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저수지 축조 >
이문정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하늘만 쳐다봤다.
불과 하루 전만 하더라도 저 하늘이 우습게 보였다.
그런데 지금 다시 보니 참으로 넓다.
...감히 범접하지 못할 정도로.
평생 유학의 길을 걸었다.
누구보다 괴력 난신을 멀리하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궁예의 현신이라니.
가당치도 않는 소리다.
당장이라도 대갈성을 내질렀어야 옳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광기에 번뜩이는 왕선의 눈과 마주쳤을 때 오금이 저렸다.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전주에서 기반을 쌓고자 지금껏 노력했다.
장차 대업을 도모할 가주를 위해서.
그런데 평생의 공덕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자괴감이 걷잡을 수 없이 솟구칠 때 왕선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개경에 도움을 청하거나, 동북면 이성계에게 고자질 하거나 얼마든지 해봐. 마음대로 해. 그런데 귀신도 모르게 해야 할 거야. 명심해. 또 내 눈밖에 난 짓을 하면 진짜 요절을 낼 거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누구보다 올곧다고 자부한 이성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만 거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여기까지 온 것인가.”
허탈했다.
참으로 허탈했다.
초점 없는 그의 시선은 전주성 곳곳에서 휘날리는 깃대로 향했다.
[부정부패 너나없다. 땀 흘려서 밥을 먹자.]
[위조문서. 자세히 보면 보입니다.]
[앞에서는 고결한척. 뒤에서는 구린내?]
[돈은 전주에서 벌고, 쓰는 건 동북면에서?]
...전주 유력가를 풍자하는 표어다. 만백성이 한껏 조롱하고 있다.
이문정은 바늘로 심장을 찌르는 고통이 느껴졌다.
그렇게 변소 정책이 촉발한 전주 내부의 싸움은 전주 목사 왕선의 압승으로 순식간에 종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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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공. 전주 김씨의 식솔들은 어찌합니까?”
“그 사람들을 대역죄로 처벌할 수 있소?”
전녹생은 멋쩍게 웃었다.
“대역죄로 처벌하려면 개경에 고해야 합니다.”
“그렇겠지요?”
“예. 일이 커질 겁니다.”
“그건 곤란하지. 적당하게 벌하시오.”
“알겠습니다. 어차피 모든 가산을 몰수당할 것이니 죽는 게 나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랬다.
왕선은 이번 사안을 크게 만들 생각이 전혀 없다.
괜히 개경에서 개입할 여지만 만들어줄 뿐이다. 그건 하책 중의 하책이다.
“전주 이씨를 비롯한 세력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면 어찌 되오?”
“복잡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전주의 토지를 모두 가지는 것이니까요.”
“그거 참으로 바람직하오.”
왕선은 손을 살짝 만지면서 은근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험험. 전 선생.”
“왜 그러십니까?”
“토지는 어디로 귀속되는 거요?”
“전주목으로 귀속됩니다. 왜 그러십니까?”
만일 방대한 토지가 나라에 귀속되면 골치 아프다.
그건 말 그대로 죽 써서 개 주는 꼴이니까.
그런데 전주목으로 귀속되는 거면 아주 훌륭하다.
“아아. 아니라오. 그러면 됐소. 기존 경작하던 백성은 그대로 두면 되겠구려.”
“예. 복잡하게 얽혔던 수조권을 단번에 정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주 대부분 농지에서 토지 겸병이 없어질 겁니다.”
“백성들이 환호성을 지르겠군.”
“주공의 선정에 눈물을 흘릴 겁니다.”
“기존 경작하던 백성은 그대로 보존하시구려.”
“예.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조만간 새로 경작권을 부여한다고 알리세요.”
전녹생은 눈을 껌뻑였다.
“···경작권을 박탈하시는 겁니까?”
“아.”
“주공?”
“모내기법 아시오?”
“물론입니다.”
“그걸 해보려고 하오.”
“음. 모내기법이 큰 효과가 있다고 듣긴 했습니다. 그러나 가뭄에 취약합니다. 득보다 실이 많을 겁니다.”
“가뭄에 취약하면 가뭄을 잘 대비하면 되오.”
“송구합니다만 저수지를 축조할 여력...이 없습니다.”
“저수지 축조에 참가한 사람을 우선하여 경작권을 내릴까 하오.”
“자발적인 참여를 독려하신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소. 여건이 안되면 어쩔 수 없고.”
전녹생은 빠르게 상황 파악을 했다.
어차피 지금 유력가의 토지에서 상당수 전주 백성이 먹고 산다.
이런 상황에서 저수지 축조 참여를 두고 우선권을 부여한다?
이건 옥토에서 경작할 자격을 준다는 거다.
정말 여건이 어려워서 저수지 축조에 참가하지 못한다면?
비옥하지 않은 땅에서 경작하면 된다.
지금보다 나빠질 게 어디에도 없다.
“참으로 좋은 방책입니다.”
“전 선생이 이해해주니 참으로 다행이오.”
“모내기법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저수지는 권농에 꼭 필요한 일입니다. 시비법의 확대와 저수지라. 전주 전역이 옥토로 거듭날 겁니다. 이를 선정이라고 하지 않으면 무엇이 선정이겠습니까?”
