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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15화 (15/187)

< 15화 조사 안 해도 다 나와 >

자신이 버젓이 보는 앞에서 전주 김씨의 김언지가 죽었다.

이문정은 이 참극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목사!”

“당신은 누구길래 관청에서 고함을 지르오?”

“허. 이보시오. 왕 목사.”

“통성명?”

평생 고결한 삶을 살아온 이문정이다.

그의 삶에 이런 황당하고 어처구니가 없는 경우가 없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백주에 이런 참담한 짓을 저지르고 무사할 성싶으오?!”

“진짜 웃기는군.”

“뭐요?”

“본관은 주상께서 내리신 어명을 받들어 전주를 통치하는 전주 목사. 당신이 대체 뭐길래 무사를 언급하오?”

“이, 이...”

“대충 분위기를 보니까 전주에 속한 가문의 인사 같은데 대체 무슨 자격으로 본관에게 이래라저래라 지적하면서 전주 관청의 행사에 간섭 질이오?”

“천하에 이런 법도는 없소. 아무리 목사라고 하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없는 게 있소.”

“김언지는 관청의 재물을 탐하고, 병사를 사유화하려고 했는데? 충분히 죽일 만했소.”

“김언지는 전주 김씨의 좌장이오. 그런데 이렇게 죽이다니.”

“거.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시오. 전주 김씨가 무슨 왕족이라도 되오? 그리고 김언지는 관리도 아니지 않소이까. 그냥 땅 많고 돈 많은 백성에 불과하오. 대단한 인사처럼 포장 좀 하지 마시오. 누가 들으면 본관이 정통 왕족을 즉결처분했는지 알겠소.”

“하. 그래. 그게 문제요. 즉결처분. 제대로 된 판결도 없었소이다. 지금이 무슨 전시란 말이오!”

“전시지.”

“왜 지금이 전시란 말이오?”

“됐소. 그건 본관이 알아서 할 일이외다.”

왕선은 대충 손을 내저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설명하는 게 귀찮고 구질구질하다.

이문정의 수염이 부들부들 떨렸다.

한평생 이런 상대는 처음이다. 말이 안 통한다.

“목사라면 응당 선정을 베풀어야 하건만.”

“본관이 선정을 베풀려고 변소를 만들었는데, 김언지가 강탈했소. 그리고 선정인지 아닌지는 백성이 판단하오. 한 줌도 되지 않는 당신들이 아니라. 더 말해야 하오?”

“당장 개경에 알리겠소이다.”

왕선은 비웃었다.

“마음대로 하시오. 그리고 좀 비켜주겠소? 본관이 조금 바쁘오.”

이문정의 얼굴은 수치심으로 얼룩졌다.

지켜보던 전녹생은 굳은 안색을 한 채로 나섰다.

“이 선생. 일단 물러가시오.”

“허. 전 선생!”

“아. 두 사람이 안면이 있소? 잘됐구려. 전 선생이 저 사람을 좀 처리하시오. 본관은 공사가 다망해서.”

그새 전주 관청은 시끌벅적해졌다.

마천목이 전주 김씨의 사람들을 모두 포박해온 거다.

이문정의 눈이 흔들렸다.

“목사!”

“아. 궁금한 게 있는데.”

왕선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당신은 이번 일과 무관하오?”

“!!!”

“왜 대답을 안 하시오?”

“허. 목사라는 사람이 어찌 이렇게 무도할 수 있다는 말인가.”

“거. 한 번만 더 본관을 희롱하면 후회하게 해줄 거요?”

“이...”

“무관하면 빠지시오. 화가 미칠 거요.”

“그게 무슨 말이오?”

“왜긴. 고문을 시작할 거요. 관련자들을 모두 잡아야지. 당신이 말한 판결. 그걸 하려고.”

이문정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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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정은 노기를 참을 수가 없었다.

당장 전주의 유력가를 모두 불러 모았다.

“신임 목사가 제정신이 아니오.”

성토는 멈추지 않았다.

김언지의 허망한 죽음은 충격을 넘어서 분노로 치달은 거다.

