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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18화 (18/187)

< 18화 무르익는 권농정책 >

곡식이 익지 않은 것을 기(饑)라 하고, 채소가 익지 않은 것을 근(饉)이라 한다.

이 시절 백성이 바라는 건 크지 않았다. 배불리 먹고 등 따시게 눕는 것도 아니다. 단지, 기근이 없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늘 기근을 두려워했다.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이를 걱정하며 살았다. 기근을 막아내는 게 참으로 어려운 일이기에 그러했다.

정치가 바로 섰다고 하더라도 자연이 일으키는 기근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 없다. 그러나 기근을 대비할 수는 있다. 또한, 구휼미를 풀어 백성을 구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가 혼란스럽다면 있던 저수지도 유명무실해지고, 구휼미는 전설에서나 존재하게 된다.

비록 군사의 군량을 넉넉하게 확보하고자 시행한 권농정책이었으나 민본이 바탕에 깔리지 않을 수 없다. 만일 백성의 사정을 신경 쓰지 않고 군량만 확보하고자 했다면 가혹한 징수를 하면 되니까.

“국용은 수전을 중히 여기고 민식은 한전을 중히 여깁니다.”

수전은 논, 한전은 밭이다. 국가 재정은 수전에서 생산되는 쌀, 백성의 먹을거리는 한전에서 나는 생산물로 한다는 거다.

함께 저수지 축조현장에 나선 전녹생은 부연설명을 했다.

“조세 징수는 쌀을 기준으로 했지요.”

“한전에서도 조세를 잡곡이나 황두로 징수하지 않소?”

“잡곡이나 황두는 쌀이 가진 가치의 절반으로 칩니다. 또, 한천의 소출은 수전에 미치지 못합니다. 보통 수전에 벼 종자 1, 2두를 뿌리면 소출이 10여 석(150두)에 이릅니다.”

“효율이 굉장히 높군요.”

“예. 반면, 한전에서는 종자 대비한 소출의 양이 훨씬 낮습니다.”

이건 어떤 경우라도 논이 확대되어야 한다는 지극한 사실을 의미했다.

“전주의 비중은 어떻소?”

전녹생은 쓰게 웃었다.

“한전이 앞섭니다.”

“허. 정말이오?”

전주는 전라도의 상징적인 곳이다.

비옥한 평야가 있는 곳이니 당연히 논이 많을 거로 생각한 왕선은 진심으로 놀랐다. 문뜩 스치는 게 있다. 전주가 그렇다면 다른 지역은 더 말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전주뿐만이 아닙니다. 고려 전체 농지의 7할이 넘는 규모가 한전입니다.”

“왜 그리된 거요?”

“왜구의 침탈로 해안가 수전이 방치된 탓입니다.”

“···그 말은 결국 놀고 있는 토지가 많다는 거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는 당장 어쩔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그건 그렇소만.”

전녹생의 말대로다.

왜구의 침탈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때 섣불리 해안가 수전을 경작하러 간다는 건 아주 친절하게 왜구의 식량창고 역할을 해주는 거다.

전녹생과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새 저수지 축조현장에 도착했다.

순탄해도 이렇게 순탄할 수 있을까.

전녹생은 순풍에 돛단 듯 일을 처리했다.

그런데도 직접 현장에 나온 이유가 있다.

망국적인 토지 겸병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 힘입어 자발적인 저수지 축조는 순조롭다. 이건 어떻게든 진행된다. 지금 왕선이 직접 눈으로 보더라도 전체의 사기는 높다.

하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지금 제대로 각 잡고 준비해야 할 건 다음이다. 힘들게 저수지 축조하고 이앙법을 시행하더라도 어설프게 진행된다면 농사는 망한다. 실로 감당할 수 없는 후폭풍에 시달리게 된다.

무릇 조정의 관료보다는 시골의 선비가 농사를 잘 안다. 그러나 친히 농사짓는 농부만큼은 농사에 대해 알지 못했다.

아무리 전녹생이 꼼꼼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직접 농사짓는 농부만큼 세밀하게 알 수는 없다. 명군들이 농민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서 농서를 작성하게 한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다.

“오늘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왕선은 옅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축조를 멈추게 하고 모두 불러 모았다. 백성들을 두루 훑어봤다.

그러다가 연신 땀을 닦는 노인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런데 그 모양새가 참으로 어정쩡하다.

-큰일이구나. 목사 나리께서 오실지는 생각도 못 했어.

궁금했다. 무슨 사연이 있길래 저토록 당황할까.

자세히 살펴보니 옷에 흙이 묻어 있지 않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늙은 몸이다. 눈치껏 자리를 피해야겠다. 괜히 있다가 옥토를 탐낸다고 봉변을 당할 수도 있다.

보아하니 작은 힘이라도 거들고자 나온 노인이 분명하다.

...아니다. 정확하게는 축조현장에 발을 내딛지 못하는 거다.

하지만, 의욕과 달리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게 뻔한 노인이 어설프게 명단에 이름만 올리는 걸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니까.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눈치만 살폈을 거다.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가 고약하다고 욕할 일이 아니다.

노인의 사연이 안타깝지만, 왕선 역시 괜한 동정심을 품을 생각은 없다. 통치에 사사로운 감정은 독이 될 뿐이니까.

하지만, 이 노인의 역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늘 바로 그 역할을 내리고자 이 자리에 온 거다.

-짝

왕선은 두 손을 마주쳤다.