“하하하. 내 얼굴에 금칠 그만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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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관청의 방침은 빠르게 퍼졌다.
“그게 무슨 말인가? 갑자기 저수지라니?”
“전주 관청에서 대대적으로 저수지와 보 따위를 축조한다고 하더군.”
“허. 농사짓고 입에 풀칠하기도 빡빡한데 갑자기 역이라니.”
“이 사람아. 말 좀 끝까지 들어보게.”
“들어보고 자시고 할 게 어디 있나? 신임 목사가 선정을 베풀더니 결국 이렇게 되버리는군. 하늘도 무심하시지. 대체 우리는 어찌 살라고.”
“아니. 이 사람아. 그게 아닐세.”
“자네는 조금 전부터 뭐가 계속 아니라는 건가?”
“요역이 아닐세.”
“요역이 아니라고? 그러면 저수지는 어떻게 축조하나? 가서 일하면 품삯이라도 준다던가?”
“품삯은 아니고 경작지를 선택의 우선권을 준다더군.”
“그게 무슨 말인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백성들도 옹기종이 모여들었다.
“그러니까 옥토에서 경작하게 해준다?”
“그렇지. 축조에 참가하지 않는 사람은 척박한 땅일지라도 경작할 수 있으니 굶어 죽을 일은 없지.”
“허. 그건 그대로 안타깝군.”
“이 사람아. 그게 아니지.”
“또 뭐가 아닌가?”
“토지 겸병이 없어졌네.”
“!!!”
“조세를 관청에 한 번만 내면 끝이라고 하더라고. 그러니까 무조건 지금보다 나아지는 거지.”
“정, 정말인가?”
“그렇지.”
“옥토에서 경작하면 대체 쌀이 몇 석인가?”
“부자 되는 거지.”
“부, 부자?!”
이앙법 시행을 위한 저주지 축조는 거센 반향을 일으켰다.
정확하게는 전주 관청의 토지에서 경작하는 농민은 토지 겸병에서 해방된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래되자 사람들은 전주 관청 소유의 토지 경작권을 얻고자 서둘러서 저수지 축조에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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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잘 풀리더니 한도 끝도 없이 잘 풀렸다.
하천의 수위로 강우량을 파악하는 수표와 바람의 방향을 가늠하는 풍기가 완성됐다. 그리고 측우기도 끝을 봤는데 상당히 조잡했다. 일단 배치하고 점차 보완해 나가기로 했다.
“고생했네.”
“수월하게 진행했습니다.”
박자청은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왕선은 넌지시 던졌다.
“겸손이라는 걸 좀 배우게.”
“송, 송구합니다.”
“앞으로 전주의 많은 일을 하게 될 것이네. 때로는 많은 인력이 투입되는 일도 맡아야 할 거야. 그런데 자네가 매사 거만하고 독단적으로 임하면 인심을 잃고 말아. 무슨 말인지 알겠나?”
“예, 예. 목사 나리.”
“내 말 새겨들어.”
박자청은 진땀을 흘렸다.
모습이 제법 안쓰럽긴 했으나 왕선은 봐줄 생각이 없다.
그가 본 박자청이라는 사람은 너무 오만하다.
초장에 이를 잡지 못하면 문제가 생길 거다.
물론 박자청이 대군을 이끌고 선두에 서는 일은 없다. 그러나 토목 공사가 전장보다 위험하지 않은 게 아니다. 많게는 수백, 수천 명이 동원된다. 이를 총괄해야 할 박자청이 이처럼 독단적이라면 언제라도 문제가 터질 거다.
“앞으로 자중하겠습니다.”
“...자중하라는 말이 아니라 고치라는 말이야.”
“송, 송구합니다.”
“송구하라는 말이 아니라 반성하라는 말인데?”
“뼛속 깊게 새기겠습니다.”
이쯤에서 그만 혼내기로 했다.
왕선은 슬쩍 시선을 돌리면서 말했다.
“저수지 축조한다는 말 들었나?”
“예.”
“그래. 준비하게.”
“그처럼 큰일을 소인이 맡습니까?”
“허. 내가 조금 전에 뭐라고 했나? 그럴 거라고 했네만.”
“송, 송구합니다. 새겨 듣지 않은 게 아니라 실감이 나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딱히 무리는 아니다.
노비였던 박자청이다.
그랬는데 수백 명이 동원될 저수지 축조를 총괄하라고 했다.
과거의 박자청으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왕선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노비는 요역에 동원하지 않아.”
“그...렇습니다.”
“해서, 자네는 이렇게 큰 일을 해본적이 없어. 또, 손재주가 뛰어나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해보지도 않았고.”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참가할 사람들은 많은 요역을 경험했고, 늘상 협동하면서 일했지. 본관은 자네가 이번을 기회 삼아서 좋은 경험을 하길 바란다네. 해서, 지금보다 더 성숙해졌으면 하네.”
박자청은 감격했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매섭던 사람의 온기가 온몸으로 느껴진 거다.
이토록 자신을 배려해주다니.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다.
“나, 나리.”
“언제까지 나리라고 부를 건가?”
박자청은 멍하게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공.”
“고생하게.”
< 17화 저수지 축조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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