“이 선생. 이대로 두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맞습니다. 제대로 실력행사를 해야 합니다.”

이문정은 굳은 안색으로 좌중을 둘러봤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분기를 참지 못한 채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좋네. 당장 움직이지.”

“방침을 내려주십시오.”

“가문에 속한 땅을 경작하는 모든 농민을 내치게. 그리되면 백성의 원망이 목사에게로 향할 거야.”

“과연.”

“또한, 종놈들도 모두 내치게. 오갈 데 없는 그들은 관청으로 몰려갈 거야.”

“목사 놈이 하루도 넘기지 못할 겁니다. 민심이 들끓게 될 거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개경에 사람을 보내서 이번 일을 알려야 해.”

“알겠습니다. 우리 모두 모든 인맥을 동원하겠습니다.”

결의를 다지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감이 충만한 유력가들이 이문정의 사가를 벗어나려고 할 때였다.

“!!!”

수백 명의 군사가 겹겹이 포위하고 있다.

대노한 이문정이 나서려고 할 때

“모조리 추포하라.”

창을 어깨에 둘러맨 마천목의 외침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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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관청은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전주를 들고 흔들어대던 유력가문의 좌장이 모조리 잡혀 온 탓이다.

그들의 격분하여 쉬지 않고 고함을 질러댔다.

왕선은 일절 대꾸하지 않고 뒷짐을 진 채로 하늘만 쳐다봤다.

아까 이문정을 그냥 보낸 이유가 이거였다.

돌아가면 다 불러 모을 거니까.

그래야 일 처리가 간단하니까.

“목사! 대체 이게 무슨 짓이오!”

이문정이다.

“아. 또 당신이구려. 오늘 자주 봅니다?”

“당장 우리를 풀어주시오!”

“죄가 없으면 풀려날 거요.”

“죄? 우리가 무슨 죄가 있다는 거요?”

“아주 많던데?”

이문정은 싸늘하게 노려봤다.

“전주 김씨의 사람들을 고문했나 보군.”

“음.”

“그렇게 만들어낸 거짓이 진실이 될 수 없소. 더 일을 크게 만들지 마시오.”

“음.”

“우리도 참는 게 한계가 있소.”

“참으라고 한 적 없소.”

“뭐, 뭐요?”

“또, 참은 적도 없는 거 같은데?”

왕선은 이문정을 지그시 쳐다봤다.

“가문의 토지에서 경작하는 백성과 노비를 내쫓아서 본관을 궁지로 모시겠다? 참으로 신박한 방법이긴 했소.”

“!!!”

“그랬다면 골치 아프긴 했을 거요. 뭐. 딱 거기까지지만.”

이문정과 유력가들은 너무 놀랐다.

바로 조금 전에 논의한 내용이다. 잡혀 오는 바람에 어디 가서 말하지도 못한 내용이 아닌가. 그런데 그걸 왕선이 알고 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왕선은 조롱하듯 말했다.

“머리에 똥만 찬 사람들이라서 똥의 가치 정도는 생각해낼 줄 알았는데, 똥보다 못하오?”

“!!!”

“제 잇속을 차리고자 무고한 백성의 생계를 흔들다니. 천하에 이런 못 쓸 작자들이 있을까.”

왕선의 시선이 옮겨졌다.

“전주 최씨 최시한.”

“왜, 왜 부르시오.”

“토지 겸병. 아주 제대로 했더군.”

“하. 토지 겸병이라니.”

발뺌한다. 그러나 그의 속은 복잡했다.

혹시 뭔가를 알고 있나?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있다. 그 속을 왕선이 다 들여보고 있으니까.

“토지 겸병도 모르나? 당신이 하는 거. 같은 토지에서 조세를 두 번, 세 번 거둬서 백성들 굶겨 죽이는 거. 그거를 말하는 건데?”

“하. 이보시오. 목사. 나는 가문의 땅에서 수조권을 행사했을 뿐이오.”

“가문의 땅?”