약간 어수선했던 분위기는 금세 집중됐다.

“모두 고생이 많네.”

“아닙니다. 이를 어찌 고생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저수지가 잘 만들어지면 농사에 도움이 됩니다.”

“예. 맞습니다. 나리의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참으로 잘 전달 됩니다.”

모두 왕선을 칭송했다.

분위기는 아름답다.

“본관이 저수지를 축조하게 한 이유를 아는가?”

“음. 모내기법을 시행한다고 들었습니다.”

“옳다. 참으로 옳다. 해서, 오늘 너희를 만나러 온 것이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정확하게는 모내기법을 잘 아는 현자를 만나러 왔다고 하지.”

“현자요? 현자를 만나시려면 산속을 가보셔야 하지 않습니까?”

“하하하. 산에 박혀 있는 사람이 어찌 농사를 잘 알겠나. 농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자네들이지. 안 그런가? 그래서 이곳에 현자가 있다는 말이야.”

“오오. 우리가 현자라는 겁니까?”

별것 아닌 말이었으나 인부들의 분위기는 한껏 밝아졌다.

왕선은 싱그럽게 웃었다.

“그렇지. 자네들이 현자일세.”

“오오.”

“자자. 그러면 이제 자네들의 의견을 들어보려고 하는데.”

“무지하지만 쥐어 짜내보겠습니다.”

의욕이 넘치는 젊은 인부다.

참으로 보기 좋은 모습이다.

“그래. 자네에게 묻지. 모내기할 논의 조건이 있나?”

“반드시 물을 공급받을 수 있는 논에서 해야 합니다.”

“자세히 말해보게.”

“음. 모내기할 때 물을 댄 후 1할에 볏모를 키우고 나머지 9할의 공간에는 모를 심습니다.”

“본관이 농사는 잘 알지 못해서 묻겠네. 모를 심을 때 요령은 있나?”

젊은 인부가 더듬거린다.

“송, 송구합니다.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모, 모내기할 논은 써레질을 할 때 높고 깊은 곳이 없도록 논 고르기를 잘하는 게 중요합니다.”

조금 전 눈치를 보던 노인이다.

왕선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계속해보게.”

“써린 다음 흙탕물이 가라앉기 전에 모를 냅니다. 모내기할 때는 물을 얕게 댄 후 모를 가지런히 맞춰서 엄지손가락 반 정도 되는 깊이로 얕게 심어야 새 뿌리가 빨리 내리고 분얼을 많이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못자리를 먼저 갈고 쟁기질을 해서 갈고, 흙덩이를 부숴 고르고 평평하게 하며 무르게 한 다음 물을 빼고 연한 버드나무의 가지를 꺾어 못자리에 두껍게 깔고서 발로 밟습니다.”

노인의 말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런 다음에 버드나무 가지를 밟게 되면 흙과 뒤섞이는데 마침내 거름이 됩니다. 이후 햇볕을 쫴 마르게 한 다음 물을 대고 볍씨를 뿌립니다.”

“볍씨는 3, 4일 물에 담갔다가 꺼내 호천(빈 섬)에 넣고서 하루가 지난 다음에 파종합니다. 그래야 유리합니다. 뿌린 볍씨는 번지를 사용해 흙으로 덮어주어 자라게 합니다. 못자리에서 볏모가 한 움큼 이상 자라면 모내기할 수 있습지요.”

“볏모가 한 줌 이상 자라면 모내기가 가능합니다. 이때 모를 쪄서 묶음까지 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못자리의 시비에 버드나무 가지를 사용했으나 모내기할 곳은 가을초나 우마분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모내기하려면 흙이 부드러워야 합니다. 하여, 부지런히 갈고서 흙덩이를 곱고 부드럽게 만들어야 합니다.”

“모내기할 때 한 포기에 네다섯 개를 넘지 않게 볏모를 심을 것이며, 뿌리가 흙에 내리기 전에는 물을 대는데 깊게 해서는 안 됩니다.”

모두 노인의 말을 경청했다.

한참 동안 신이 난 듯 떠들던 노인은 그제야 화들짝 놀라면서 눈치를 살폈다.

“송, 송구합니다. 이놈이 주제도 모르고 나섰습니다.”

“하하. 아닐세. 참으로 훌륭했어. 안 그렇소? 전 선생.”

“과연 그렇습니다. 소생이 오늘 여기서 현자를 만났습니다.”

“그렇소이다. 현자가 따로 없소. 이렇게 자세히 알고 있다니.”

“오늘 나오지 않았더라면 모내기법으로 농사를 망칠 뻔했습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오.”

왕선과 전녹생의 대화를 들은 노인은 귀까지 시뻘게졌다.

인부들은 부러운 눈으로 노인을 쳐다봤다.

“전 선생. 오늘 들은 대화를 서책으로 만들면 어떻겠소?”

“오. 참으로 지당하십니다.”

“내친김에 이렇게 합시다.”

“말씀하십시오.”

“전주성 곳곳에 기력이 딸려서 농사짓지 못하는 노인이 많을 거요. 그들을 모두 모아서 기억을 적는 거요. 천하에 그보다 훌륭한 권농서가 어디 있겠소?”

전녹생은 무릎을 '탁' 치면서 감탄했다.

“지금 당장 시행하겠습니다.”

“그리하겠소?”

“하지 말라고 하셔도 소생은 할 겁니다.”

“하하하.”

< 18화 무르익는 권농정책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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