숨넘어가겠네.”

왕선의 말대로 달려온 병사는 몰골이 엉망이었다.

거친 숨소리가 멈추지도 않았다.

병사는 멋쩍게 웃으면서도 거절하지 않고 물러났다.

“등경광이라.”

마천목이 고개를 갸웃했다.

“희한하군요. 왜장이 항복하는 경우는 잘 없는데.”

“그렇긴 하지. 전 선생의 생각은 어떻소?”

“송구합니다. 소생은 군무의 일은 문외한입니다.”

그렇긴 하다.

전녹생은 내정에서 정말 뛰어난 능력을 보였으나, 군략과는 거리가 멀었다.

즉, 훌륭한 내정가일 수는 있으나 대 군략가는 아니었다.

“다만, 천목의 말대로 의심해볼 여지는 있습니다.”

“별다른 전투도 없었는데 항복하는 왜장이라. 하긴. 이런 일이 흔한 건 아니니까.”

“그렇습니다.”

“그래도 일단 만나보는 게 좋을 것 같소. 뭐라고 떠드는지 들어나 보게.”

“그러면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그러시오. 그리고 천목이는 철통같은 경계태세를 갖추고.”

“알겠습니다.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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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경광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었다.

왜놈이다.

그거면 딱 맞다. 가장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등경광이라고 합니다.”

“전주 목사 왕선.”

왕선은 굉장히 아니꼽게 말했다.

등경광은 멋쩍게 웃었다.

“항복을 청합니다.”

“왜?”

여전히 아니꼬운 말투.

역관은 진땀을 닦으면서 통역했고, 등경광은 입맛을 다셨다.

“···정착하고 싶습니다.”

“어디에?”

“···고려의 백성이 되고 싶습니다.”

“왜?”

“···손에서 창칼을 내리고 농기구를 잡고 싶습니다.”

“왜?”

“···더 평화롭게 살고 싶습니다.”

“왜?”

“···안정을 두고 싶습니다.”

“왜?”

왕선은 끝없이 되물었다.

이리되자 등경광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소인의 항복이 별로 달갑지 않으신가 봅니다?”

“어.”

“···하면, 소인을 내치시는 겁니까?”

“그건 아니지.”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뭘?”

등경광의 미간이 꿈틀였다.

“돌아갈까요?”

왕선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수하가 몇이지?”

“족히 200명은 됩니다.”

“많군.”

왕선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고심한다.

역시.

목사는 괜한 객기를 부린 거다.

200명의 병사는 절대 적은 수가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고려 해안가를 얼마든지 유린할 수 있다. 이에 놀라서 본심이 나올 게 분명하다.

그래. 전주 목사 왕선은 이제 상황 파악이 된 거다.

“그 많은 인원이 어디에 살려고?”

“전주 목사께서 허락해주신다면 전주성에서 살겠습니다.”

“뭐 먹고 살려고?”

“땅을 내어주십시오.”

“수확하기 전에는?”

“지원해주실 거로 믿습니다.”

“땅도 주고 쌀도 달라?”

“목사께서도 손해 보는 건 아닐 겁니다.”

“아니지. 손해지. 엄청 손해지.”

“200명이 투항하여 얌전하게 살면 목사께서도 큰 공을 세우시는 겁니다. 엄밀히 따지면 소인 덕에 목사께서 큰 공을 세우시는 겁니다.”

“그래. 큰 공을 세울 기회를 주긴 하는군.”

“예. 맞습니다. 이제 대화가 술술 풀리는군요.”

한껏 여유를 부리는 등경광.

그를 지그시 쳐다보면서 조소를 날렸다.

“미친놈이군.”

“뭐, 뭐라고 하셨습니까?”

“되먹지 않은 놈이기도 하고.”

“목, 목사 나리!”

“너희가 그동안 자행한 패악질을 생각해봐.”

“!!!”

“갑자기 항복하러 왔다면서 우리 백성이 살아갈 터전을 내놓으라고 헛소리를 지껄이는데 본관의 입에서 험한 말이 나오지 않겠나?”

“항복하러 온 사람에게 이 무슨 무례한 언행입니까?”

“항복은 무슨.”

“무, 무슨 말씀입니까?”

“염탐하러 온 거 다 알아.”

“!!!”

“내친김에 전주성을 내부에서 교란할 계획도 있고.”

어, 어찌 계책을 알고 있단 말인가?