“그렇소. 나라의 토지 제도가 그런 걸 나더러 어쩌란 말이오? 애초 토지를 분배할 때 겹치지 않게 했으면 이런 일도 없소. 따지고 보면 나 역시 피해자요. 내 땅을 다른 지주와 나눠야 하는 게 아니오?”

“토지 문서가 있다?”

“당연하오.”

“작년에 만든 토지 문서?”

최시한의 눈이 흔들렸다.

그러나 이내 자세를 고쳐잡고 고함을 질렀다.

“헛소리!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문서요.”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종이를 썼는지는 모르겠는데, 작년에 먹물을 들어가긴 했지.”

“!!!”

“도장을 만든 장인을 데려오지. 천목아. 가서 박철이라는 장인을 잡아 와라. 토지 위조를 한 죄인이다.”

“!!!”

최시한의 표정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악을 쓰듯 따져대던 모습은 이미 없다.

왕선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나머지 가문의 비리를 모조리 읊어댄 거다.

분노가 지배하던 유력가의 기세도 사라졌다.

분위기는 참담했다.

“끝으로 전주 이씨.”

이문정의 심장은 거세게 뛰었다.

“음. 큰소리치길래 청렴결백할 줄 알았는데 대단한걸?”

“목, 목사.”

“토지 문서 위조는 기본이고, 조세를 몇 번이나 후려쳤네? 심지어 살고자 척박한 황무지를 자발적으로 개간한 백성의 재산도 갈취? 며칠 전에 만든 토지 문서 들고? 그 와중에 엄청난 구타가 있었고. 다친 백성이 한두 명이 아니네? 와. 당신 완전 악질이네.”

“그, 그건 오해가 있소.”

“오해라. 하긴. 당신이 직접 지시한 건 없을 거요. 어쩌면 관여한 일 자체가 없을 수도. 나머지 전주 이씨 사람들이 했을 수도 있고. 그런데 당신도 알고 있었잖소? 알면서 그냥 내버려 둔 게 아니오? 그리고 그들은 가문의 좌장인 당신에게 알아서 곡식을 바쳤고. 물론 당신은 받았고.”

처참할 정도로 낯빛이 질린 이문정을 향해서 왕선이 물었다.

“이건 죄가 아니오?”

덧붙였다.

“그러면 대체 뭐가 죄요?”

누구도 말하지 못했다.

왜? 죄가 맞으니까.

왕선은 한탄했다.

“이러니까 나라가 썩고 백성은 죽어 나가지.”

혹시 일부러 부정부패 일삼는 건가?

전주 이씨가 이 땅을 차지하려고?

아주 잠시 쓸데없는 생각이 스쳤다.

“왜구보다 당신들이 더 악질이오. 왜구는 물리치면 끝이지만, 당신들은 대대손손 이 땅에 똬리를 틀고 있을 거니까. 참으로 끔찍한 일이로다. 전 선생.”

“예.”

“처벌 수위를 말하시오.”

“경중이 다릅니다.”

“가장 약한 건?”

“재산을 몰수할 수 있습니다.”

“제일 큰 건?”

“이 나라 고려의 모든 토지는 기본적으로 주상께서 허락하셨기에 사유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위조했다는 건 군왕의 권능을 희롱한 겁니다.”

“그러면 어찌 되오?”

“개경으로 압송할 수 있습니다.”

“준비하시오.”

“그리하겠습니다.”

고려 전역에 만연한 토지 겸병이다.

그러나 그것도 최소한의 명분을 들고 하는 짓이다.

바로 토지 문서.

그런데 문서 위조가 들통나서 개경으로 압송된다?

...이건 그냥 죽는 거다.

“목, 목사.”

다급하다.

“오, 오해가 있소.”

지금부터는 생존 싸움이다.

그들의 목소리는 참으로 간절했다.

왕선은 간단하게 내질렀다.

“전 선생. 유력가들의 비리를 주제로 2차 표어 대회를 준비하시오. 만백성이 이를 알아야지.”

“그리하겠습니다.”

“아. 압송되는 가문의 사가는 똥 보관창고로 씁시다.”

이문정과 유력가들의 표정은 말 그대로 썩어 문드러졌다.

< 15화 조사 안 해도 다 나와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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