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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16화 (16/187)

< 16화 왕선의 정체 >

이문정은 녹초가 된 몸으로 왕선을 찾았다.

“항...복하겠소.”

“항복?”

“그렇소.”

왕선은 박장대소했다.

“크크큭. 본관이 지금 당신들과 힘겨루기를 하는 걸로 보이시오?”

“!!!”

“정신 승리라도 하고 싶은 거요? 진짜 기가 막히는군. 전주 밖으로는 힘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인사가 기껏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그거요? 겨뤄볼 가치도 없는 존재란 말이외다.”

“이, 이보시오. 목사.”

“또 하나 더 말해주겠소. 그런 말은 일이 터지기 전에 와서 하는 거요. 지금처럼 모든 상황이 종결됐을 때는 아무런 소용이 없소. 이런 것도 가르쳐줘야 하오?”

수모도 이런 수모가 없다.

한때 고관대작을 지냈던 이문정이다.

그 강건했던 선왕도 이렇게까지 막대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고작 신임 전주 목사가 이토록 무시한다.

...하지만, 어쩔 방도가 없다.

전주 이씨를 비롯한 유력가문이 저지른 죄가 명백하게 폭로된 상황이다.

“···내가 어찌하면 넘어가 주겠소?”

“안 넘어가 줄 거요.”

“간곡히 청하오.”

“죄를 지었으면 그냥 벌을 받으시오. 당신들이 평생 백성에게 그러지 않았소이까?”

“···반성하오.”

“반성하라고 벌을 내리는 거요.”

“···모든 가문이 힘을 합쳐서 전주 관청의 일에 협조하겠소.”

“그 가문의 힘은 이제 박탈당했소만?”

이문정은 말문이 막혔다.

타협의 여지가 없는 왕선의 의지가 읽혔기 때문이다.

...남은 건 하나밖에 없다.

“가문의 명맥이라도 이어갈 수 있게 선처해주시오.”

그러니까 최소한의 재산이라도 남겨달라는 거다.

...한 마디로 구걸이다.

왕선은 비웃었다.

“내가 왜?”

“!!!”

“내가 왜 전주 이씨를 배려해야 하지?”

“!!!”

“좋아. 살려는 주지. 그런데 개처럼 빌어먹고 살아야 할 거야. 너희 가문이 가진 모든 토지는 몰수당할 거고, 노비는 관청에 귀속될 거다.”

“!!!”

“최선을 다해서 살아보도록.”

덧붙였다.

“아. 능력 되면 도망가. 너희 선조처럼.”

이문정의 몸은 와락 무너졌다.

전주를 주름잡았던 전주 이씨의 몰락이 피부로 체감됐다.

그것도 신출내기 인사의 손에.

미처 대응하지도 못할 정도로 순식간에.

“대, 대체 당신은 누구요?”

그의 목소리는 처참할 정도로 떨렸다.

“어, 어째서 이토록 모질게...”

이문정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섬뜩할 정도로 노려보는 왕선의 눈과 마주쳤기 때문이다.

*****

출마 선언도 하지 않았는데 1년 넘게 지지율 30%를 유지했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혼탁한 정치판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출마 선언만 한다면 지지율은 고공행진 할 거다.

얼마 전에 대선 출마를 선언한 같은 당 김태산 후보의 지지율이 10%가 되지 않는다. 당 경선은 식은 죽 먹기다.

김윤후는 지나간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지독하게 가난했던 집에서 태어났다.

독종이라는 말을 평생 달고 살 정도로 악착같이 살았다.

한국 최고의 국립대를 졸업하고 아나운서를 거치면서 정계에 진출했다.

하루도 헛되게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대통령이 되겠노라고.

모든 건 순탄했다.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가 그걸 증명했다.

그러나 난관이 없는 건 아니었다.

같은 당 경쟁자인 김태산 후보 측에서 무서울 정도로 압박했다.

내용은 단 하나였다.

출마 선언을 하지 말라는 거다.

하지만 김윤후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협박이 이어졌지만 요지부동.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왜? 자신을 협박할 방법 따위는 없으니까.

왜? 여기까지 오면서 작은 부정도 저지르지 않았으니까.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다고?

틀렸다. 바로 김윤후가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오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협박은 말의 상찬에 불과했다.

또한, 김태산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부패하고 무능력하다.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될 수는 없다.

내일 기자회견을 잡았다. 미뤄뒀던 출마 선언을 할 거다.

가장 적절한 때를 잡아둔 거다.

그랬다. 김윤후는 정치에 아주 능통했다. 행동과 시기를 잡아내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그의 엄청난 노력과 더불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하루 남았군요.”

절친한 후배 의원인 박종선이다.

“내일이면 세상이 바뀔 겁니다.”

“하하하. 다 네 덕분이야.”

“별말씀을요. 형님의 진심이 국민에게 전해진 겁니다.”

김윤후는 웃음으로 화답했다.

“오늘 본가로 가실 겁니까?”

“그러려고.”

