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궁예의 재림? >
“동북면으로 가자.”
이문정의 목소리는 완전히 갈려있다.
눈 밑은 퀭하고 피부는 텁텁하다.
평소 고결한 유학자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한 몰골이다.
그런 아버지를 보는 이백유는 속이 답답했다.
하늘을 움켜쥘 듯 항상 당당하던 아버지가 아닌가?
대체 어쩌다가 이리되었단 말인가.
“아버님.”
“부곡에 숨겨둔 토지까지 모두 빼앗겼어. 전주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언제부터 양홍도 만나주지를 않아.”
“아버님. 답답한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대로 동북면으로 가는 건 가주에게 짐이 될 뿐입니다.”
“···가주가 우리를 내치지는 않을 거다.”
“아버님.”
“한시라도 빨리 전주를 벗어나야 한다.”
“아버님 말씀대로 가주가 우리를 내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소자가 올린 말은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백유는 아버지 이문정이 도통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왕선에게 된통 당하고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어려움에 부닥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백유는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제아무리 왕선이 날뛰고 있으나 전주 목사에서 끌어내리면 모든 걸 바로 잡을 수 있다.
그게 어렵다고 하더라도 전주 목사는 종신제가 아니다. 때는 언제라도 온다. 그때를 기약하는 게 가장 합당한 방도다.
“아버님. 반드시 때는 옵니다.”
“...때?”
“소자가 백방으로 왕선을 무너뜨릴 방법을 찾겠습니다.”
이백유는 확신을 담아서 말했다.
그런데 이문정의 행동이 이상하다.
“아, 아니다. 그러지 말거라.”
“아버님?”
“왕, 왕선과 대적할 생각일랑 집어치우고 내 말대로 해.”
말을 더듬고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양손도 떨면서 문지르듯 만졌다.
이백유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버님.”
그러자 이문정의 화를 냈다.
“네가 언제부터 내 말에 이렇게 토를 달았느냐!”
“아, 아버님.”
“당장 준비해. 동북면으로 갈 거야. 거기서 다시 시작하면 될 일이다.”
이렇게까지 화를 낼 이유가 어디 있을까?
이백유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더 반대할 재간이 없다.
그런데 밖이 소란스럽다.
“전, 전주 목사가 왔습니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마름의 목소리.
이백유는 미간을 찌푸리며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이문정의 사색이 하얗게 질려있다.
“...아버님?”
그때 이백유의 귀를 거슬리게 하는 불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부자간에 심오한 대화를 하고 있었나 보오?”
왕선이다.
이백유는 이를 악문 채로 차갑게 내뱉었다.
“어쩐 일이시오?”
“전주 목사가 전주 땅에 가지 못할 곳이 있소?”
“이곳은 사가요.”
“압니다.”
이백유의 까칠한 행동을 가볍게 일축한 왕선은 털석 자리에 앉았다.
“또 봅니다? 이 선생?”
“어, 어쩐 일이시오?”
이문정은 안절부절.
이백유는 도통 상황을 알 수 없다.
아무리 사정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왕선에게 저토록 저자세로 나갈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전주를 떠난다고 들었소.”
“!!!”
“동북면으로 가려고?”
또 알고 있다.
방금전에 아들과 논의한 내용이 아닌가.
말이 새더라도 시간이라는 게 필요하지 않은가?
그런데 왕선은 그걸 넘어서 움직이고 있다.
또다시 그의 머릿속에 해괴한 내용이 스쳤다.
...구, 궁예다. 궁예가 미륵 관심법을 쓰고 있는 거야.
이문정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덜덜 떨면서.
그 꼴을 보다 못한 이백유가 나섰다.
“전주 이씨의 일이외다. 목사가 참견할 일이 아니오.”
“이 선생의 아들은 본관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 같소?”
“너, 너는 물러가 있거라.”
“아버님!”
“어서!”
불같이 화를 내는 이문정.
이백유는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본 왕선은 싱그럽게 웃으면서 슬쩍 일어나더니 턱짓했다.
이문정이 눈을 질끈 감으면서 자리를 옮기자 왕선의 미소가 진해졌다.
그리고 원래 이문정이 앉아 있던 상석에 앉았다.
“편하군.”
“······.”
“그래도 본관이 이 선생 체면은 살려줬소. 아들 보는 앞에서 아랫목으로 쫓겨나면 좀 그렇지 않소. 이 은혜를 잊지 마시오.”
아랫목으로 쫓겨난 이문정은 눈치만 살폈다.
그 모습을 본 왕선은 흡족하게 웃었다.
“동북면은 왜 가려고 하오?”
“오, 오랫동안 고민한 일이외다. 아무래도 모두 모여 있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전주 이씨가 전주에 있어야지.”
“가, 가주가 동북면에 있는지라.”
“그러니까 그게 이상하다는 말이외다. 전주 이씨의 거점은 전주인데 왜 동북면에 있는 사람이 가주요?”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건가?
이문정의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지 궁금하오?”
“대, 대체···.”
“내 정체는 말해줬고, 당신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거 같소만?”
“!!!”
“또 말해줘야 하오?”
“정, 정말 그게 사실이란 말이오?”
“그건 알아서 생각하시구려.”
말이 샜다.
왕선은 다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 어쨌든 전주에 계시오. 멀쩡한 집을 두고 어디로 가려고.”
“대, 대체 왜 그러시오?”
“조금 전에 말했소만? 왜 전주 이씨의 가주가 동북면에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냐고.”
“혹, 혹시.”
