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미륵이니라-19화 (19/187)

< 19화 농사직설 >

전주 관청에는 수십 명의 노인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서 떠들어댔다.

“에잇. 척박한 땅에서는 우마분이나 연지저엽(가을초)를 사용한다니까.”

“이 노친네가 내 말을 끝까지 들어봐. 그것도 사용하는데 인분과 잠사도 쓴다니까.”

“이 늙은이가 미쳤나? 내가 사람 똥은 거름으로 써봤는데 인분이란 건 들어보지도 못했어.”

“이 노친네가 노망이 들었나. 사람 똥이 인분이야.”

“···그게 또 그렇게 됐나?”

“미쳤나?”

“아니 언제 그렇게 불렀나?”

“미쳤군.”

“이 사람들아 그건 올벼와 늦벼에 따라 달라.”

“누가 그걸 몰라? 올벼는 가장 좋은 종자니까 옥토에서만 경작하니까 겨울에 분(糞)을 사용하고, 늦벼는 우리가 떠든 대로 하는 거고.”

“잘났수다.”

“이 인간이 왜 시비를 걸어?”

난상토론이 이어졌다.

“황무지도 다 다르지.”

“내가 젊었을 때 지대가 낮고 물이 고인 황무지에서 농사를 해봤지.”

“안 그래 본 사람이 어디 있어?”

“그래도 나보다 많이 한 사람은 없을 거야.”

“나도 황무지 경작은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야. 이거 왜 이래?”

“이 사람이 정말.”

“보라고. 3~4월에 물풀이 자라지? 그때 윤목을 써서 풀을 죽이면 흙이 부드러워진다고. 이때 올벼를 뿌리면 된다고.”

“미쳤나? 황무지에 왜 올벼를 뿌려? 늦벼를 뿌려야지.”

“그래. 늦벼. 올벼를 왜 뿌려?”

“미쳤군.”

“이 늙은이가.”

“아아. 잠시만요. 늦벼, 올벼. 둘 중에 뭡니까?”

노인들의 말을 기록하는 사람이었다.

“늦벼. 젊은 사람이 벌써 귀가 먹었나?”

“ 이 미친 노친네야. 자네가 올벼라고 했다고.”

두 사람의 투덕거림은 이어졌다.

한참 쓰던 관리는 딱 잘라서 말했다.

“그만 싸우시고 그 뒤는요?”

그제야 노인들은 멋쩍은 표정을 짓더니 다시 기억을 회상했다.

“나도 그런 다음에 땔나무 몇 개를 묶었지. 그 뒤 소를 부려서 끌었지.”

“자네 소도 있나?”

“그게 내 소겠어? 아. 이건 적지 말게.”

“하긴. 그렇게 몇 년 했나?”

“한 3년 하면 우경할 수 있더군.”

“난 2년 만에 해냈어.”

“공갈도 적당히 치라고. 저건 적을 필요 없어.”

“예. 저도 안 적습니다.”

관리는 단호했다.

그러자 허풍을 치던 노인은 어물쩍 입맛을 다셨다.

“진짠데.”

“허. 누구 앞에서 헛소리야? 내가 농사만 몇십 년 지었어. 이거 왜 이래?”

토론은 성대하게 진행됐다.

탁주 한 사발에 짭짤한 전까지 나오자 노인들은 더 신나게 떠들었다.

“난 젊었을 때 초목이 무성한 곳에서 농사도 지어봤지.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해.”

“그거 그냥 불태워버리면 끝이야. 그런 다음에 거름 치면 되고. 그걸 무슨 고생이라고.”

“기다리는 게 고생이었다고. 이 인간아. 아. 잘 적고 있나?”

“계속하세요.”

그들의 곁에서 쉬지 않고 붓을 움직이는 관리들은 죽을 맛이었지만.

그래서였을까? 언제부터 그들의 목소리에는 영혼이 빠져나갔다.

이런 토론은 며칠 동안 이어졌다.

관리들의 눈에는 초점이 없어졌다.

얼마 뒤 왕선은 전녹생을 찾아서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내기가 제초의 편리함만 있는 건 아니라오.”

“무슨 말씀입니까? 직파법보다 잡초를 제거하는 데 큰 효과가 있는 게 모내기법이지 않습니까.”

“그건 그런데 다른 효과도 있다는 말이외다.”

전녹생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말을 한 농민은 없었는데 궁금하군요.”

왕선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지금처럼 직파법을 하면 논은 항상 일하지만, 모내기하면 볏모를 할 동안 논이 쉬고 있소. 가을에 추수한 뒤 볏모가 끝날 때까지 다른 작물을 심으면 되지 않겠소?”

“허.”

“어떻소?”

“허.”

“왜 그러오?”

전녹생의 눈은 점점 커졌다.

“전 선생?”

“아니 대체 이런 방법은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하하하. 괜찮소?”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걸 잘만 해낸다면 전주는 천하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 될 겁니다. 배고파서 죽는 사람이 없는 지역이 될 겁니다.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려.”