등경광은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어떻게 수작질을 펼치는지 궁금해서 그냥 둬봤어. 천목아.”

“예.”

“끌고 가서 죽여.”

“알겠습니다.”

“아.”

왕선이 이를 바뜩이면서 말했다.

“백성들이 죽이게 해. 돌팔매질로.”

“그리하겠습니다.”

등경광은 악을 쓰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역관은 굳이 옮길 필요 없네.”

“그, 그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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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경광과 왜구는 분노한 백성의 돌팔매질에 맞아 죽었다.

“주공.”

“일전에 노비를 면천했을 때 백성의 반응을 잊었소?”

“200명의 왜인이 들어오면 백성이 반길 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백성의 눈치를 살피면서 통치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저들을 잘 다독였다면 여러 쓸모가 많았을 겁니다.”

전녹생의 말은 아주 합당했다.

투항한 왜구를 잘 구슬려서 정보를 얻어내는 게 중요한 시절이니까.

그러나 왕선은 그런 번거로운 작업이 필요 없다.

“괜히 살려뒀다가 대적이 침략했을 때 내부에서 분탕질이라도 일으키면 큰일이오. 물론, 역으로 위보를 흘린다면 큰 성과를 낼 수 있으나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전 선생도 잘 알 거요.”

“주공께서는 추가적인 공세가 있을 거라고 보십니까?”

“물론입니다. 천목아.”

“예.”

“훈련 정도는?”

“관군은 당장이라도 싸울 수 있습니다.”

“사병은?”

“아직 멀었습니다.”

“음.”

“왜 그러십니까?”

“조만간 대규모 왜구가 나타날 거다.”

“!!!”

왕선은 마천목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내 말을 의심하지 않는군.”

“허. 형님 말씀을 왜 의심합니까?”

“그래?”

“지금까지 틀린 적이 없습니다.”

...고맙긴 한데 아쉽다.

물어볼 줄 알고 답변도 알차게 준비했거늘.

“주공. 외람되지만, 판단의 근거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왕선은 기뻤다.

그러니까 이 모든 정황을 관심법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하여, 정성스레 답변을 준비했는데 마천목의 무한 신뢰로 묻힐 뻔한 노력이 전녹생의 합리적 의심으로 살아날 수 있게 된 거다.

“최소한 50척.”

“예?”

“등경광의 뒤를 따라 전주를 노리는 왜구의 군선이 50척이란 말이오. 족히 2천여 명은 되는 규모지요.”

“주, 주공.”

“그동안 전라도를 공격한 왜구의 규모를 고려한 거요. 이번에 등경광과 200명이나 되는 왜구를 심을 정도로 치밀하게 작전을 짰다면 2천은 충분히 가능한 규모라는 게 내 결론이오.”

2,000명.

전주의 관군이 500명인 걸 고려한다면 실로 엄청난 규모다. 이 정도라면 군현의 힘으로 막아낼 수 없다. 반드시 개경에서 원군이 달려와야 한다.

“혹시 설명이 부족하오?”

“아닙니다. 소생이 결례를 범했습니다.”

“아니외다.”

“한데, 주공. 적의 규모가 그토록 크다면 등경광을 죽이고 개경에 원군을 청하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그래야겠지요. 등경광을 고문해서 알아낸 내용이라고 합시다.”

“알겠습니다. 소생이 장계를 작성하겠습니다.”

“그러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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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목사의 권한으로 근처 군현에 파발을 보냈다. 조만간 대규모 왜구가 침범할 것이니 경계에 만전을 기하라는 내용이었다.

전주목의 전력만으로는 2천 명의 왜구를 감당하기가 어렵지만, 인근의 군현이 힘을 잘 합친다면 방어체계를 어느 정도 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왕선은 마천목에게 일러서 전주목에 속한 군현을 통제하고 익주, 김제, 부안, 임피에 도움을 줄 수 있게 했다.

...그런데 왜구의 출몰 시기가 등경광을 통해서 알아낸 것보다 빨랐다. 심지어 군세의 규모도 달랐다. 군선은 70여 척, 병사는 3천여 명에 육박했다. 등경광이 죽자 왜구의 움직임이 달라진 거다.

그리고 왜구는 임피(군산)에 상륙하여 순식간에 김제와 부안을 장악하고 익주(익산)까지 진군했다.

왜구의 창칼이 전주성의 지척에 이르렀다.

거대한 전운이 감돌았다.

< 22화 폭풍전야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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