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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20화 (20/187)

< 20화 사병 >

이문정은 마른침을 넘겼다.

참으로 고약한 상황이었다.

설마 왕선이 방문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빨리 상황이 마무리되길 바랐다.

“손님이 있었나?”

이문정은 이를 질근 깨물었다.

하지만 양홍은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이다. 곤란하게 하지는 않을 거다.

“아. 전주 이씨의 이문정 선생이 방문했습지요.”

안색이 와락 일그러졌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아도 이문정 선생은 곧 자리에서 일어날 겁니다.”

아직 본론을 꺼내지도 못했다.

이문정은 참담했다. 자신의 처지가 다시 상기 된 거다.

씁쓸했다. 밖이 정리되면 쓸쓸하게 이 집을 나갈 일만 남았다.

“합석하지.”

이문정의 눈이 거세게 떨렸다.

그리고 왕선이 시원하게 문을 열면서 들어왔다.

“오랜만이오?”

바로 지척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문정의 손에는 진땀이 가득하다.

...왜 이러는 것이냐? 너는 이문정이다. 대범해야 해.

이문정은 자연스럽게 왕선을 쳐다봤다.

“오랜만이외다.”

태연하고 곧은 태도. 고결한 목소리.

왕선의 표정이 희한해졌다.

이문정은 안도했다.

순식간에 마음을 다잡고 갈무리한 자신이 대견할 정도다.

평생 쌓은 공덕이 헛되지 않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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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을 걷어차다시피 들어온 왕선의 눈에는 쥐새끼처럼 두리번거리는 이문정이 보였다. 참으로 모양새가 한심하다.

“오랜만이오?”

그러자 이문정이 쳐다본다.

어색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볼은 씰룩인 채로.

눈동자는 거세게 떨리고?

“오, 오랜만...이외다.”

목소리의 떨림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왕선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더 우스운 건 이문정이 갑자기 치명적으로 근엄한 표정을 짓더니 실실 쪼개고 있다는 거다

...미쳤나보다.

“한데, 이 선생이 여긴 어쩐 일이오?”

“양 부자는 원래 알던 사람이외다.”

“그러니까 왜 왔냐고 물었소만?”

“···가문의 식솔이 길거리에서 굶어 죽게 생겼소. 해서, 아쉬운 소리를 하러 온 거요.”

왕선은 이문정의 눈을 지그시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양 부자. 좀 앉으시구려?”

“예, 예. 목사 나리.”

그렇지 않아도 어정쩡하게 서 있던 양홍과 마천목은 엉거주춤 그 자리에 앉았다.

왕선은 자연스럽게 상석에 자리 잡았다.

“양 부자.”

“예. 말씀하십시오.”

“본관이 왜 온 거 같나?”

“미천한 놈이 뭘 알겠습니까?”

“일전에 의병을 일으킬 때 도와준 보답을 하러 왔네.”

양홍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드디어 수확의 계절이 온 거다.

대체 어떤 보답을 해줄까?

이번에 몰수한 땅이 엄청난데 그걸 조금 떼어줄까? 얼마나 줄까? 1할? 2할?

기대가 컸다.

왕선은 그를 지그시 쳐다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헛수작 부리지 말라고.”

“예. 예?”

“이번에 면천한 노비를 중간에서 거둬가려고 하지 않았나? 그 짓 하다가 내게 걸리면 가문을 작살 낼 수도 있네.”

“목, 목사 나리.”

“그걸 미리 말해주는 거네. 가문을 지켜줬으니 이만하면 보답은 한 거 같은데?”

“오, 오해이십니다.”

“오해?”

“그렇습니다. 소인은 그런 마음을 품은 적이 없습니다.”

“오핸데 저 사람이 왜 여기 있지?”

“예?”

“저 사람은 노비를 다시 찾고, 당신은 노비를 얻고. 뭐 그러자고 작당하던 게 아닌가?”

“!!!”

양홍과 이문정의 눈이 흔들렸다.

특히 이문정의 안색은 하얗게 질린 수준이었다.

...대체 어찌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말인가? 조금 전에 논의하던 일이거늘.

그 순간 이문정의 뇌리에 스치는 게 있다.

[나는 궁예의 현신이다.]

그리고 오래전 읽었던 사서의 내용이 떠올랐다.

[미륵 관심법]

이문정의 눈이 경악으로 가득 찼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수가 없다. 그건 불가능하다. 폐주 궁예가 지껄인 헛소리다.

이성은 끝없이 부정했다.

그러나 미친 듯 요동치는 심장은 어쩔 수가 없다.

그리고 이성과 무관하게 입이 열렸다.

“양, 양부자. 나 먼저 일어나겠네.”

“이, 이 선생?”

“다시 찾아오겠네.”

이문정은 허겁지겁 밖으로 나갔다.

양홍은 황당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왕선은 재밌다는 듯 이문정을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 하나 더 있어.”

“예?”

“보답.”

양홍은 그제야 자신이 성급했다는 걸 느꼈다.

이문정과 나눈 일을 왕선이 어찌 알았는지는 몰라도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이제 보니까 이문정이 있어서 제대로 언질을 못 한 게 분명하다.

이제 진짜 제대로 된 보답을 해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500명의 군사가 쓸 병장기 좀 마련하게.”

“······.”