“제가 모실게요.”

“아니야. 박 의원도 쉬어야지.”

“알겠습니다. 그러면 내일 회견장에서 보지요.”

그리고 그날 저녁 김윤후는 불의의 사고를 당한다.

교통사고. 졸음운전을 하던 트럭이 그의 자동차를 덮친 거다.

“아. 진짜. 그러니까 적당히 하라고 했잖아. 왜 그렇게 설쳐댔어?”

익숙한 목소리.

김윤후는 정신이 혼미하다.

“그냥 얌전히 있다가 장관 자리나 받으면 서로 얼마나 편해.”

누...구지?

“그렇게 경력 쌓고 차기 정권에 도움도 되고. 서로 좋잖아?”

...기억났다.

“찬물도 위아래가 있고 똥물도 파도가 있어. 새파랗게 젊은 양반이 한참 선배인 김태산 후보를 넘으려고 하면 되겠어?”

박종선이다.

“차차기를 노리자고 백번은 말했는데.”

김윤후는 온 힘을 다해서 입을 움직이려고 했다.

“어? 그러면 나도 장관 자리 하나 차지하고. 얼마나 좋아?”

김윤후는 발악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이게 다 자업자득이야. 당신 나한테 장관 자리 하나만 약속했어 봐. 내가 이렇게까지 했겠어?”

속이 터질 듯 답답했다.

한마디만. 한마디만 하고 싶다.

“하여간. 근본도 없는 천한 놈이 상도의도 모르고 도리도 모르고. 아 오해하지 마. 내가 장관 자리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니야.”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네가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너를 얼마나 믿었는데.

“애초 당신처럼 근본도 없는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고 생각해봐. 이 나라의 품격이 땅에 떨어지는 거야. 그건 아니지. 사실 다음을 기약하자는 것도 그냥 해본 말이었어.”

그 순간 김윤후의 입이 살짝 움직였다.

“이...”

“어? 말할 줄 아네? 이러면 곤란한데? 하여간 명을 재촉하는 양반이라니까.”

그때 소름 돋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삐삐삐삐삐잇...

“잘 가.”

그렇게 숨이 멈췄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다.

그런데 김윤후가 아니다. 몰락한 고려 왕족 왕선의 몸이었다.

그의 기억이 머리를 잠식했다.

괄시받고 천대당한 존재.

누구도 왕선이 왕족인지 몰랐다.

그러나 치열한 노력을 했던 사람이었다.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고 책을 읽었다.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책을 읽었다. 닳고 닳을 정도로.

책을 구하지 못하면 훔쳐서라도 읽었다.

그러다 들키는 날에는 모진 매질도 당했다.

하지만 왕선은 멈추지 않았다. 개처럼 무시당해도 눈빛만은 번뜩였다.

그의 심장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의 심장이 오직 한 곳만을 바라봤기 때문이다.

바로 개경.

왕선이 남긴 마지막 기억에는 이 나라의 정점에 오르고자 한 그의 욕망이 있었다.

*****

스치듯 떠오른 기억.

김윤후의 한과 왕선의 한이 만났다.

두 사람의 생존 욕구가 만난 거다.

그것은 태산보다 거대한 권력의지를 부여했다.

그리고 생존과 권력의지의 가장 걸림돌이 속한 가문의 인사가 눈앞에 있다.

왕선은 싸늘한 눈초리로 이문정을 노려봤다.

“내가 누구냐고?”

어찌나 매섭고 표독스러운지 이문정은 오금이 지릴 정도다.

왕선은 고개를 기괴하게 틀었다.

어떤 말을 해줄까?

-이, 이자의 눈빛이 이상하다.

무슨 말을 해줄까?

-사, 산사람의 눈이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어찌 해줘야 할까?

-동북면에 있는 가주에게 이 사실을 전해야 한다.

...동북면? 가주?

-이 자는 대업에 걸림돌이 될 수가 있다. 내가 비록 이 꼴이 됐으나 가주만 건재하면 된다.

왕선의 눈이 더 차가워졌다.

“동북면에 있는 가주라.”

“!!!”

“이성계에게 말하면 뭐가 바뀌나?”

“!!!”

왕선은 키득거리면서 말했다.

“변방에서 설친다고 고려가 우습게 보이나 보군.”

이문정의 눈이 출렁였다.

“대, 대체 당신은 누구요?”

“나?”

무슨 말을 하면 전주 이씨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줄 수 있을까?

뭐라고 해주면 이문정을 옴짝달싹 못 하게 할 수 있을까?

...결정했다.

“나는 이 나라를 왕건에게 양도해준 사람.”

비릿하게 웃으면서 속삭이듯 말했다.

“궁예의 현신이다.”

“!!!”

“내 나라를 다시 돌려받고자 왔노라.”

몸을 내밀었다.

이문정의 귀에 나지막하게 말했다.

“옴마니 반메홈?”

“!!!”

이문정의 눈이 충격과 공포로 뒤덮였다.

< 16화 왕선의 정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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