“누가 봐도 이 선생이 가주에 어울리오만?”
“!!!”
“인맥이면 인맥, 경륜이면 경륜, 학식이면 학식. 딱 어울리오.”
“이, 이보시오.”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전주에 계시오.”
“내가 따르지 않으면 어쩔 거요?”
“어쩌긴. 죽지.”
“!!!”
“난세가 이런 게 좋소. 마음에 안 들면 그냥 죽여도 되니까. 시체가 발견되면 산적이나 왜구가 했다고 생각할 거요.”
왕선의 목소리는 고저가 없었다.
마치 시조를 말하듯 담담하기만 했다.
“나는 분명히 말했소. 전주. 나가지 마시오.”
질릴 대로 질린 이문정의 안색은 참담할 정도였다.
“아. 가주로 선언하는 시기는 본관이 일러주리다. 그리고 품위는 유지해야 하니까 적당한 재물도 다시 주겠소. 음. 전 선생과 논의해서 토지도 살짝 얹혀서? 그 정도면 전주에서 먹고살 만할 거요.”
옷을 털면서 일어났다.
“아. 당신 아들 말이외다. 생각이 많던데?”
“무, 무슨 말이오?”
“본관을 목사에서 끌어 내리고 싶어 하던데? 그게 안 되더라도 전주 목사의 임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거나.”
“!!!”
이문정의 심장은 터질 듯 뛰었다.
“놀라긴.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잖소. 안 그러오?”
그래. 처음이 아니다. 매번 이랬다.
왕선을 만난 직후부터 계속 이랬다.
이문정은 두려웠다.
두려움이 점차 커졌다.
“말했지 않소.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러니까 헛수작 그만 부리고 그냥 숨이나 쉬고 사시오.”
왕선의 목소리는 이문정의 몸을 옭아맸다.
“아. 똥도 부지런히 싸고. 거름으로 써야 하니까.”
걸음을 옮기던 왕선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빼먹은 말이 있군. 전주가 내 손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을 거요. 절대.”
이문정은 움직이기도 힘들 정도였다.
단지 두려움이라는 감정 때문에.
그런데도 반드시 물어볼 말이 있다.
온 힘을 다해서 입을 움직였다.
“대, 대체 나를 왜 전주 이씨의 가주로 세우려는 거요?”
왕선은 몸을 돌렸다.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십 년 대계? 뭐 그런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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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정의 사가를 나온 왕선은 몸을 움직이면서 뻐근한 몸을 풀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서 대문을 쳐다봤다.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당신이 나를 너무 두려워하길래.”
싱긋 웃었다.
“숟가락을 올린 거지. 당신이 밥상 차려준 거야. 그러니까 너무 원망하지는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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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
“···전주에 남아야겠다.”
전주에 남는 건 이백유도 바라던 바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 윽박지르듯 동북면으로 가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버님. 대체 왜 이러십니까?”
“······.”
“그 강건하시던 아버님께서 왜 이러시냔 말입니다.”
“백유야.”
“예. 아버님.”
“전주 목사를 어찌할 생각일랑 버리거라.”
“아, 아버님.”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대체 그자가 뭐라고 했길래 이러시는 겁니까?”
“애초 이상하다고 했어.”
“아버님.”
“유영 말이다. 전대 전주 목사 유영.”
“무슨 말씀입니까?”
“유영은 최영 장군의 처조카야. 그런데도 최영 장군이 그를 밀어내고 왕선을 천거했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어.”
“······.”
“드디어 알았어. 왕선은 무서운 사람이야.”
이백유는 황당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대체 왕선이 뭐라고 이러십니까?”
이문정은 덜덜 떨면서 말했다.
“그 자는···.”
“예.”
“궁예의 현신이다.”
“예?”
이백유는 맥이 탁하고 풀렸다.
...이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눈앞에 있는 사람이 괴력 난신이라면 치를 떨던 아버지 이문정이 맞단 말인가?
“구, 궁예의 현신이란 말이다.”
“···아버님. 일단 쉬셔야 할 거 같습니다.”
“사람의 속을 들여다보는 미륵 관심법을 사용하고 있어!”
“아버님!”
“백유야. 절대 왕선을 적대하지 마라. 네가 무슨 수를 꾀하든 다 알고 있다는 말이야.”
“아버님. 대체 왜 이러십니까?”
“궁예. 궁예가 난세에 재림했어. 이 나라를 집어삼키겠다면서.”
...집어삼킨다?
혼란과 두려움이 가득하던 이문정의 뇌리에 스치는 게 있다.
...전주 이씨를 두 동강 내려는 왕선의 의도.
...왕선은 미륵관심법을 사용한다.
“!!!”
왕선이 전주 이씨의 꿈을 알아버렸다?!
이 미련한 인사야. 왜 이걸 이제야 파악했어!
모든 걸 내다보는 상대를 앞에 두고!
억겁의 두려움이 사방을 덮쳤다.
이문정은 양손으로 어깨를 부여잡으면서 턱을 덜덜 털어댔다.
“아, 아버님. 괜찮으십니까?”
“절, 절대로 왕선과 적대하지 말거라.”
“아, 아버님.”
“어서! 어서 대답하거라!”
“알겠습니다. 소자 아버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니 어서 안정을 찾으십시오.”
“구, 궁예. 궁예가 재림한 거야.”
이문정은 진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백유는 참담한 안색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도저히 눈뜨고 지켜볼 수가 없을 정도로 처참한 광경이었다.
< 21화 궁예의 재림?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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