“창, 칼, 화살 등등.”

“······.”

“고생하게.”

양홍은 멍한 표정으로 왕선을 쳐다봤다.

그리고

“예, 예?!”

“정신 차리게.”

“나, 나리. 소인이 어찌 그 많은 병장기를 감당합니까?”

“전주 제일 부자가 그것도 감당 못 하나?”

“목, 목사 나리. 소인에게 어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어찌 이러긴. 고마워서 이러지. 자네가 아니었다면 본관이 의병을 일으킬 수 있었겠나?”

“한데, 어찌 핍박만 하십니까?”

“가문이 박살 날 뻔한 위기에서 구하고, 다시 내게 빚을 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줬는데? 이 정도면 보답 아닌가?”

“나리!”

양홍의 목소리가 커졌다.

왕선의 웃음기가 걷어졌다.

“미쳤나?”

양홍은 자신이 한 행동을 깨닫고 황급히 입을 열었다.

“송, 송구합니다.”

“말이 안 통하는군. 내가 진짜 자네를 배려하고 있다는 걸 모르나 봐?”

“예?”

“위조문서 탈탈 털어줘?”

“!!!”

“원칙대로 했으면 자네도 끝났어. 정말 몰라서 그래?”

그제야 양홍은 사태 파악이 됐다.

진짜로 왕선이 배려해준 거다.

사색이 된 낯빛으로 고개를 숙였다.

“송, 송구합니다. 이놈이 무지해서 미처 몰랐습니다.”

“미처 몰랐던 게 아니라 미쳐서 몰랐던 거겠지.”

“예?”

분위기를 풀어주려고 농이라도 하는 줄 알았으나 왕선의 표정은 싸늘하다.

양홍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원래 도둑놈은 제 주머니에 있는 걸 지켜주면 고마운지 몰라. 더 주는 것만 고마운 줄 알거든. 당신이 딱 그래. 안 그런가?”

“소, 소인이 진정 미쳐서 몰랐나 봅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그래. 그러면 병장기는?”

“조금만 줄여주십시오.”

“줄여?”

“400명...”

“재산도 줄이고 싶나?”

“냉큼 준비하겠습니다.”

왕선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생각해둔 일은 모두 마무리했다.

그리고 몰랐던 사실까지 알아냈으니 참으로 보람찬 하루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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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목아.”

“예. 형님.”

“전주에서 나가면 부곡이 있다.”

“공촌부곡과 피제부곡을 이르시는 거 아닙니까?”

“거길 확보해. 최대한 빨리.”

“남 몰래요?”

왕선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문정이 숨겨둔 토지가 거기 있어.”

“아. 그래서 이문정이 노비를 다시 확보하려고 했군요.”

“그렇지. 그리고 이 토지가 소유가 좀 애매한데 자네가 가서 깃발 꽂으면 될 거야.”

“그런 다음에는요?”

“여기까지만 잘 해내면 순탄해. 이문정이 손쓸 틈도 없이 토지를 몰수하면 상황은 끝.”

마천목은 고개를 갸웃했다. 도통 이해가 안 되는 거다.

왕선은 옅게 웃었다. 아무런 의심도 없는 마천목의 모습이 정겨워서다.

사실 원래 이건 미처 몰랐던 내용이다. 그랬는데 오늘 이문정을 만나서 알게 된 거다. 그러니까 뜻밖의 소득이라고 할까?

애초 계획은 어떻게든 노비를 빼돌리고 양홍에게 군량까지 넘기려고 했었다.

...결론만 따지면 양홍을 또 한 번 배려한 셈이다.

“노비를 면천해도 답이 없지?”

“민심이 술렁이고 있지요.”

“그래. 이번에 네 이름을 제대로 각인시키자고.”

“예?”

“노비를 모두 거둬.”

“소제가요?”

“그렇지. 그대로 데리고 부곡의 토지에서 농사짓게 해.”

마천목은 눈을 껌뻑였다.

왕선은 속삭이듯 말했다.

“농사는 딱 먹을 만큼만. 남는 시간은 창칼을 휘둘러.”

“!!!”

“1천 명 중에서 젊은 사내가 500명. 그들을 모두 내 사병으로 만드는 거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마천목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왕선의 말이 뜻하는 바를 모를 수가 없다.

“그리고 그 토지는 내 사병의 군량을 생산하는 거점이 될 거고.”

마천목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일거양득.”

“예?”

“백성의 민심이 폭발하고 있는데 이를 해결한 전주 목사. 어떤가?”

“하, 하면 여기까지 수를 내다본 겁니까?”

“겸사겸사 사병도 확보하고.”

“형, 형님.”

“아. 일거삼득이군. 자네도 백성들의 뇌리에 제대로 각인 될 거니까.”

입을 벌린 채 왕선을 쳐다보던 마찬목은 급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알겠습니다.”

“어서 움직이게.”

“그런데 형님.”

“왜 그러나?

“대체 목표가 무엇입니까?”

마천목의 표정은 진중했다.

뻔한 대답을 원하는 게 아니다.

왕선도 자세를 고쳐 잡았다.

“이인임의 몰락.”

“그 이후도 일러주실 수 있습니까?”

왕선은 답하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달이 보이고 주변을 무수한 별들이 포진하고 있다.

< 20화 사병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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