“혹시 심을 작물도 생각해두셨습니까?”

“물론이오. 벼를 추수한 다음 보리를 심으면 적당하지 않겠소?”

“과연 대단하십니다.”

“과찬이오.”

왕선은 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해서 말이외다.”

“예. 주공.”

“농서의 이름은 내가 정해도 되겠소?”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왕선은 지필묵을 꺼냈다.

오른손에 든 붓은 유려하게 움직였다.

“이걸로 합시다.”

전녹생의 시선이 옮겨졌다.

[농사직설]

감탄했다.

“참으로 적절합니다.”

-----

마천목이 문서 더미를 잔뜩 들고 왔다.

“형님. 유력가의 노비가 1천 명에 육박합니다.”

“많군.”

“모두 전주 관청으로 귀속시켰습니다.”

“건장한 사내는?”

“대략 500여 명입니다.”

500명이라.

잠시 생각을 곱씹던 왕선은 전녹생을 쳐다봤다.

“음. 전 선생. 감당할 수 있소?”

“빠듯한 건 사실입니다.”

“그러면 모두 면천하는 건 어떻소?”

“면천이라고요?”

“그들이 경작하면 조세도 낼 거고. 나쁘지 않을 거 같소만?”

“음.”

“좋은 게 좋은 거요. 그렇게 합시다.”

“그리하시지요. 그들을 수용할 수 있는 여건도 아니니.”

-----

천 명의 노비를 면천한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졌다.

백성들의 반응은 비슷했다.

“갑자기 면천이라고?”

“이게 대체 무슨 말이야?”

“관청의 노비로 삼으면 될 건데 왜 면천해?”

“이 답답함을 어디 가서 하소연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러니까 불만이 폭발한 거다.

노비를 면천했는데 왜 불만이 폭발한 것인가?

만일, 기존의 전주였다면 별다른 불만이 새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주 관청의 권농정책은 전과 다르다.

이럴 때 1,000명의 노비를 면천한다?

이건 경쟁자가 등장한 거나 마찬가지다.

“형님.”

“왜?”

“백성들이 술렁이고 있습니다.”

“그래. 그렇더라고.”

“솔직히 괘씸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칭송하던 사람들이 이렇게 돌변하다니.”

“천목아.”

“예.”

“백성의 욕심을 탓하지 마라.”

“어째서 그렇습니까?”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리는 욕심이니까.”

마천목은 멈칫했다.

“욕심을 부리는 것도 사치인 세상이라지만 백성의 작은 욕심까지 탓하면 너무 각박하지 않겠나? 또, 그 욕심이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러니 탓하지 마.”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생각하지 못할 수는 있지. 그런데 단정 짓기 전에 들어봐. 그러면 조금이라도 말이 부드러워질 거야. 사람의 귀가 두 개고 입이 한 개인 이유. 잘 알지 않느냐.”

“송구합니다. 형님.”

“그래. 어서 가자.”

두 사람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양홍의 사가였다.

“목, 목사 나리 오셨습니까?”

양홍은 버선발로 뛰쳐나왔다.

일전에 왕선에게 군량을 빼앗기다시피 한 양홍이다.

아까워서 몇 날 며칠을 잠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왕선이 왜구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더니 전주 목사까지 됐다.

그때 느꼈다.

자신은 선견지명이 있다고.

왕선이 의병을 일으킬 때 나름대로 큰 역할을 한 건 명확한 사실이 아닌가?

이제 앞으로 좋은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왕선의 부름이 없다.

초조하게 기다렸지만, 일언반구 없다.

지쳐서 직접 관청으로 찾아가려고 했으나 일전에 겪어본 왕선의 성정이 보통이 아니었다. 괜히 설레발 치다가 무슨 말을 들을지 모른다. 그래서 인내를 가지고 기다렸는데 드디어 오늘 왕선이 찾아온 거다.

“잘 지냈나?”

“덕분에 무탈했습니다.”

“양 부자가 무탈한 게 왜 본관의 덕인가?”

“첫째로 목사께서 왜구를 물리치셨고, 둘째로 이런 선정을 베푸셨습니다. 어찌 덕이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옥쟁반에 옥이 굴러가면 이럴까?

양홍은 정말 말을 잘했다.

왕선도 딱히 듣기 싫은 말은 아닌지라 웃음으로 응대했다.

“그런데 손님이 있었나?”

“아. 전주 이씨의 이문정 선생이 방문했습지요.”

“누구? 이문정?”

“예, 예. 그렇습니다.”

왕선과 이문정의 불편함을 모르는 전주 사람은 없다.

이를 떠올린 양홍은 어색하게 웃었다.

“손님을 내칠 수가 없는지라.”

“누가 뭐라고 했나?”

“역시 배포가 크십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문정 선생은 곧 자리에서 일어날 겁니다.”

“됐네. 합석하지.”

“예?”

왕선은 놀란 표정의 양홍을 무시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 19화 농사직설 > 끝

ⓒ 날아오르기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